154화
<44화. 첫눈.>
1.
식량창고는 활활 타올랐다.
대체 무엇이 그 불꽃을 그리 크게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헉헉…….”
그 무렵.
“여, 영주님…….”
“닥쳐라, 이년아!”
체가스 자작은 제 방에서 제 정력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는 초야권을 행사해 영지의 처녀를 데려왔다. 강제로 데려왔다. 처녀는 오는 길에 병사들의 주먹에 맞아 온몸에 멍이 들었다.
하지만 고난은 그게 시작이었다.
체가스 자작은 가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체가스 자작은 다짜고짜 온갖 도구들을 이용해 처녀의 음부를 농락했다. 처녀의 음부는 제 기능을 상실할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체가스 자작의 양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흐흐…….”
이 모든 열기가 체가스 자작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그래서 체가스 자작은 제 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2.
문수르는 멀티 글라스를 벗었다.
“아주 조금 고민했지만.”
멀티 글라스의 기능을 이용해 그가 확인한 건 다름 아니라 체가스 자작의 동향이었다.
체가스 자작의 동향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머무는 방에는 창문도 없었고, 문도 컸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마치 쇼를 하듯, 온몸을 움직이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덕분에 문수르는 체가스 자작의 변태적인 행위를, 잔혹한 강간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오히려 고민이 깔끔하게 사라지는 느낌이군.”
문수르는 솔직히 걱정했다.
전쟁이다.
전쟁을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죄책감에 밤잠을 못 이루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전쟁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의 꺼림칙함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걱정은 체가스 자작의 행패를 보았을 때 깔끔하게 사라졌다.
오히려 속이 시원해졌다.
“그래, 이 세상은 부당하지.”
가끔 생각한다.
아니, 자주 생각한다.
케르빈 월드는 너무나도 부조리하다. 특히 언제나 밤잠을 아끼면서까지 영지를 위해 일하는 이제르트 자작을 볼 때마다 그 부조리함에 짜증마저 치솟고는 한다.
영지민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이제르트 자작은 그렇게 고통 받고, 박해 받는데, 반대로 세상에 해악만 저지르는 체가스 자작과 같은 무리들은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는 쾌락을 누리고 있다.
이게 부조리하지 않다면 과연 뭐가 부조리하다는 걸까?
그러나 힘이 모든 걸 정하는 세상에서 부조리함을 외칠 만큼의 힘이 없었다.
이제까지는 말이다.
‘전면전이다.’
전운이 감돌고 있다.
‘필로스 왕이 침묵하는 건 이해가 안 가지만, 어쨌거나 왕의 침묵으로 방아쇠는 당겨졌다. 날아간 총알은 되돌릴 수 없지.’
그냥 전운이 아니다.
이미 전운 중 일부는 벼락을 열심히 내뿜고 있다.
한 번 시작된 전쟁은 쉽게 멈출 수 없다.
이제르트 자작이 힘을 쓰기엔 최적의 상황이다. 이제부터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한 견제와 감시의 눈길이 줄어들 테니까.
“이제 남은 작업을 할 때군.”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이 모든 일을 마치고 무사히 성벽을 넘어, 지정된 포인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문수르만 제 역할을 하면 된다.
“체가스 자작, 조만간 다시 보겠군.”
3.
체가스 자작에게 강간당한 여인은 즉사했다. 여인의 음부는 이미 찢어진 지 오래였고, 찢어진 음부에서 일어난 출혈은 어마어마했다. 침대 위를 붉게 적신 것도 모자라 바닥에 뚝뚝 흘러내렸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체가스 자작은 자신의 식량창고 중 네 곳이 새카맣게 타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누군가 불을 지른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 중요한 소식을 왜 이제야 알리는 게냐!”
소식을 전달한 기사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 빌어먹을 초야권을 행사할 때 들어가면 기사 목을 베는 인간이, 네놈이니까!’
체가스 자작은 굉장히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성격 곳곳에 매우 뒤틀린 자이기도 했다.
저번에도 체가스 자작이 초야권을 행사한답시고 영지 처녀를 강간할 당시, 기사 한 명이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그 방에 들어갔다가 크게 혼이 났다.
크게 혼이 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다시는 기사로 활동하지 못할 정도의 처지가 됐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기사가 섣불리 체가스 자작의 행사를 방해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체가스 자작령의 기사들 중에서 진심으로 체가스 자작을 섬기는 기사는 없었다.
대부분이 돈과 명예, 그 두 가지 때문이었다.
실력이 있는 자는 돈을 위해서, 실력이 없는 자는 그나마 기사로 대우 받을 수 있다는 명예를 위해서.
체가스 자작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휘하의 기사들을 제 마음대로 부려먹었다.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이 중요한 일을 늦게 알려준 기사들의 목을 치고 싶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야…….”
그러나 체가스 자작도 아주 바보는 아니었다.
식량창고가 불탔다.
그것도 한 곳이 아니라, 네 곳이나 불탔다.
심지어 무슨 재난으로 인한 화재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인위적인 화재, 즉 방화였다.
식량창고 주변을 지키던 병사들은 주검으로 발견됐으니,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다.
‘대체 누가?’
문제는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그 사실이다.
‘설마 불스 백작이?’
체가스 자작의 영지 주변에는 적이 많지 않다. 또한 체가스 자작이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 들어간 이후에는 있던 적도 자세를 낮췄다.
더군다나 체가스 자작령은 콩탄 왕국을 기준으로 변방에 위치해 있다.
‘전쟁이 일어난다더니.’
보통 때라면 그냥 평민 혹은 농노의 반란으로 여겼을 것이다. 당장 병사들을 시켜 수상한 이들을 붙잡아 목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어난 전쟁이 체가스 자작의 머릿속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변방이긴 하지만, 그 근처에는 불스 백작이 있다.
불스 백작이라고 하면 최근 제이머스 후작의 측근으로 유명해진 자 아닌가?
빅토리안 공작 파벌 소속인 체가스 자작이라면 충분히 불스 백작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덜덜덜.
그 상상을 하자 체가스 자작은 몸을 떨었다.
불스 백작은 솔직히 체가스 자작이 어찌할 수 없는 자다. 변방의 백작이지만, 그래도 백작은 백작이다. 체가스 자작령 따위는 가볍게 짓누를 수 있는 힘과 권력이 있는 자다.
‘아니겠지.’
그래서 부정했다.
‘불스 백작이 무슨 이유로 날 공격하겠어?’
전쟁이 났으니, 불스 백작은 눈코 뜰 새도 없을 터. 체가스 자작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우습겠지만, 불스 백작이 체가스 자작 따위를 신경 쓴다는 건 시간 낭비다.
그때였다.
“저기, 영주님.”
“또 할 말이 남았나?”
기사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체가스 자작이 고민에 빠진 모습을, 그가 진정을 되찾은 것으로 착각한 탓이었다.
지금이라면 말할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게…… 병사들 중 일부가 방화범을 봤습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체가스 자작이 분노의 일갈을 내질렀다. 기사가 움찔했다.
“그러니까…… 방화범이 창을 주무기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실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병사 다섯을 한 번에 해치웠다고 합니다.”
병사 다섯이라고 해봐야 솔직히 오합지졸에 가까운 체가스 자작령의 병사들은 제법 숙달된 기사들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
“흥, 그게 무슨…….”
체가스 자작도 안다.
자기 병사들이 수준 이하란 사실을.
어차피 기가스 전력만 멀쩡하면 된다. 기가스 전력만 제대로 갖추면 병사들은 그냥 평민들을 데려다가 무장만 시켜도 충분하다. 어차피 병사들이 전장에서 하는 건 기가스를 옮기고, 기가스 장비를 옮기고, 기가스와 관련된 잡일을 처리하는 것뿐이니까.
“가만.”
그러나 적어도 창을 잘 쓰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 기사들은 마창술에 능하긴 했다. 하지만 마창술과 그냥 평지에서 쓰는 창술에는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마창술 자체도 요즘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기사가 드물다. 기가스가 말을 대신하는 시대니까.
“설마…….”
더불어 이 변방에는 콩탄 왕국에서 창을 가장 잘 쓸 줄 아는 기사가 존재한다.
“문수르, 그자가 온 건가?”
오러 마스터 문스르!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
체가스 자작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당장 기사들을 시켜 정확한 상황을 조사하라 명했다.
그리고 기사들인 곧바로 조사된 결과를 체가스 자작에게 보고했다.
체가스 자작은 그 보고를 듣고 심중을 굳혔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4.
이제르트 자작 앞에는 체가스 자작이 보낸 편지가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 편지를 적당히 읽었다. 적당히 읽은 후에 문수르에게 건네줬다.
“문수르 경 말대로군.”
“이렇게 빨리 편지가 날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체가스 자작이 행동력 하나는 빠른 모양이군요.”
“굉장히 구구절절하더군.”
“식량창고가 네 곳이나 잿더미가 됐는데, 원흉이 눈에 보일 정도로 뻔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편지의 내용은 별 거 아니었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제르트 자작가가 체가스 자작령의 식량창고에 불을 지른 게 확실하니 보상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영지전 이야기는 없었다.
체가스 자작이 바보도 아니고, 베르베 백작도 어찌하지 못한 저력을 가진 이제르트 자작가에 영지전을 신청할 리는 없지 않은가?
대신에 편지 곳곳에는 빅토리안 공작의 이름이 언급됐다.
보상을 안 해주면 빅토리안 공작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빅토리안 공작이 이번 일을 좌시할 것 같더냐, 내가 빅토리안 공작과 얼마나 친한 사이인줄 아느냐…….
“개소리군요.”
쫘악!
문수르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것은 굉장한 무례였지만, 사실 알게 뭔가?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썼다면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귀족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찢는 것과, 그 귀족의 영지에 불을 지르는 것, 뭐가 더 무례한지는 비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차피 체가스 자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미 빅토리안 공작에게 찍힐 만큼 찍힌 곳이 이제르트 자작가다. 체가스 자작이 울고불고 매달려도 빅토리안 공작은 눈길조차 안 줄 것이다.
거기에 문수르가 일부러 남긴 흔적은 애매하다.
문수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수르가 아니라고 잡아떼면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문수르가 일부러 남긴 흔적이다. 그 외의 흔적들은 하나도 없다. 절대 그 흔적으로 범인이 문수르이며, 이제르트 자작가라고 지목할 순 없다.
결과적으로 체가스 자작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음 계획이 필요하다.
“조만간 다시 체가스 자작령에 불을 지를 생각입니다.”
“위험하지 않겠는가? 체가스 자작이 바보도 아니고, 충분히 대비를 할 터인데.”
“식량창고에 불을 지를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아무 곳이면 됩니다. 인위적인 방화의 흔적만 남기면 됩니다.”
문수르의 계획.
“계속 체가스 자작의 신경을 건드리게 되면, 그가 계속해서 항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항의의 수위가 넘어가겠지요. 그때가 체가스 자작령을 무너뜨릴 기회입니다. 동시에 체가스 자작가가 무너지면…… 빅토리안 공작이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문수르가 주먹을 쥐었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