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3.
추수가 끝났다.
혹독한 겨울이 시작됐다. 모든 영지들은 수확한 작물들을 파먹으며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해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령은 달랐다.
오히려 겨울이 오자, 이제르트 자작령의 영지민들은 겨울의 추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올해에는 고구마 작황이 좋았으면 좋겠군.”
“고구마, 겨울 별미지.”
겨울이 되자, 이제르트 자작이 고구마 재배를 위한 고구마순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문수르는 사시사철 고구마만 심을 생각은 없었다. 고구마는 겨울에만 재배할 생각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지금 이제르트 자작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작물들 중에 겨울이란 혹한의 날씨에도 재배가 가능한 작물은 고구마가 유일했으니까.
땅과 노동력은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기적절하게 배분해서 이용해먹는 건 단연한 일이다.
덕분에 겨울이 왔음에도 이제르트 자작령은 분주했다. 영지민들은 쉴 틈 없이 곧바로 고구마 재배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겨울에도 일해야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는 영지민은 없었다.
일 없이 배를 곯는 것과 일은 많지만 배부른 것, 겨울을 보내는 영지민들에겐 후자가 훨씬 좋았다.
비단 바쁜 건 영지민들만은 아니었다.
병사들 역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테블스 산 개간작업은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꾸준하게 진행됐다. 어느새 새롭게 세우기 시작한 성벽도 그 형태를 얼추 갖추기 시작했다.
아이언히트가 공사에 투입되고, 거중기를 비롯해 문수르의 주문을 받은 드워프족이 만들어낸 도구들은 공사에서의 능률을 극대화시켜줬다.
영지 사정은 이제르트 자작령이 테블스 산 앞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최고로 좋았다.
베르베 백작으로부터 받은 배상금도 배상금이지만, 작황이 좋아 거둔 세수가 적지 않았다. 문수르의 꾸준한 농법 보급을 통해서 영지민 1인당 수확이 보통 영지의 곱절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제르트 부속령에서 거둔 세금 역시 적지 않았다.
지르미오는 훌륭하게 이제르트 부속령을 관리하고 있었다. 특별한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언히트는 13대로 늘어났다. 여기에 포비어의 기가스와 다시 수리 겸 개조 중인 드래곤 파이터까지, 백작가도 가지기 힘든 전력을 이제르트 자작가는 보유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드워프 족의 이주가 결정됐다. 전면적인 이주는 아니었다. 호우투 부족원 중 60퍼센트 정도가 이제르트 자작령에 머물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제르트 자작은 호우투 부족의 정착을 돕기 위해 세금을 1할만 거두기로 했다. 또한 그들에게 농법을 보급하는 등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기로 했다. 대신에 이제르트 자작령에 거주하게 된 호우투 부족원 중 일부는 이제르트 팩토리에서 근무하도록 합의를 했다.
드워프 장인이 늘어나자 모든 것이 빠르게 정비됐다.
문수르가 그저 계획만 세워뒀던 대부분의 일들 역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특히 상하수도 시설 확충은 문수르가 가장 기다렸던 일이었다. 문수르가 열심히 노력하긴 했지만, 이제르트 자작령의 위생상황은 최악이었고, 최악인 가장 큰 이유는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물이 더럽기 때문이었다.
상하수도 시설이 확충되면 동시에 목욕탕도 만들 생각이었다. 목욕탕은 위생청결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상하수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목욕탕은 오히려 질병의 보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이제르트 자작가가 이렇게 바쁠 줄은 몰랐습니다. 영주님, 오늘 보고서입니다.”
해톤, 그가 이제르트 자작가에 왔다는 사실이었다.
4.
원정대 지원자들의 훈련은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마나를 느끼는 첫 번째 단계를 지나, 마나를 오러로 바꾸는 두 번째 단계도 끝냈다.
세 번째 단계는 그렇게 만든 오러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세 번째 단계부터 두 기사는 훈련을 받는 입장에서 훈련을 가르치는 입장이 됐다.
기사들은 오러를 다루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오러라는 게 꼭 단전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마나 호흡법이란 게 오러를 보다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마나 호흡법이 생기면 오러를 사용하게 된 건 아니다.
단지 단전이 계발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오러를 다뤄도 미약한 수준의 오러만 다뤘기에 자각하기 힘들었을 뿐이다.
기사들이 보통 병사들보다 체력적으로나, 근력적으로나 훨씬 강한 건 미약하더라도 오러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금방 익숙해졌다.
반대로 병사들은 세 번째 단계에서 가장 큰 혼란을 느꼈다.
기사들이 평생을 걸쳐 수련해온 검술들은 기사들의 오러 운영 능력을 키워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병사들은 아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서는 분명 병사들이게 검술을 가르쳐줬다. 제법 수준 높은 검술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급을 위해 가르쳐준 것일 뿐더러, 그 기간이 오래 되지 않았다.
수십 년을 검을 휘둘러오며, 검을 탐구한 기사들과 고작 몇 년 동안 의지라기보다는 누가 시켜서 검을 휘둘러온 병사, 이 둘 사이에는 굉장히 큰 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수르는 계획 외의 결단을 내려야했다.
‘검술을 익힌 다음에 다시 기가스 파일럿이 되서, 기가스 검술을 배우는 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겨울이 됐다.
지금까지도 굉장한 발전을 보여준 지원자들이지만, 그 사실이 적들과 싸울 때 변명이 될 순 없다.
검술 능력은 중요하다. 기가스를 조종하는 건 결국 파일럿이다. 그리고 아주 특수한 경우, 문수르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기가스들의 주요무기는 검이다.
제 아무리 기가스에 탑승한 경우 사용하는 검술과 일반적으로 배우는 검술이 다르다고 해도, 일반적인 검술을 배워서 나쁠 건 하등없다.
무엇보다 기가스에 탑승하든, 그냥 검을 휘두르든, 검은 단순히 살생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적어도 기사들에게 있어 검은 자신들의 인격을 수용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저 무작정 사람 잡는 검만 배운 자와 진심으로 검을 휘두르는 법을 매일 수행하는 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실력 차이가 나다가, 나중에는 이루 걷잡을 수 없는 차이가 난다.
그래서 기본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수르도 제대로 검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겨울 동안에는 어설프게나마 기가스를 다루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최소 겨울 동안 기가스 검술보다는 기본적인 검술 수양에 박차를 가한 후에 차츰 기가스 검술에 익숙해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검술이란 게 마냥 속성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평생 품고 가는 건데, 하다못해 기초는 제대로 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스 백작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 문수르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속성법을 택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불스 백작의 편지 내용.
그건 다름 아니라 제이머스 후작의 암살기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5.
제이머스 후작.
문수르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콩탄 왕국이 낳은 유일한 오러 마스터였다.
루이 노믹스는 어디까지나 제국출신으로 왕의 사위가 된 사람, 콩탄 왕국이 낳은 오러 마스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하튼 이런 제이머스 후작을 향한 콩탄 왕국의 지지도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빅토리안 공작이 이미 대세를 다 휘어잡았음에도 제이머스 후작이 훗날을 도모하는 것도, 그런 제이머스 후작을 상대로 빅토리안 공작이 쉽게 수작을 부리지 못하는 것도 제이머스 후작이 오러 마스터란 상징성 때문이었다.
이런 제이머스 후작을 처치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혼자 힘으로 제이머스 후작을 상대로 영지전을 벌여 승리를 거둘 만한 영주가 없으니까.
빅토리안 공작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빅토리안 공작 역시 자신만의 전력을 이용해 제이머스 후작과 1대1로 붙는다면, 승산은 7할을 넘기지 못한다. 말이 7할이지, 패배할 확률이 3할이란 소리다. 만약 패배하면 빅토리안 공작은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오히려 제이머스 후작은 어떻게든 빅토리안 공작과 1대1 구도를 만들려고 하는 중이니, 이런 고민은 무의미하다.
그런 제이머스 후작이 최근 암살 위협을 받았다.
아직 콩탄 왕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이머스 후작은 자신이 암살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을 측근들 몇몇에게 알려줬으며, 그 측근들 중에는 불스 백작도 있었다.
불스 백작은 그 소식을 듣고 고민했다.
“제이머스 후작을 암살시도할 정도로 힘과 합당한 이유를 가진 인물은 빅토리안 공작 뿐이지.”
배후야 뻔하다.
빅토리안 공작이 나선 거겠지.
이유도 많다.
이미 대세를 잡은 빅토리안 공작 입장에선 암살로 제이머스 후작을 처치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시기다.
“왜 지금이지?”
추수가 끝났다. 겨울이 시작됐다. 겨울은 모두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때다. 할 일도 줄어든다. 사실 정말 암살을 시도하려면 추수가 진행될 무렵이 좋다. 영지에는 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영주도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사람 손 하나가 급할 때다. 병사들이 나가서 수확을 돕고, 식량을 옮기는데 투입된다. 기사들 역시 자신들의 봉토에서 수확된 작물을 관리하고, 세금을 받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겨울이 막 시작됐을 때 암살시도를 했다.
“대체 왜?”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빅토리안 공작이 바보도 아니고, 이렇게 어설픈 시기에 암살자들을 움직였을까?
오히려 벌집만 들쑤신 꼴이 됐다.
제이머스 후작은 암살 시도를 오히려 반겼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암살을 사주한 자를 잡으면, 그 어느 것보다 확실한 명분으로 응징이 가능하니까. 빅토리안 공작이 걸려들지 않아도 상관없다. 최소한 빅토리안 공작에 빌붙는 귀족 중 한 명을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1대1로 제이머스 후작을 이길 수 있는 이는 콩탄 왕국에 빅토리안 공작을 빼면 없다.
제이머스 후작에게는 영지전을 가능케 해주는 명분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무기다.
측근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상대가 꼬리를 자르기 전에 몰래 조사해서 알려달라는 거다.
암살의 배후가 누구인지.
대체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사실 이 부분은 앞으로 고민하면 되는 문제다. 불스 백작은 다른 부분을 고민했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뭘 알고 있을까?”
이제르트 자작가.
제이머스 후작은 이제르트 자작가에 자신의 암살 위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측근이 아니니까.
이제르트 자작가의 저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베르베 백작이란 빅토리안 공작의 강력한 우군을 무너뜨린 가문 아닌가? 그러면서도 빠르게 다시 역량을 회복하는 중이다. 무시하라고 해도 못한다.
그러나 측근이란 건 단순히 힘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교감이 필요하다.
그것도 꾸준한 교감.
불스 백작은 제이머스 후작 파벌로 들어간 이후부터 제이머스 후작과 꾸준한 대화를 했다. 겉으로야 조용했지만 물밑 아래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말과 거래가 오고갔다.
반대로 이제르트 자작가는 그런 게 없었다.
제이머스 후작 쪽에서 손을 내민 건 아니다. 사실 제이머스 후작도 체면이 있다. 자신이 먼저 이제르트 자작가에 손을 벌리는 건 형세가 좋지 못하다. 주변 시선도 그렇고, 자존심도 그렇고.
그러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는 거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가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건 사실이다.
보우런 남작과의 전쟁 때도 그렇고, 베르베 백작의 경우에는 왕국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침략이었다.
제이머스 후작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말 것도 없다. 당장 불스 백작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못했던 입장 아닌가?
그렇기에 불스 백작은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만약 빅토리안 공작이 갑작스런 변심으로 제이머스 후작을 암살하고자 했다면, 그 변심의 원인은 이제르트 자작가일 가능성이 높겠지.”
결국 불스 백작은 이 모든 사실을 은밀한 루트를 통해 이제르트 자작가에 알렸다.
그리고 그 소식은 당연히 문수르의 귀에 들어갔다.
문수르는 제이머스 후작의 암살 위협 소식을 듣는 순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전쟁이다.”
때가 왔다.
제이머스 후작에 대한 암살 시도는 단순히 그를 죽이기 위한 시도가 아닐 게 분명했다.
빅토리안 공작은 전면전을 계획한 것이다.
아마 암살자의 뒤를 추척하다 보면 분명 빅토리안 공작의 흔적이 나올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흔적.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흔적.
그렇게 되면 명분은 제이머스 후작에게 넘어가겠지만, 반대로 전면전이 일어난다면 빅토리안 공작이 원하는 바겠지.
빅토리안 공작은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제이머스 후작을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암살자란 수단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시끄러운 겨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르트 자작가 역시 준비를 해야 했다.
“별 수 없지.”
결국 문수르는 원정대 지원자들에게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쳐주는 걸 나중으로 미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기가스를 탑승했을 경우 필요한 전투 능력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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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연재 기록이 깨졌네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