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5.
야구 시즌이 한참이다.
특히 올스타를 앞두고 모든 구단들이 막판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승수를 쌓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주축 선발투수가 마무리로 나오고, 부상인 선수가 이를 악 물고 경기에 나서고 있다.
선수들도 그렇고 팬들도 그렇고 모두 열기가 바짝 솟아올랐을 때, 문수는 그 무렵에 주정희 감독을 만나기 위해 야구장을 찾았다.
“여기가 우리 구장인가?”
얼떨결에 야구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만들고 난 이후 제대로 관리를 못했다. 어스 월드에 있는 시간 자체가 적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수가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문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름 구단주인데 이제까지 야구선수들 얼굴 한 번 보지 않았으니, 정말 낙제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문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정희 감독만 만나서 이야기 듣고 끝내야지.’
오래 있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건 과연 주정희 감독과 대화를 나누면서 무슨 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 부분이었다.
주정희 감독은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꼬장꼬장하시겠지.”
사교성이 그다지 많은 사람은 아니다. 퉁명스럽고, 사람을 경계한다. 그 성질이 쉽게 변하진 않았을 터. 그런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쉬운 일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한편 야구장을 바라본 문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 여기 들어가려면 티켓 끊어야 하는 건가?”
- 예매할까요?
로이드가 잽싸게 치고 들어왔다. 문수는 로이드의 그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일단 주정희 감독에게 전화를…….”
- 제 전화번호부에 주정희 감독의 전화번호는 없습니다. 핸드폰을 아직까지 계통하지 않으신 걸로 압니다.
“그럼 구단 프론트에 전화하면 되잖아?”
-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조만간 프론트 직원이 곧바로 문수를 맞이하게 나올 것이다. 첫 구단주 방문 아닌가? 어쩌면 선수들이 줄지어 문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 순간 문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승부가 끝나지 않은 세계, 가장 치열한 승부가 진행 중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구단주가 온다면 선수들은 어떤 심정일까?
아니, 그 전에 구단주 한 명의 방문에 선수들 전부가 하던 일을 멈추고 구단주를 맞이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운동선수들이다.
최고의 경기력을 유지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페이스 조절을 한다. 그런데 문수의 방문으로 그들의 페이스가 흔들리면 좋을 건 없다. 무엇보다 주정희 감독이 탐탁지 않아할 것이다.
주정희 감독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문수 입장에서는 그런 경우는 사양이다.
“됐어. 프론트에 알리지 마. 괜히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지. 표 끊은 다음에 조용히 주정희 감독만 만나고 가자고.”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 그럼 티켓 예매할까요?
“기왕 온 김에 야구도 보고…… 가장 좋은 자리로 예매해줘.”
- 주인님, 그럼 몰래 행동한다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응?”
- VIP석에 앉으면 저절로 눈에 띌 텐데, 설마 야구장에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주인님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없겠습니까?
“그건…….”
듣고 보니 로이드의 말이 맞다.
“별 게 다 문제군.”
- 기왕 정체 감추실 거면 모자라도 사서 쓰고 다니시죠?
“모자까지?”
- 아주 무명인은 아니잖습니까?
“그래, 그래, 네가 맞다.”
문수는 곧바로 야구장 한 곳에 마련된 곳에서 야구모자와 유니폼까지 구매했다.
재미난 건 유니폼 매장 직원은 문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문수는 거의 1년 동안 어스 월드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유명했지만 1년 동안 소식이 없으니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을 터. 더군다나 지금 문수는 머리가 길었다. 수염도 거칠었다. 케르빈 월드에서는 머리를 자르거나, 수염을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어스 월드에 온 후에도 면도를 하긴 했지만, 수염은 금방 자랐고, 머리는 자를 시간도 없었다.
솔직히 문수를 가까이서 자주 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일반사람들이 문수를 알아보긴 힘들다.
굳이 모자를 쓸 필요도 없을 정도다.
“괜히 돈 쓴 거 아니야?”
일단 구매한 모자를 쓰긴 했지만 무언가 찜찜한 기분에 투덜거리는 문수.
- 뭐, 돈이 아쉬운 입장은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아끼면 좋지.”
- 그래서 저번에 직원이 얕본다고 그 비싼 점퍼를 대량 구매해서 고아원에 기증하신 겁니까?
“그건 말 그대로 기증이잖아.”
- 칭찬해드릴까요?
“됐다, 됐어.”
말싸움으로는 도무지 로이드를 이길 수가 없다. 문수는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어쨌거나 덕분에 야구장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좌석도 외야석이었다. 감독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 자리, 외야수들 엉덩이만 보이는 자리.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외야석은 텅 비어 있었다.
“꼴찌 팀이니까.”
아무래도 팀이 신생구단에 꼴찌인 만큼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는 거겠지.
경기내용 역시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문수의 팀은 분전했으나, 결국 패배했다. 선발 투수는 4이닝을 버티지 못했고, 중간에 올라온 불펜 투수들은 중요한 순간마다 실점했다. 득점권 찬스에서는 쉽게 점수를 내지 못했다.
패배하는 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재미난 사실은 경기가 기울어졌음에도 외야 수비를 위해 나오는 선수들의 눈빛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
‘이거다.’
중요한 순간에도, 이미 승부가 기울어진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 모습!
‘패배자근성이 없다.’
패배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열정이 없다. 오히려 패배 앞에서 담담한 모습을 보인다.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다.
어떠한 일이든, 패배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패배가 쓴 약이 된다고? 그 쓴 약을 먹고 정신을 차려야 약이 되는 거다. 담담하게 그 패배를 삼키기만 하면 약이 아니라 독이다.
“역시 배울 게 있겠어.”
주정희 감독은 선수들을 제대로 키웠다.
한석균은 그런 주정희 감독의 노하우를 배우라고 하는 거겠지.
“좋아.”
6.
경기가 끝났다.
원정팀은 이미 숙소로 향했다. 반면 홈팀은 경기장에 남은 채 계속해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경기장의 조명은 계속해서 켜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전기세가 꽤 나올 것 같다.
문수는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 순간 관계자가 문수에게 다가왔다.
“경기가 끝났습니다. 퇴장해주십시오.”
이미 한참 전에 경기가 끝났음에도 외야석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문수를 강제로 내보내기 위해서 온 것이다. 문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수는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말없이 경기장 조명이 보이는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문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기분으로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가벼운 기분을 품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과연 지금 웃으면서 야구나 볼 때인가?’
경기 동안 선수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투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 투지는 경기 후에도 식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그들은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 때보다 더 험한 훈련을 시작했다. 야수들은 수비훈련을 했고, 투수들은 모두가 수건을 든 채 투구폼을 바로 잡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코치들이 달라붙어 혹독하게 선수들을 몰아붙였다. 과연 내일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 중심에는 주정희 감독이 있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선수들 하나하나를 지켜봤다.
그 모든 과정을 보면서, 문수는 가슴 언저리가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미쳤지.'
그제야 문수는 자신의 처지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무언가를 즐길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이 순간 케르빈 월드의 주민들 중 누군가는 죽어간다. 혹은 전쟁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문수는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면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엎드릴 수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문수는 기다렸다.
지금 문수는 구단주의 자격으로 감독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다. 주정희 감독, 그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적어도 주정희 감독이 하는 일에 구단주란 타이틀을 들고 갑자기 난입해서는 안 된다.
문수는 경기장의 조명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경기장 조명은 정확히 12시 정각에 꺼졌다.
문수는 그 후에 주정희 감독이 경기장에서 나오기 전까지 기다렸다. 선수들은 천천히 구단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그들 중에 주정희 감독이 있었다.
순간이었다.
주정희 감독의 시선이 가로등 밑에 서있는 문수와 마주쳤다. 주정희 감독은 문수의 정체를 금방 파악했다. 그 후에 주정희 감독은 선수들에게 말했다.
“먼저들 숙소에 가서 쉴 것. 마무리 스트레칭은 빼먹지 마라.”
“알겠습니다!”
주정희 감독의 말에 선수들은 마치 군인마냥 동시에 입을 모아 소리쳤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름 프로선수들 아닌가? 고등학교 야구부와는 여러모로 다른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마치 고등학생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주정희 감독의 명령이 무조건 복종하게 만든 것일까?
‘그래, 저거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문수는 애매모호했던 무언가가 뚜렷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걸 배워야 한다.’
프로선수들마저 확실한 부하로 만들어버리는 주정희 감독의 능력! 문수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었다.
“오랜 만에 보는 얼굴이라 잊을 뻔했소.”
주정희 감독은 문수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반대로 문수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주정희 감독은 문수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구단을 해체한다거나 지원을 축소한다거나, 그런 종류의 문제는 아닙니다.”
문수는 나름 우스갯소리라고 한 말이었으니, 그 말을 들은 주정희 감독도 이내 안색을 굳혔다.
“혹시 팀이 꼴찌를 하는 것 때문에 그렇소?”
주정희 감독은 이제까지 프론트의 전폭적인 지원에 만족했다. 프론트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줬다. 성적의 고하에 따른 압박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프로는 성적으로 말하는 세계 아닌가?
문수를 봤을 때, 조금은 걱정을 했다.
“성적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올 시즌은 힘들겠지만, 내년은 다를 테니까.”
“성적 때문은 아닙니다.”
“정말인가?”
“처음에 구단을 만들 때 약속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때 약속을 지금 당장 뒤집어엎을 정도로 신용이 없는 놈은 아닙니다.”
“다행이군.”
주정희 감독은 그제야 내색했다.
“내가 잘리는 건 아무래도 좋네. 하지만 지금 내가 키우는 선수들은…… 그들은 버릴 수가 없네.”
키우는 선수들을 버릴 수가 없다?
그래, 그래서 궁금하다.
“그 부분이 궁금합니다.”
“음?”
문수는 이야기를 빙빙 꼬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무슨 사람 말인가?”
“배신하지 않고, 상사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할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허허, 그럼 그냥 뽑으면 되지 않은가?”
“주 감독님께 사람을 고르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음!”
그제야 주정희 감독은 문수가 진심이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그렇군. 따라오게.”
============================ 작품 후기 ============================
설날 연휴가 끝났습니다.(추석이라고 오타 났네요) 그런데 내일은 다시 기온이 뚝 떨어진다네요.
참 추운 2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