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39화. 기사의 덕목>
1.
문수는 신문을 보고 있었다.
“참, 웃기는군.”
신문을 보던 문수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로이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 재미난 기사라도 찾으셨습니까?
“그게 아니라 이 신문 날짜 말이야…… 이걸 보니까 드디어 체감이 된다고 해야 할까?”
문수는 그 말과 함께 마련된 콜라를 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목구멍을 훑고 지나가는 탄산의 쓰라림에 문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캬아!”
이 맛이다.
“진짜 돌아왔구나.”
문수르는 콜라의 맛 그리고 신문 위에 적힌 날짜를 보며 드디어 체감할 수 있었다.
“진짜 내가 지구로 돌아왔어.”
어스 월드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2.
힘든 나날이었다. 쉴 틈은커녕 잠잘 틈조차 없었다. 비유가 아니다. 케르빈 월드에서 문수는 잠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긴장 때문이다. 케르빈 월드에서는 언제나 긴장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일이 뻥뻥 터졌으니까. 잠도 거의 눈만 붙이는 수준이었다. 이상한 조짐이라도 느끼면 곧바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들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육체적으로는 버틸만했다. 오러 마스터의 육체니까.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향수병을 느낄 줄이야.’
특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문수는 본래 세계를 향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향수병을 느낀 건 그게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케르빈 월드에 넘어가도 별 문제 없었기에 향수병과는 거리가 멀구나, 그리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향수병은 본능이 느끼는 병이다. 특히 몸이 고달프고, 정신이 힘들 때 그 본능은 더욱 강렬해진다. 문수가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상 향수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그렇게 어스 월드로 돌아왔을 때 문수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9시간…… 시간 상으로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 중에 잠이 좀 많은 사람의 수면 시간 정도. 그러나 문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개운함을 느꼈다.
“오늘 일정은?”
그리고 그 개운함을 기점으로 문수는 다시 본래의 역할에 충실해지기로 했다.
- 회장님과 면담이 있습니다.
“면담?”
- 원래 오자마자 억지로라도 깨워서 면담을 가지시려고 했는데, 제 보고서를 읽고는 주인님이 깰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오자마자?”
-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화가 났다는 말에 문수는 이크,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라도 화가 나겠다.’
근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소식이 없었다. 문수 입장에서야 할 말은 많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고, 문수도 나름 신나게 고생했다고.
그러나 한석균은 그 사실을 모른다. 한석균 입장에서는 문수의 사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새로운 적격자를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여기서 자신의 숙원을 포기해야 할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이제르트 가문은 어찌 됐을까?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것이고, 그 상념을 품은 채로 문수가 오기 전까지 고민하고, 고뇌했을 것이다.
“곧바로 준비하지.”
문수는 가볍게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문수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곧바로 한석균이 위치한 곳으로 향했다.
3.
“오랜만이군.”
한석균은 의자에 앉은 채로 문수를 맞이했다. 문수는 그런 한석균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사과부터 하는 문수와 그 사과를 사양하는 한석균.
“보고서는 읽었네.”
한석균은 로이드가 건네준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보고서의 양은 엄청났다. 책 한 권 분량, 그것도 그냥 책이 아니라 제법 두터운 축에 속하는 책 한 권 분량이었다.
‘내가 저렇게 많은 일을 했었나?’
문수가 케르빈 월드에서 한 모든 일을 글로 적어도 저 정도 분량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머릿속에 생각한 멘트가 그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문수는 하하, 다시금 어색하게 웃었다. 한석균은 그런 문수의 모습에 실소를 머금었다.
“정말 힘든 고비를 넘겼어.”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 죽을 뻔했겠지.”
의외로 분위기가 괜찮다. 문수는 크게 혼나지 않고 오히려 좋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문수의 착각이었다.
“그래서 곳곳에서 실수를 저지르더군.”
“예?”
“사람이 죽을 고비에 도달하게 되면, 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지. 문수, 자네도 그런 굴레에서는 자유롭지 못한가보군.”
한석균, 그의 표정이 굳었다. 문수는 직감했다. 결코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때부터 한석균은 문수가 했던 모든 일에 대한 지적을 시작했다.
한석균의 설교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리고 한석균이 하는 모든 말은…….
‘내 실수다.’
틀린 말이 없었다.
한석균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대로 행동했었어야 한다. 그래야 이제르트 자작가의 미래가 좀 더 나아졌을 테고, 문수에게도 좋은 기회가 생겼을 테니까.
특히 한석균은 이제르트 부속령의 처리문제를 놓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이제르트 부속령을 팔았어야 했다.”
한석균은 이제르트 부속령을 가져서는 안 되는 땅이라고 말했다.
“이제부터 이제르트 자작령에 대한 견제는 줄어들 것이다. 베르베 백작도 어찌하지 못한 땅을 어설픈 귀족들이 덤벼들 리 만무하니까. 하지만 이제르트 부속령은?”
이제르트 자작령을 향하던 공세는 자연스럽게 이제르트 부속령으로 방향을 틀 게 분명했다.
어쩌면 문수가 어스 월드에 있는 지금 이제르트 부속령이 공격당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영지를 얻지 못한 거라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그 땅이 오롯하게 이제르트 자작가의 땅이 된 상황에서 타인에게 빼앗긴다는 건 여러 모로 문제가 크지.”
이제르트 부속령까지 지키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병력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가?
또한 무작정 병력을 늘린 후에는? 유지비는 누가 대주지?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제르트 부속령이 공격당하고, 패배하면 그때부터 정치 공세가 시작되겠지. 무엇보다 대부분의 실권을 적이 쥐고 있는 상황에선 작은 구실에도 결국 전장에 나올 수밖에 없다.”
한석균이 원하는 건 콩탄 왕국의 파멸이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반석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런 식으로 콩탄 왕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구도가 되면 좋을 게 없다.
물론 빅토리안 공작 파벌이 아닌 제이머스 후작 파벌을 선택했을 때 고난과 역경이 시작된 건 맞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정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정쟁이 아니라 콩탄 왕국과 이제르트 자작가의 싸움이 될 판이다.
무조건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르트 자작가에 위협이 될 만한 일이라면 문수는 한 번 더 심사숙고했었어야 했다. 이제르트 부속령을 떠안는 것이 이익인지, 그걸 팔아치우는 것이 이익인지 말이다.
“죄송합니다.”
문수는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한석균은 그런 문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수를 향한 기대가 무너져서? 문수가 생각 이하로 일을 못해서?
아니다.
솔직히 한석균은 문수의 능력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문수는 정말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케르빈 월드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단지 분명히 하고 싶을 뿐이다.
더 나은 길이,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다음에는 그런 길을,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이렇게 문수를 설교하는 건 그래서 중요했다.
“앞으로 상황이 다시 급변하면 내가 이렇게 설교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상황은 날이갈수록 더 긴박하게 변할 것이다.
까놓고 아직 제대로 된 전면전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문수, 자네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 이렇게 설교하도 해주는 걸세.”
“감사합니다.”
문수는 그런 한석균의 행동에 감탄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런 문수를 보며 한석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를 하도록 하지.”
그러나 한석균과의 대화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4.
한석균은 승인해줬다.
“마나 호흡법을 보급해야겠지.”
기가스 파일럿의 양성을 위한 마나 호흡법의 보급! 이미 계획은 세워둔 상황이었다.
보급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재능 있는 자라면 오러 마스터는 못 되더라도, 오러 나이트가 되어 기가스를 조종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역시 문제는 사람, 그 자체로군.”
그러나 재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나 호흡법을 가르쳐줘서는 안 된다.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진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
조건이 세 가지 뿐이라지만, 하나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구별하기 힘든 조건들이다.
사람 마음을 읽는 도구가 없는 이상, 그 사람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이 부분은…….”
물론 한석균은 사람 마음을 볼 줄 안다. 그에게는 그것을 가능케해주는 마법이 있다.
또한 사람의 심리를 잘 알고 있다. 그가 몇 가지 방법을 만들어두고, 그 매뉴얼에 따른다면 문수 역시 충분히 사람을 골라낼 것이다.
그러나 한석균은 거기서 잠시 멈뭇거렸다.
“방법을 알려주기 전에 최소한 사람을 보는 방법을 배우는 게 우선이겠군.”
한석균은 문수에게 고기를 주기보다는 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그것이 낫다는 건 모두가 동의하는 만고불변의 법칙이었으니까. 문수 역시 진지하게 임했다.
“어떻게 배우면 됩니까?”
“내가 가르쳐주기는 뭐하군.”
“그럼……?”
“운 좋게도 자네가 고용한 사람 중에 자네에게 사람 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이가 있지.”
“예?”
그런 사람이 있었나?
문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석균이 웃으며 대답했다.
“주정희 감독, 자네가 만든 야구단의 감독.”
“아…….”
그제야 문수는 자신이 만든 야구단의 존재를 떠올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야구단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시즌…… 이제 막 중반에 접어들었겠군요.”
“그렇지.”
“지금 제가 만든 팀 몇 위쯤 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문수는 순위도 몰랐다. 근 1년 가까이를 어스 월드에 오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더군다나 지금 어스 월드로 돌아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오자마자 가볍게 신문을 보고 콜라를 마신 후에 기절하듯 잠들었고, 그 이후에는 지금 한석균 앞에서 신나게 설교를 듣고…….
“꼴찌네.”
“예?”
“그럼 뭘 기대했나? 밑바닥에서 시작한 팀인데, 단시간 내에 강팀이 될 것 같았나?”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꼴찌라니.”
“꼴찌니까 더 배울 게 많겠지.”
“꼴찌니까 배울 게 더 많다니……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한석균은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패자(敗者)가 있지. 하나는 그냥 패배자. 다른 하나는 패배를 승리를 향한 밑거름으로 여기는 자. 내가 보기엔 주정희 감독이란 자는 후자에 가까운 자일세.”
그 말에 문수는 머리만 긁적였다.
============================ 작품 후기 ============================
설연휴 마지막 날 푹 쉬세요, 고생들 하셨습니다~그러고 보니, WBC 예선까지 20일 남았네요.. WBC 끝나면 시범경기 시작. 야구시즌이 얼마 안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