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6.
문수르는 상황을 정리했다.
직접 만든 지도 위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색을 칠했다. 빅토리아 공작 파벌은 파란색으로, 제이머스 후작 파벌은 붉은색으로, 중립을 고수하고 있는 자들은 색을 칠하지 않았다.
알록달록, 지도 위가 색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은 파란 색이었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경우에는 주변에 파란색이 적었다. 일단 근처에 있던 보우런 남작령은 이제르트 부속령이 됐다. 북쪽으로는 테블스 산이 있으니 제외, 여기에 근처에 있는 거대 영주가 불스 백작이니, 파란색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공이다.’
이제까지 방어만 했다.
특히 베르베 백작과의 일전으로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전쟁이 고작 하루 만에 끝났음에도 사전에 작업을 하면서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다.
솔직히 올해 풍년이 아니었다면 예상보다 더 적은 식량으로 인해 곤란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제르트 자작령에서만 싸우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전면전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펼쳐질 전쟁은 그저 티격태격, 소규모 전투가 아니다. 전면전이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 전쟁!
명분 따윈 없다.
죽거나 혹은 살거나.
그렇다면 이제 명분 따위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오히려 과감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선공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무작정 선공을 취하면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가가 모든 이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병력을 이동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만약 선공을 취하게 된다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첫 번째 표적이 될 영지는…….
“체가스 자작령.”
체가스 자작령이 될 것이다.
7.
제이머스 후작은 자신 앞에 놓인 보고서를 보며 두 눈을 감았다.
‘정말…….’
제이머스 후작.
혼자 힘으로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다. 이제까지 검만 휘두르면서 살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제이머스 후작은 자신에게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르둔 후작과 손을 잡았다.
제르둔 후작은 정치의 고수였다. 제이머스 후작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자였다.
하지만 반대로 제르둔 후작은 그 정치에 넘어갔다. 정치 싸움에서 빅토리안 공작에게 패배했다. 그 대가는 뼈아팠다. 제르둔 후작은 단순히 정치생명이 끝난 게 아니라 가문이 몰락했다. 반역자의 가문이 되어 후작 작위를 박탈당했고 모든 가족이 처형당했다.
제르둔 후작이 그렇게 무너졌을 때 제이머스 후작은 솔직히 생각했다.
‘빅토리안 공작과 손을 잡으려고 했다.’
다름 아니라 빅토리안 공작과의 타협!
솔직히 말해서 제이머스 후작이 혼자 힘으로 빅토리안 공작가를 무너뜨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반대로 빅토리안 공작가 입장에서도 제이머스 후작 파벌은 눈엣가시였다. 쉽게 치울 수 없는 눈엣가시.
제이머스 후작은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 눈엣가시로 남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적당한 시기가 오면 빅토리안 공작이 손을 내미리라 생각했다. 그런 조짐은 몇 번 있었다.
심지어 빅토리안 공작과 물밑으로 몇 차례 대화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빅토리안 공작이 어금니를 드러냈다.
갑작스럽게!
나름 이야기가 잘 진행되던 상황에서 갑작스레 암살자를 데려다가 자신을 공격했다.
‘왜?’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베르베 백작이 무너진 이후 타엽의 여지는 분명 있었다.’
정말 이야기가 잘 풀렸다. 특히 베르베 백작이 무너진 후 빅토리안 공작도 섣부른 움직임을 보일 수가 없었다. 베르베 백작이 모든 책임을 졌다고 해도 그는 빅토리안 공작의 측근이었다. 베르베 백작가가 이제르트 자작가를 친 게 독단적인 행동이었다고 해도 과언 누가 그걸 믿을 것인가?
더군다나 이후 처벌은 없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 대한 배상만 있었지, 필로스 왕이나 빅토리안 공작은 베르베 백작가에 그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미 사전에 어떤 합의가 있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여하튼 베르베 백작이 무너진 이후 빅토리안 공작은 제이머스 후작과 타협을 하려고 했다.
조금만 더, 서로가 조금씩만 더 양보하면 타협이 성사될 분위기였다.
‘날 속이려고 한 건가?’
이쯤 되자 제이머스 후작은 빅토리안 공작이 이제까지 보여줬던 얼굴이 거짓이 아닌가, 그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암살 위협의 배경이 너무 뚜렷했다. 뒤를 캐다보니 곧바로 암살을 사주한 자가 빅토리안 공작이란 사실이 잡혔다.
그걸 세상에 밝히진 않았다.
분명 세상에 밝히면 빅토리안 공작이 지탄을 받을 건 분명했지만, 그뿐이다. 지탄은 지탄일 뿐이다. 물리적인 타격 따윈 없다. 있다고 해도 그것에 흔들릴 정도였으면 애초에 빅토리안 공작이 콩탄 왕국의 대세를 휘어잡지도 못했을 것이다.
‘도발인가?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결국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하던 제이머스 후작이 고민 끝에 내린 답은 바로 전면전이란 단어였다.
암살자를 대놓고 쓸 정도라면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는 이야기다.
“전면전.”
빅토리안 공작이 전면전을 벌이고자 한다면 제이머스 후작 파벌이 고를 선택지는 하나다.
맞서 싸우는 것!
그 외의 선택지는 없다.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만약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이제까지 정치적 역량이 부족해 자중하고 있던 제이머스 후작의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콩탄 왕국의 사람들 중에 전쟁에 대해서 가장 뛰어는 능력을 가진 자는 그 누구도 아닌 제이머스 후작이니까.
“선공이 필요해.”
그렇기에 제이머스 후작은 전면전이 시작된다면, 선공을 취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이란 답을 금방 내놓을 수 있었다.
갑작스런 전쟁이다.
서로가 그 어떤 대비도 하지 못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선공은 곧 승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선공을 취하기에 가장 좋은 명분도 있다.
암살자!
먼저 공격한 건 빅토리안 공작 쪽이다.
“일단……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반대로 이 모든 생각을 읽고 빅토리안 공작이 선공을 취할 가능성도 결코 적지 않다.
결국 병력은 움직여야 한다.
또한 군량으로 소모한 식량도 마련해야 한다. 군수물자들 역시 준비를 해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이다.
“후우!”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다.
그 사실에 한숨부터 나왔다.
“그래, 이제까지 너무 조용했지.”
8.
문수르는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 이제르트 자작을 찾아갔다. 이제르트 자작에게 모든 걸 설명했다.
“전면전이라…….”
이야기를 들은 이제르트 자작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좋을 리가 없다.
“피할 방법은 없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피하지 않는 건가?”
“피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피하면 피해도 있습니다. 결코 무시 못 할 피해입니다.”
“전쟁을 해도 피해는 생기지.”
“하지만 전쟁은 소득도 생깁니다.”
“문수르 경의 말이 정론이네. 정론이지.”
이제르트 자작은 고민했다. 고민은 조금 길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결정에 수천, 수만의 목숨이 미래를 보장 받지 못한다. 수만의 목숨이 결코 가벼울 리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고민이 끝났다.
결단을 내린 이제르트 자작은 자신의 결단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필요한 게 있는가?”
“전장에 나서주시면 됩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전장에 나서준다, 가장 위험한 땅에 나가서 싸우라는 말이다. 이제르트 자작의 목숨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문수르의 입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보통 경우라면 오히려 숨어 있으라고,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몸조심 하라고…… 문수르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문수르는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보고 전장에 서라고 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이제르트 자작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작가의 운명을 건 전쟁이다. 더군다나 문수르의 계획을 들어보면 수성이 아니라, 공성이다.
수성은 지키는 쪽이 이기는 거다. 이제르트 자작을 지키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공성은 다르다.
성을 무너뜨린 쪽이 이기는 것이다. 당연히 영주가 나서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해서 싸울 수 있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것을 피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문수르도 그 사실을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대비책은 있었다.
‘호위를 강화해야겠지.’
이제르트 자작 옆에는 포비어를 붙일 것이다. 더불어 만약 탈라트 부족과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가누스 역시 이제르트 자작의 호위로 붙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아이언히트가 13대가 있다. 포비어의 기가스와 문수르의 드래곤 파이터를 합치면 무려 15대의 기가스를 보유한 셈이다. 아이언히트가 0.6배 급의 기가스라고 해도 10대 이상이면 1배 급 기가스 6대 이상의 전력을 보여준다.
여기에 드래곤 파이터는 절대적이다.
솔직히 지금 콩탄 왕국 내의 그 어떤 기가스도 1대1로 드래곤 파이터를 상대할 순 없다.
‘이제 힘은 충분하다.’
콩탄 왕국 전부와 싸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와 싸워서 질 정도는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 정도 힘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그럼 계속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물론 아직 할 일은 산더미처럼 남았다. 특히 전쟁을 하려던 호우투 부족과 탈라트 부족, 두 부족과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 아이언히트의 2/3는 그 두 부족의 소유나 다름없으니까.
“문수르 경.”
그런 문수르를 이제르트 자작이 불렀다.
“말씀 하시지요.”
“이제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날 터이니,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하겠네. 만약 자네 목숨과 내 목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자네는 무엇을 선택하겠나?”
우스운 질문이다.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자작님의 목숨을 선택하겠습니다.”
무조건 이제르트 자작이 살아야 한다.
“아닐세.”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의 생각은 달랐다.
“내 아들은 아직 멀쩡히 살아있네. 아직 어릴 뿐, 가문을 잇는데 부족함이 없지. 내 목숨은 그리 대단한 게 못 되네.”
이제르트 자작은 안다.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에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때문에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부터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자네 목숨을 구해야 하네.”
“아닙니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문수르의 마음이 고마웠다.
동시에 그 마음이 결국 언젠가 큰 문제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명심하게. 만약 우리 둘 중 하나의 목숨만 구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 누가 내 목숨을 구하기 전에, 내 스스로 내 목숨을 끊을 것이네.”
“자작님!”
“적어도 이 정도 선은 그어야 문수르 경이 큰 실수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네.”
이제르트 자작의 그 말에 문수르는 이를 물었다.
안다.
이제르트 자작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의 반문은 의미가 없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한다면 하는 자였으니까.
9.
이제르트 자작으로부터 전쟁의 허락을 받은 문수르는 곧바로 말론을 찾아갔다.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허허…… 드디어 피할 수 없는 일이 왔군.”
말론은 놀라지 않았다. 말론은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인간이 전쟁을 통해 삶을 유지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좋든 싫든 인간은 전쟁을 한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말이다.
이제르트 자작가 역시 결국 인간이다. 인간에게 씌인 그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드워프 부족 전부를 전장에 내세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기가스 파일럿과 유사시 기가스를 수리할 전력을 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대가는?”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이제르트 자작령의 영토가 훨씬 커질 겁니다. 그 후에 이제르트 자작령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눌 겁니다. 왕국이 여러 개의 영지로 나뉘듯, 영지가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그 구역마다 우두머리를 세울 겁니다.”
“쉽게 말해서 왕국의 축소판이로군.”
“그 자리 중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왕이 영주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는 것처럼, 영주가 정한 법을 어기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쁠 건 없군.”
말론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실 문수르 입장에서 드워프 족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선공을 취하기 위해 전장에 나가게 되면 기가스의 유지보수가 더 힘들어진다. 보통 실력으로는 제대로 된 보수가 불가능하다. 보수를 못하면 기가스 전력은 감소된다.
그걸 막기 위해선 드워프 장인이 필요했다.
더불어 호투우 부족의 엘프 마법사들도 필요했다. 호우투 부족에도 같은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헌데 문수르 경, 자네에게 한 가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네.”
“예?”
그 순간 기습적으로 날아온 말론의 말.
“가끔 느끼는 거지만, 자네는 우리 드워프나, 엘프들에게 너무 사무적으로 대할 때가 있네.”
“그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는 건 고맙네. 하지만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네. 오히려 정말 좋은 세상은 서로 필요할 때 대가 없이 돕는 세상 아닌가?”
말론.
그는 이제 인정했다.
이제르트 자작이란 자를…….
그리고 문수르란 자를!
“난 자네를 비롯해 이제르트 자작가와 친구가 되고 싶네. 때문에 이번 일은 대가 없이 도와주겠네.”
말론, 그가 손을 내밀었다.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움직이는구나.’
간신히 만들었던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 작품 후기 ============================
벌써 주말이네요.
일주일 정말 빨리 지나가네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