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7.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많은 능력을 배웠다. 전투 능력 외에도 서바이벌 능력을 비롯해서, 마치 어스 월드의 특수부대 마냥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
여기에 문수르의 주문에 따라 말론이 만들어낸 도구들은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단순한 병사가 아닌 전장의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문수르는 그들의 훈련 중에 성벽을 넘는 훈련도 넣어두었다.
사실 케르빈 월드에서 만들어지는 성벽이란 건 어스 월드의 그것과는 다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케르빈 월드에서 단련된 인간의 능력은 어스 월드의 인간보다 우월하다. 곱절은 뛰어나다.
마나의 존재가 있으니까.
마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체력회복도 빨라지고, 체력이나, 근력의 한계치도 더 높다.
이런 환경에서 문수르는 자신의 트레이닝 방법을 통해 병사들의 육체를 한계까지 성장시켰다.
여기에 문수르가 만들어낸 도구들은 어스 월드의 과학력을 접목시킨 최첨단 도구들이었다. 성벽을 넘기에 가장 완벽하고, 가장 효율적인 도구들! 그 외에도 문수르가 원하는 일에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될 도구들이었다.
무엇보다 케르빈 월드는 기가스의 등장 이후 전술 분야가 큰 변화를 맞이했다.
변화는 혼란을 동반한다.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혼란이 계속되는 시기다.
문수르는 그 혼란을 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성벽을 넘어 간 후에 주어진 도구들을 이용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어려운 게 아닙니다.”
문수르의 말에 차출된 오십 명의 병사들은 눈빛을 빛냈다.
“성벽을 넘는 게 힘듭니까?”
병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밤중에 사람들 몰래 이동하는 게 힘듭니까?”
이번에도 병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지도를 보고 지정한 위치까지 가는 게 어렵습니까?”
병사들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불을 지르는 게 어렵습니까?”
여전히 병사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다.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성벽을 무너뜨릴 필요도 없고, 누군가와 큰 전투를 치를 필요도 없습니다. 훈련보다 더 쉬울 겁니다.”
준비는 끝났다.
문수르는 직접 오십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체가스 자작령을 향해 움직였다.
8.
체가스 자작가는 그다지 대단한 자작가는 아니다. 보통의 자작가라고 보면 된다.
더불어 체가스 자작 역시 뛰어난 능력을 가진 귀족은 아니었다. 더불어 그는 콩탄 왕국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사치를 즐기고, 어떻게든 뇌물을 이용해 중앙정계와의 연줄을 만들어 입신양명의 길을 꿈꾸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체가스 자작이 빅토리안 공작가에 연줄을 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불어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 들어간 이후로 체가스 자작은 빅토리안 공작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들었다.
또한 매년 엄청난 양의 뇌물을 바치기도 했다.
그리고 제르둔 후작이 반역죄로 처형 당한 이후 대세가 빅토리안 공작 파벌로 급격히 기울어졌을 때, 체가스 자작은 어떻게든 빅토리안 공작의 눈에 들기 위해 가산을 털어서 뇌물을 바치기 시작했다.
그 덕분일까?
지금 체가스 자작령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사병의 숫자는 더 줄어들어, 성을 지키는 병사의 숫자가 백을 넘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병사들에 대한 처우도 그다지 좋지 못했기에, 병사들은 호구지책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비리를 저지르는 것에 익숙해진 병사들이 가장 귀찮은 일 중 하나인 보초 임무에 충실할 리 만무하다.
물론 기가스 전력은 구축된 상황이었다. 체가스 자작은 1배 급 기가스를 무려 4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망해가는군.’
이런 이유로 체가스 자작은 정말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성의 유지보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해자는 그 깊이가 줄어든 지 오래였고, 성벽에도 온갖 파손의 흔적이 가득했다. 성벽에 난 흔적들은 성벽을 타고 오를 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이뿐인가?
사병의 숫자가 없는 탓에 허점이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아예 병사들이 보초조차 서지 않고 있었다.
맹점 수준이 아니었다.
이 정도 되면 어서오세요, 수준이다.
문수르는 그 환영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문수르가 명령을 내렸다.
“3개 조로 나뉘에 움직입니다.”
병사들은 이미 3개 조로 나누어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병사들이 움직였다.
병사들이 바닥에 최대한 몸을 납작하게 엎드린 채 성벽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성벽 해자 근처에 도달하기 전까지 체가스 자작령의 그 누구도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윽고 해자에 돌입했을 때, 병사들은 서로 가져온 도구들을 빠르게 조립하기 시작했다.
금방 훌륭한 사다리가 완성됐다. 그 사다리가 단숨에 해자를 가로 지르는 다리가 되었다.
다섯 명의 병사들이 먼저 사다리를 건넜다.
그 후에 해자를 건너지 않았던 병사들 중 세 명이 드높은 성벽을 향해 무언가를 던지기 시작했다.
휙휙!
줄에 매달린 그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성벽 위로 넘어갔다.
캉!
성벽 위를 넘어간 것은 갈고리가 되어 성벽에 정확히 걸렸다. 병사들이 줄을 잡아 당겼다. 갈고리는 제대로 걸린 듯, 줄이 팽팽했다.
병사들이 눈빛을 주고 받았다.
세 명의 병사들이 해자를 건넜다. 그와 동시에 병사 두 명이 두 개의 줄을 잡고 성벽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차례차례, 순서를 지키지만 빠른 속도로 단숨에 성벽을 타고 오르는 병사들.
다섯 명의 병사들이 성벽 위에 올랐다.
성벽 아래에는 세 명이 병사들이 성벽에 최대한 몸을 붙인 채 숨을 죽였다.
아직 해자를 건너지 않은 두 병사들은 적당히 거리를 벌린 후에 준비한 장소에 모습을 감췄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건 다섯 명이다. 나머지 다섯 명은 성 밖에서 상황을 살피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들은 조금도 들키지 않았다. 들킬 이유가 없었다. 감시를 하는 병사들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성벽 위에 올라온 병사는 속으로 웃었다.
‘허탈할 정도군.’
많은 연습을, 시뮬레이션을 했다. 훈련을 하면서 욕이 절로 나왔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기에 자신감도 붙었다. 이 정도 훈련을 했으니, 실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문제 없으리란 생각이 절로 생겼다.
그런데 실전이란 게 이렇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허술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성벽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시야를 밝히기 위해 횃불이라도 켜놓아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이곳 영주가 바보군.’
성벽 위의 불빛은 성주가 제 성에서도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다. 빛이니까. 어둠 속에서는 더더욱 확인이 쉽다.
만약 영주가 성벽 위를 매일 잘 살폈다면, 잠들기 전에 한 번이라도 보고 살폈다면 이 문제점을 파악하고 처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영주조차 성벽의 감시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다.
그 사실을 파악하는 순간 병사의 마음 속에서 피어오른 건 이제르트 자작을 향한 존경심이었다.
솔직히 이제까지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살아가는 걸 그리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몇 년 전까지는 재수가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어느 순간 테블스 산의 몬스터의 먹잇감이 될 지 모르는 삶.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땅에서 살아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암담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인 이제르트 자작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래, 우리 영주님을 따르는 게 진리다.’
몬스터가 있으면 어떤가?
오히려 이제 몬스터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병기, 기가스가 이제르트 자작령에서는 심심할 때 튀어나온다.
그리고 문수르 경이 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이겐 무신(武神)이나 다름 없는 문수르가 이제르트 자작령에 있다.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령은 낙원이다.
봄 겨울 할 것 없이 매일 풍족하게 먹을 수 있고, 매달 두둑한 월급이 나온다.
그리고 땀을 흘리는 만큼 대가를 지불 받는다. 그리고 땀을 흘리는 만큼 기회도 제공받는다.
병사들이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의 깜빡임, 그 깜빡임이 끝나고 났을 때 병사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을 향한 존경심, 체가스 자작령의 상황에 대한 허탈함, 그런 종류의 감정에 의해 조금은 우수에 젖었던 눈동자에 차가운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훈련된 병사다.
어쩌면 케르빈 월드에 존재하는 사병들 중에서는 가장 심한 훈련과 전투를 치른 병사들일지도 모른다.
살의를 품어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살의를 품고, 품은 살의를 날카롭게 가다듬을 때다.
성벽 위로 올라온 다섯 명의 병사들 중 한 명을 남긴 네 명이 성벽을 다시 조용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한 곳, 바로 체가스 자작가의 식량창고였다.
9.
체가스 자작이 제 아무리 영지 사정에 무심하다고 해도 식량 창고는 이야기가 다르다.
가뜩이나 추수가 끝난 다음이다. 식량 창고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곡식이 쌓여 있었고, 그 곡식들이 체가스 자작을 다음 추수 때까지 버티게 할 저력이었다.
물론 식량 창고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만 마련해두면 너무 위험하다. 문제가 생겼을 경우 1년 동안의 식량을 전부 잃을 수도 있으니까체가스 자작령 곳곳에 식량 창고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식량창고는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었다. 단순히 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적보다는 도둑들이 문제였다.
체가스 자작은 영지민들을 쥐어 짜내는 것이 최고 장기이자, 가진 능력의 전부인 자였다.
그런 체가스 자작 밑에서 살아가는 영지민들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할 수준의 식량만 가지고 있다. 겨울이 되면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없는 자들이 있다. 당장 굶어 죽을 지도 모르는 자. 배고픔의 고통에 빠진 자들에겐 겁 따윈 없다. 죽을 걸 알면서도 식량 창고의 식량을 도둑질하려고 한다.
굶어 죽으나, 병사의 창에 찔려 죽으나, 그들 입장에서는 죽는 건 매한가지니까.
그런 그들을 막기 위해 배치된 병사들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그들을 확인하고는 잠시 행동을 멈췄다.
주변을 살폈다.
그들의 눈이 식량 창고 주변을 살폈다. 창고 주변에는 아무런 건물도 없었다. 몸을 숨길만한 엄폐물이 없다는 의미다. 그 주위에는 횃불이 활화 타오르고 있었다.
시각적으로도 사각이 없다.
이렇게 되면 몰래 식량 창고에 접근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은 어떻게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를까?
답은 간단하다.
츠릉!
병사들이 준비해온 검을 꺼냈다. 그들이 꺼낸 검은 검신 자체가 시커먼 검신이었다.
흑철(黑鐵)을 이용해 만든 검이다. 보통 검보다 훨씬 단단할 뿐더러, 검신 자체가 시커멓기에 어둠 속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드워프가 만든 검이다. 그 절삭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죽 갑옷 따위는 단숨에 걸레로 만들 정도다.
검을 꺼낸 이유.
‘공격한다.’
다름 아니라 병사들을 제압하고 불을 지를 속셈이다.
지금 여기에 온 병사들의 숫자는 네 명이다. 열 명이 1개 조를 구성하지만, 그 중 다섯은 밖에서 대기 중이고, 나머지 한 명은 성벽에서 대기 중이다. 그래서 네 명만 남은 것이다.
반면 식량 창고 주변에 있는 체가스 자작령 소속의 병사들 숫자는 적게 잡아도 열 명 이상.
2배 이상의 전력 차이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침묵을 고수한 채 기다리다 이내 타이밍이 왔을 때.
병사들 사이에 허점이 생겼을 때.
파밧!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이 움직였다.
쉬익!
순식간이었다. 네 명의 병사들이 동시에 네 명의 병사들을 한 번에 해치웠다.
푹!
누군가는 상대방의 심장을 찔렀고, 누군가는 목젖을 찔렀다.
상대를 죽이는 방법은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행동은 똑같았다.
“읍!”
“으읍!”
공격한 상대의 입을 틀어막는 것.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 후에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상대방의 목숨을 확실하게 끊은 후에 다음 행동에 나섰다.
다른 병사들을 처치할 때다.
순식간이었다.
남은 체가스 자작가의 병사들 역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의 검에 질려 죽었다.
이미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기사 급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여러 훈련으로 암살에도 어느 정도 재주가 있다.
그런 그들에게 일반 병사들은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이후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준비해온 장치를 식량창고 주변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장치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식량창고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체가스 자작령의 식량창고 3개가 그렇게 잿더미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