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42화. 들썩이는 땅.>
1.
가을이 끝이 났다.
추수의 계절이 끝난 것이다. 추수가 끝났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이 시작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영주들은 서로 경쟁하듯 파티를 벌이기 시작했다. 가득 차오른 곳간을 어떻게든 자랑하고 싶어 했다.
콩탄 왕국의 작황 역시 굉장히 좋았다. 최근 10년 내에 최고의 풍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풍요로운 건 어디까지나 영주들 그리고 귀족들의 이야기였다. 평민들은 여전히 배를 부여잡고, 간신히 죽지 않을 정도로만 빌어먹으며 살아갈 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올해 가장 많은 수확량을 보이는 자는 그 누구도 아닌 빅토리안 공작이었다.
이미 그가 가진 영지는 콩탄 왕국에서 가장 넓을 뿐더러, 빅토리안 공작의 영지는 콩탄 왕국을 대표하는 곡창지대이기도 했다. 씨만 뿌려도 알아서 자라난다는 황금빛 땅이 그의 소유였다. 빅토리안 공작이 이번에 거둔 수확은 엄청나서 숫자로 계산하기 힘들 정도였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빅토리안 공작이 기쁜 비명을 지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10년 내 최고의 풍년은 빅토리안 공작조차 놀랄 만큼의 수확량을 안겨줬을 테니까.
“끄응…….”
그러나 빅토리안 공작의 기분은 10년 내에 가장 최악이라고 할 정도로 좋지 못했다.
“빌어먹을.”
그의 표정은 몇 달 전 베르베 백작의 패배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좋지 못했다.
“빌어먹을 제국놈들…….”
일주일 전의 일이다.
추수가 슬슬 끝나가고, 수확했던 작물에 대한 정리 및 계산이 어느 정도 진행을 보일 무렵이었다.
그 시기는 빅토리안 공작이 가장 좋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당장 곳간에 어마어마한 곡식이 쌓인다. 자신의 가득 찬 곳간을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쾌감, 영주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만족감은 정말 엄청난 것이다.
더군다나 정말 좋은 일들은 더 있었다.
제 곳간이 가득 찬 귀족들이 가장 먼저 하는 건 성의를 보이는 것이다. 그 성의란 다름 아니라 뇌물이다. 좋게 표현하면 선물이 되겠지.
콩탄 왕국의 귀족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어마어마한 뇌물을 빅토리안 공작 앞에 바친다.
그 정도가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한 해에 받는 뇌물만으로도 영지 운영이 가능할 정도다.
그리고 가장 기대가 되는 건 다름 아니라 왕의 태도였다.
필로스 왕.
당연한 말이지만 빅토리안 공작은 필로스 왕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페스로 제국을 등에 업은 필로스 왕은 귀족들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빅토리안 공작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자다.
그러나 그런 필로스 왕이 일 년에 딱 한 번 빅토리안 공작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입장이 되는 때가 있다.
바로 추수 무렵이다.
왕실의 재정 대부분은 귀족들이 매해 바치는 세금을 통해 충당된다. 개중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이는 다름 아니라 빅토리안 공작이다. 빅토리안 공작이 필로스 왕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납작 엎드리는 입장은 아니다.
당연히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이런 중요한 시기에 굳이 빅토리안 공작을 건드릴 이유가 없다.
빅토리안 공작 입장에서는 가장 속이 시원해지는 시기다.
그 누구에게도 이 심정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기다.
그런데 그 시기에 페스로 제국에서 손님이 왔다.
2.
아히만트 백작.
세상은 그의 이름보다 그의 별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블랙 소드.
페스로 제국이 보유한 3배 급 기가스의 파일럿 중 한 명으로 페스로 제국의 실세 중 실세다.
실세인 것치고는 그다지 대외적인 활동이나, 정치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세상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콩탄 왕국을 방문했다.
수행원도 없이, 언질도 없이.
그리고 그가 방문한 장소는 필로스 왕이 머무는 왕도가 아니라, 빅토리안 공작의 성이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히만트 백작의 방문 소식을 들었을 때 빅토리안 공작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 그게 페스로 제국의 아히만트 백작님께서 빅토리안 공작 각하를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페스로 제국의 아히만트 백작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사, 사실입니다. 신분 확인도 끝났습니다. 분명 페스로 제국의 아히만트 백작님이 맞으십니다.”
아히만트 백작.
분명 거물급은 거물급이다. 하지만 그는 콩탄 왕국과 이러다할 접점이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현재 콩탄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슈페언 백작이다. 역시 3배 급 기가스의 파일럿이자, 3배 급 기가스의 소유자이기도 한 슈페언 백작은 직접 3배 급 기가스를 이끌고 필로스 왕을 도와줬던 인물이다.
루이 노믹스는 그런 슈페언 백작의 측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믹스 가문 출신이다.
여하튼 슈페언 백작가와 필로스 왕가 사이에 맺어진 사이는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없다.
하물며 아히만트 백작은 페스로 제국 내에서도 정치적인 활동이 드문 인물이었다. 아주 정치와 담을 쌓고 지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열성적으로 정쟁에 뛰어드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왜 이 먼 콩탄 왕국까지, 그것도 필로스 왕이 아닌 빅토리안 공작가를 찾아온 걸까?
빅토리안 공작은 직감했다.
‘정치적 이유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아히만트 백작이 자신을 찾아올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필시 정치적인 이유,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이유를 배경에 두고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은 아니겠군.’
그리고 그 정치적 이유는 빅토리안 공작에게 결코 긍정적인 내용이 아닐 것이다.
빅토리안 공작의 생각은 맞았다.
아히만트 백작은 빅토리안 공작과의 자리가 마련되자마자, 이러다할 인사도 마다한 채 대뜸 자기주장부터 했다.
“백만 골드 정도 마련해주실 수 있소?”
“돈이 필요하시오?”
“그냥 일단 물어만 보는 것이오. 빅토리안 공작, 다시 한 번 묻겠소. 백만 골드 정도 소리 소문 없이 마련할 수 있소?”
빅토리안 공작은 말 그대로 공작, 가장 높은 작위의 인물이다.
반면 아히만트 백작은 말 그대로 백작. 고급 귀족이지만, 공작과 후작에 비하면 급수가 한참 낮다.
그럼에도 아히만트 백작은 빅토리안 공작을 자신과 비슷한 수준…… 아니, 오히려 그 이하로 취급했다.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 사이에 있는 벽이 단순히 제국와 왕국의 벽이 아님을 의미하는 바였다.
빅토리안 고작이 아히만트 백작의 그런 태도에 일언반구도 하지 못하는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절로 욕이 나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상대는 제국의 실세 중 실세 아닌가? 여기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가는 이제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지도 모르는데.
“급하다면 그 정도 돈은 빌려드릴 수 있소. 하지만 아히만트 백작께서 본인에게 돈을 빌리실 정도로 상황이 궁핍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소만?”
“그냥 해본 소리요.”
“그냥 해본 소리?”
“빅토리안 공작이 나를 얼마나 믿는지 시험해 본 것이외다. 딱히 다른 의도는 없었소.”
시험이란다.
‘내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싶은 건가?’
감히 누가 누굴 시험한단 말인가?
“허허, 아히만트 백작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분인지는 몰랐소.”
“재미있다는 소리는 공작께 듣는 게 처음이오. 보통은 좋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 말에 빅토리안 공작은 소름이 돋았다.
‘그래, 이자는…….’
블랙 소드.
단순히 그의 기가스가 검은색 검을 휘둘러서 붙은 별명이 아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해서 붙어진 별명이기도 했다. 대외활동이나, 정치활동은 적지만, 황제의 명령에는 그 어떤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자였다.
그래서 실세 중의 실세였다.
황제가 굉장히 신뢰하는 자였으니까. 황제의 검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때도 있었다.
‘위험한 자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는 바람에 잘 몰랐지만, 결코 우습게 볼 자가 아니었다.
더불어 아히만트 백작은 이제까지 단순히 머리에 떠오른 말을 주절거린 게 아니었다. 적당한 화술을 이용해 빅토리안 공작을 치고, 찌르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히만트 백작.”
빅토리안 공작은 정치판에서 이제까지 살아남고, 종국에 승리자가 된 여우 중의 여우다.
지금 필요한 게 뭔지 잘 알고 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인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돈이 필요하시오?”
“페스로 제국의 정세가 살짝 흔들리고 있소이다.”
“음?”
페스로 제국의 정세가 흔들린다?
빅토리안 공작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적어도 제국 귀족, 그것도 실세 중의 실세 입에서 나온 말 아닌가?
“그러니 콩탄 왕국도 줄을 바로 서는 게 좋지 않겠소? 그 조언을 해주려 직접 왔소이다.”
줄을 바로 선다?
빅토리안 공작은 금방 그 말의 의중을 파악했다.
‘슈페언 백작을 버리라는 말이구나.’
지금 콩탄 왕국은 페스로 제국에 기대고 있다. 페스로 제국 중에서도 굳이 누구 어깨에 기대고 있냐고 묻는다면 슈페언 백작이다. 슈페언 백작 역시 제국의 실세 중의 실세다. 어깨를 기대는 것 따위는 나쁠 게 없다. 반대로 슈페언 백작 입장에서도 콩탄 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내서 나쁠 건 없다.
그런데 지금 아히만트 백작이 요구하는 건 그 슈페언 백작을 버리고 자기편에 붙으라는 소리다.
‘위험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다.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무리다.
슈페언 백작이 힘을 잃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를 배신하라고?
그럼 슈페언 백작의 분노는 오롯하게 빅토리안 공작을 향할 게 분명하다.
그 분노 앞에서 콩탄 왕국은 몰라도 빅토리안 공작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공작께서도 잘 알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리겠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시오.”
그리고 아히만트 백작은 협박까지 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니겠소?”
말이 긍정적인 방향이지, 자신과 손을 잡지 않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하하!”
빅토리안 공작은 이 상황에서 웃었다. 역시 그는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여우였다.
이 순간 침묵을 고수한다거나, 인상을 찌푸린다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아히만트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던, 거절하던, 지금 이 순간 아히만트 백작이 좋은 기분으로 빅토리안 공작령을 떠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웃어야 한다.
“알겠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보겠소이다.”
아히만트 백작은 그런 빅토리안 공작의 반응에 별 다른 대답 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아히만트 백작이 떠났을 때 빅토리안 공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감히 네놈들이!”
빅토리안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에 있는 모든 것들을 때려 부셨다. 그의 분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빅토리안 공작의 몸에서 지독한 마기(魔氣)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빅토리안 공작이 익혔던 흑마법이, 악마의 힘이 그가 분노로 자제력을 잃은 틈을 비집고 나온 것이다.
한 번 나온 악마의 힘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기운은 어떻게든 피를 보기 전까지는 잠잠해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빅토리안 공작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은지 오래였다.
빅토리안 공작이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죽였다. 하녀를 보는 순간 하녀의 목을 물어 뜯었다. 그 상태에서 하녀를 강간했다. 시체를 강간했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빅토리안 공작은 하녀와 하인을 합쳐 수십여 명을 죽이고, 그들의 피와 심장을 삼켜먹은 후에야 진정했다.
그리고 며칠 후 빅토리안 공작가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 사람의 목적지는 페스로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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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울 날씨가 춥다고 하네요. 슬슬 추위도 막바지인 것 같네요. 조만간 봄이 오고, 금방 여름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