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4.
템스 자작이 헤오 자작을 공격했다.
그 둘은 예전부터 앙숙으로 소문난 귀족이었다. 서로 영지를 바로 맞대고 있는 탓에 아주 오래 전부터 충돌이 잦았다.
더불어 템스 자작은 빅토리안 공작을 따랐고, 헤오 자작은 제이머스 후작을 따랐다.
그 둘 관계는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활화산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템스 자작의 갑작스런 기습은 그 어떤 명분도 두르지 못한 공격이었다.
명분도 없었고, 왕의 허락도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템스 자작이 헤오 자작을 공격한 사실에 대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헤오 자작이 템스 자작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냈다는 사실이었다.
“템스 자작이 갑작스레 기습적으로 헤오 자작을 공격한 것도 그렇지만, 헤오 자작이 그 공격을 막아내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두 가지나 일어났군.”
기습이란 건 몰래 하니까 기습인 것이다. 그리고 몰래 하기에 기습은 위력적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공성하는 쪽과 수성하는 쪽, 같은 전력이면 수성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기습이 유효한 건, 수성하는 쪽이 가지게 되는 메리트를 최대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대비하기 전에 쳐서 전력을 깎아냄으로써 전장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게 바로 기습의 묘리이며, 진리다.
반대로 상대가 알고 있으면 기습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헤오 자작은 마치 템스 자작의 공격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에 맞는 대비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템스 자작의 기습은 무의미해졌다.
이러자 여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뭐가 있든, 헤오 자작이 켕기는 게 있으니까 템스 자작의 기습을 대비한 게 아닐까?”
“템스 자작이 무작정 들어간 게 아닐 거야.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템스 자작과 헤오 자작의 영지전을 놓고 세간의 평가가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다.
분명 잘못한 건 템스 자작이다. 템스 자작은 명분도 없고, 왕의 허락도 없이 무작정 헤오 자작을 공격했다. 그건 엄연히 왕의 규칙을 벗어나는 행위였다. 왕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오히려 템스 자작을 옹호하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헤오 자작 입장에서는 이가 갈릴 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에 가장 분노한 건 제이머스 후작이었다.
“빌어먹을.”
자신의 암살을 사주한 배후가 빅토리안 공작이란 걸 알았을 때, 빅토리안 공작을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 예상했다.
때문에 제이머스 후작은 자신을 따르는 파벌 내 귀족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하라고.
빅토리안 공작의 세력이 갑작스레 기습을, 선공을 취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헤오 자작 역시 그 말을 듣고 충실히 대비를 했다.
아니라 다를까, 템스 자작이 갑작스레 헤오 자작령을 침범했다. 다행히도 헤오 자작은 미리 대비한 덕분에 큰 피해 없이 템스 자작의 기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제이머스 후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왔다.’
빅토리안 공작이, 그 늙은 여우가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명분이 내게 왔다.’
선공을 취한 건 어떤 수를 쓰더라도 용서 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그걸 막아낸 이상 주도권은 제이머스 후작에게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치는 그런 게 아니었다.
상황은 제이머스 후작의 예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히려 이런저런 소문이 겹치면서, 헤오 자작이 템스 자작에게 굉장한 잘못을 했고,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템스 자작이 가문의 명운을 걸고 헤오 자작가를 공격했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헤오 자작 입장에선 미칠 입장이었다.
당한 건 자신인데, 오히려 나쁜 놈 취급을 받기 시작했으니까.
사실 이 역시 빅토리안 공작의 의도였다.
빅토리안 공작이 바보도 아니고, 제이머스 후작에게 갑작스레 암살자를 보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콩탄 왕국에서 제이머스 후작을 처치하기 위해 암살자를 보낸다는 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일이라는 건 빅토리안 공작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여기에 빅토리안 공작은 일부러 흔적을 남겼다.
그 결과 제이머스 후작이 제멋대로 대비를 하게 만들었고, 그런 제이머스 후작 측을 먼저 공격한 것이다.
이미 대세가 빅토리안 공작에게 넘어온 상황, 여론 역시 빅토리안 공작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명분은 필요 없다. 적당한 구실, 적당한 장치만 있으면 명분 따윈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빅토리안 공작이었다.
만약 제이머스 후작이 정말 빅토리안 공작의 심중을 파악했다면, 헤오 자작령을 넘겨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제이머스 후작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절대적인 명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이머스 후작이 정치가 아닌 전쟁에만 능한 것, 빅토리안 공작은 그 점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결국 명분 따윈 고려되지 않은 채 갑작스레 제이머스 후작 파벌과 빅토리안 공작 파벌 간의 전면전이 진행됐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앞에서 필로스 왕은…… 침묵을 고수했다.
왕의 침묵은 허락이었다.
전쟁을 말리지 않겠다는 의지!
그렇게 전쟁이 시작됐다.
5.
불스 백작은 전쟁을 준비했다.
“드디어 왔군.”
불스 백작은 이 날을 기다렸다.
그는 콩탄 왕국 내에서 일어날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위해 이제가지 힘을 감춘 채 살아왔다.
모든 저력을 군사력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 기회가 온 것이다.
“수성이다.”
그런 불스 백작이 고른 선택지는 다름 아니라 수성이었다.
전쟁을 준비했는데 수성을 선택한다? 언뜻 이해가지 않는 일이겠지만, 사실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 어떤 군사(軍師)도 공성보단 수성이 낫다고 말한다. 같은 전력이면 수성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런 상황에서 불스 백작이 굳이 공격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물며 제이머스 후작 파벌의 세력은 빅토리안 공작 파벌의 세력에 비하면 확실히 약하다. 어설프게 공격을 갔다간 오히려 뒤통수를 맞기 딱 좋은 상황이다.
불스 백작이 원하는 건 자신을 향해 덤벼들 자들이었다.
전면전이 일어난 이상 그 누구든 불스 백작령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불스 백작은 그걸 막기만 하면 된다.
‘버티는 거다.’
지리적으로 봤을 때 불스 백작령의 위치는 수성을 하기에 딱 적당한 위치다.
변방에 위치했고, 근처에 강한 세력을 가진 귀족이 없다. 여기에 북쪽으로는 테블스 산이 있는 탓에, 북쪽에서 공격을 시도할 귀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면이 아니라, 삼면만 방어하면 되고, 변방이라서 병력을 이끌고 가기도 힘든 땅.
방어하기에 이마저도 좋은 땅은 없다.
여기에 불스 백작은 알고 있다.
‘전면전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쟁은 끝난다.’
이번 전쟁은 두 거대 귀족의 파벌이 서로의 존립을 걸고 벌이는 대전(大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필로스 왕이 개입할 것이다. 내전이 정도를 벗어나면, 국력이 약해지니까. 필로스 왕이 침묵을 고수하는 건 거대해진 두 귀족이 서로 상잔하여 세가 약해질 기다리는 것뿐이다. 양쪽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이런 전황을 고려했을 때 불스 백작은 수성을 취하고, 필로스 왕이 나서기 전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건 그렇고…….”
결단을 내린 불스 백작.
그런 그가 궁금증을 가진 건 다름 아니라 이제르트 자작가였다.
“이제르트 자작, 그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6.
전쟁이 시작됐다.
예상이 못한 상황에 모든 이들이 당황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라니.”
“이러가 왕국이 망하는 거 아니야?”
두 거대 귀족 간의 존립을 건 전쟁이다. 누가 이기든, 패자는 전멸할 것이고 승자는 적지 않은 피를 흘릴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죽는 건 병사들과 평민들이다. 그러니 전쟁 소식에 겁을 먹을 수밖에.
그 와중에 이제르트 자작령은 조용히 움직였다.
이제르트 자작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미리 문수르와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준비가 끝났을 때 문수르는 기사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계획을 전달했다.
“체가스 자작령을 공격할 겁니다.”
“예?”
기사들은 갑작스런 이야기에 놀랐다. 무언가 전쟁에 대비한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그 준비가 수성이 아닌 선공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문수르는 놀라는 기사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음…….”
“확실히…….”
문수르의 설명을 들은 기사들은 문수르의 계획에 충분한 동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기사들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이라면…….’
‘체가스 자작령 정도는 무너뜨릴 수 있지.’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은 어마어마하다. 기가스 전력만 15대가 넘어간다. 웬만한 백작 급 귀족들도 보유하기 힘든 전력이다. 여기에 병사들은 강군 중의 강군, 정예 중의 정예다. 모든 걸 할 수 있는 만능이기도 하다.
이뿐인가?
엘프 족과 드워프 족, 두 종족과도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전장에서 같이 싸우고 있다.
솔직히 전력상으로 봤을 때 체가스 자작은 이제르트 자작의 적수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문수르는 파격선언을 했다.
“기가스는 이번 전투에서 제외합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무 놀란 포비어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문수르의 의견에 동의를 표한 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막강한 기가스 전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가스를 전투에서 제외한다고?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이 보유한 기가스 전력은 외부에 쉽게 공개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나름 이유는 있었다.
문수르는 일단 지금 기가스 전력을 최대한 숨기고 싶어한다. 전력을 숨겨서 나쁠 건 없다.
운 좋게도 베르베 백작이 실종되고,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이 전멸하면서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가스 전력은 약하진 않지만, 정확히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달린 상황이다.
더불어 드래곤 파이터의 정체도 숨길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기가스 전력을 움직일 필요는 없다.
특히 문수르의 기습을 하되, 이번 작전에서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흔적을 지울 생각이었다.
“목적은 성의 함락이 아닙니다. 적당한 피해를 주고, 빠지는 것. 단지 그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병사들로 구성된 전력이 은밀하게 체가스 자작의 성을 습격한 후에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거나, 적당한 피해를 입힌 후에 빠져나오는 겁니다. 아마 이번 전쟁에 참가할 병력의 숫자는 오십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그게…… 전쟁입니까?”
“뭐,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최소 비용으로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전쟁인데.”
기가스는 움직이면 어떻게든 흔적이 크게 남는다.
하지만 병사들만 움직인다면?
더군다나 기가스들의 전쟁이 당연시 되는 시대에서 병사들만으로 공격을 한다면?
‘기가스는 사실상 수성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지.’
사실 기가스의 전투력은 무시무시하지만, 그 전투력이란 게 수성이나, 공성이나 큰 차이점은 없다. 수성을 할 때에는 유지 보수 등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수성이 가지는 가장 큰 메리트, 성벽을 이용해 싸운다는 메리트는 기가스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또한 지금 콩탄 왕국의 귀족들은 기가스 전력을 더 보유하기 위해 일반 사병의 숫자를 더 줄인 상황이다.
이 맹점을 찌르는 거다.
‘내겐 GPS시스템이 있다.’
여기에 문수르에게는 GPS시스템이란 놀라운 도우미가 있다. GPS시스템의 도움을 받으면 조금의 피해도 없이 체가스 자작의 성에 잠입할 수 있다.
그 후에 적당한 피해만 주고, 정체를 숨긴 채 빠진다면?
체가스 자작가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제르트 자작가의 처지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여전히 왕따다. 제이머스 후작 파벌은 세가 약해서 이제르트 자작가를 받아준 것뿐이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건 아니다. 불스 백작은 이익 때문에 이제르트 자작가와 손을 잡았을 뿐이다. 빅토리안 공작 파벌은? 아주 이를 갈고 있다.
‘불스 백작은 수성을 택할 터.’
더군다나 불스 백작령의 동향을 보면 불스 백작은 성문을 열고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불스 백작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와줄 일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설프게 이제르트 자작가가 설쳤다가는 집중공세를 당할 터.
최대한 그런 상황은 피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일단 병사들을 차출해주십시오. 더 자세한 계획은 병사들이 차출된 후에 전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