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5.
콩탄 왕국의 계절이 여름에 접어들 무렵.
가뜩이나 더운 귀족들의 머릿속을 화끈하게 만들어버릴 만한 소식이 콩탄 왕국을 강타했다.
“뭐? 베르베 백작이 전 병력을 이끌고 불스 백작이 아닌 이제르트 자작을 쳤다고?”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베르베 백작이 불스 백작을 향해 어금니를 드러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확실한 명분만, 꼬투리만 잡는다면 전쟁은 언제든지 성사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르트 자작가라니?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더 예상치 못했던 일은 따로 있었다.
“패배해? 누가?”
“설마…….”
“맙소사, 베르베 백작이 기가스를 8대나 끌고 갔는데 이제르트 자작가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베르베 백작의 패배!
콩탄 왕국 내 백작들 중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그 베르베 백작이 전군을 이끌고 갔음에도 대승은커녕 오히려 대패를 하고 돌아온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더 참혹했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베르베 백작가의 모든 병사들을 죽였다. 인질 따윈 없었다. 병사든, 기사든 개의치 않았다. 잡은 모든 이들은 이러다할 재판 없이 그 자리에서 즉결심판 했다.
“그 무슨!”
“이제르트 자작가가 미쳤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사들까지 바로 처형하다니?”
처음 그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혀를 찼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자충수를 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준 귀족 이상 되는 자들은 포로로 잡고 그에 따른 대우를 해주는 게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그런데 이제르트 자작가는 그런 기본적인 개념조차 무시한 채 모두 처형한 것이다.
필시 국왕 차원에서의 어떠한 압박이 있으리라.
그러나 전후사정이 보다 정확히 알려지자, 그 누구도 이제르트 자작가의 행동에 대해서 짧은 말조차 달지 못했다.
베르베 백작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무작정 이제르트 자작가를 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콩탄 왕국의 필로스 왕이 허락하지 않은 전쟁이었다. 명분도 없는 전쟁이었다.
때문에 그건 전쟁이 아니었다. 베르베 백작의 군대는 무법자였고, 그들이 하고자 한 건 약탈과 무단침입이었다. 그들 스스로 콩탄 왕국의 도리와 법을 어긴 자들이었다.
어떤 처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이쯤 되자 그 누구도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이제르트 자작가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 이제르트 자작가는 베르베 백작가에게 피해에 대한 보상을 외칠 권리를 정당하게 가지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베르베 백작은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는 이제르트 자작가가 베르베 백작마저 죽였다, 라는 주장을 했지만 이제르트 자작가는 자신들 역시 베르베 백작가를 놓쳤으며, 따라서 베르베 백작에게 전쟁에 따른 모든 보상금을 요구했다. 그 보상금 액수만 50만 골드에 다다랐다.
베르베 백작이 부재된 상황에서 이제르트 자작가는 보상금에 대한 강제 징수를 요구하는 내용의 서찰을 필로스 왕에게 전했다. 베르베 백작이 있다면 변명이라도 하던가, 하다못해 이제르트 자작과의 합의를 통해 보상금 액수를 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베르베 백작은 자리에 없었다.
필로스 왕은 긴 고민 없이 이제르트 자작가의 청원을 들어줬다. 사실상 필로스 왕이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잘못한 쪽은 베르베 백작가였으니까. 베르베 백작도 없는 상황에서 필로스 왕이 그를 감싸준다는 건, 왕과 귀족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왕 스스로가 무너뜨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떻게 보면 베르베 백작은 필로스 왕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사로운 싸움이라도 왕의 허락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영주끼리 싸우기 전에는 왕의 허락을 받고, 영지전을 치러야 한다. 그건 왕이 가진 중요한 권리이며 권력이었다.
그런데 베르베 백작은 그런 왕의 권리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싸움을 건 것이다.
그럼 이기기라도 하던가, 아주 대패를 했다.
필로스 왕은 귀족에게 좌지우지되는 왕이 아니다. 그의 뒤에는 페스로 제국이란 든든한 배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빅토리안 공작 파벌이 마치 자기세상인 것마냥 설치는 꼴도 좀 그렇다.
필로스 왕의 과감한 결단은 빅토리안 공작 파벌을 향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해다.
이런 상황에서 베르베 백작이 배상금을 내놓지 않고,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긴 힘들었다.
결국 베르베 백작의 부재 상황에서 베르베 백작의 대리인이 된 아들이 배상금을 지불했다. 베르베 백작은 그 모든 보상금은 금화로 지불했다. 그 사실에 콩탄 왕국의 귀족들은 또 한 번 놀랐다.
“베르베 백작이 부자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50만 골드나 되는 거금을 금화로만 지불할 줄이야.”
여하튼 덕분에 이제르트 자작가에 단숨에 50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시에 이제르트 자작가의 저력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보우런 남작 때와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번 상대는 베르베 백작가였다. 투입된 기가스만 8대였다. 그 중 2배 급 기가스만 무려 3대가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전력을 상대로 이제르트 자작가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존재가 콩탄 왕국 정계에 태풍의 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콩탄 왕국의 모든 귀족들은 물론, 콩탄 왕국의 정세를 유심히 지켜보는 페스로 제국의 몇몇 귀족들까지 이제르트 자작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가는 보상금 문제 이후 이러다할 외부적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콩탄 왕국의 여름이 시작됐다.
6.
무너진 성벽의 복구 작업이 한참이었다. 복구 작업에는 3대의 아이언히트가 투입됐다. 덕분에 해자를 파내거나, 성벽 자재를 옮기는 일들은 쉽게 이루어졌다.
이번 기회에 성벽 복구가 아니라, 성벽을 증축하고, 확장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기왕 무너진 성벽, 기왕 세울 거 엘프와 드워프에게 농지로 할당해준 땅까지 확장하자는 의견이었다.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하는 거 이번 기회에 땅도 좀 더 개간합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수르는 테블스 산의 일부를 다시금 이제르트 자작령의 땅으로 만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크 무리들이 덤벼들면서 이제르트 자작령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몬스터들이 전부 도망갔다. 특히 오크 무리들 사이에 오우거가 섞여있는 게 컸다. 오크들이라면 오히려 오크들을 식량 삼아 먹기 위해 몬스터들이 더 몰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오우거가 섞여 있는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간덩이가 특별한 놈은 없었다.
이 작업에는 포비어가 나섰다. 포비어가 기가스와 병사들을 이끌고 단숨에 남은 몬스터들을 처지하며 땅을 확장했다. 그 후에 그 위에 다시금 성벽을 쌓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이제르트 자작령의 크기가 갑작스레 1.5배 이상으로 커졌다. 특히 개간한 땅들 대부분은 농지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앞으로의 작물 수확량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모든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문수르는 확신했다.
‘이번 여름이 끝나고, 다시금 수확기가 지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또 다시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한 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여름에는 전쟁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덥다. 날씨가 더우니 병력들이 금방 지친다. 여기에 식수 공급이 확실시 되지 않으면, 단순히 지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병사들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또한 여름에는 손 하나가 아쉽다. 당장 농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해야 할 일손이 필요할 때다. 추수가 끝나기 전까지 사람 손 하나라도 더 찾는 게 보통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염두에 두는 귀족들은 많지 않다.
때문에 여름은 이제르트 자작가가 숨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그렇기에 문수르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문수르가 이렇게 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곳곳에서 터지는구나, 터져.”
문수르는 쌓인 현안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문수르에게는 인재가 부족했다. 특히 최근에는 관리보다는 기사가 시급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가스를 조종할 파일럿이 급했다.
“아이언히트는 당장 여름이 끝나기 전에 20대 이상 확보가 가능한데, 이걸 조종할 파일럿이 없으니…….”
베르베 백작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둘째치고, 전쟁을 통해 얻은 기가스 부품이 적지 않다.
이 부품들은 충분히 재활용이 가능하다. 특히 마나 동력원! 이것만 당장 재활용하더라도 8대의 기가스를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걸 조종할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유지비 먹는 괴물이지.
“관리 쪽은 좀 나은데…….”
관리, 이 부분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사람을 가르치면 최소한 잡일 정도는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몇몇 싹수 있는 녀석들을 가르치면 된다. 그들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다. 월급 잘 나오고, 영지에서도 대우가 좋은데 마다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문수르는 영지 운영에 필요한 과정들은 꾸준하게 바꿨다. 기존의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절차를 간소화하고, 효율화했다. 무엇보다 문수르는 결재 정도만 하면 된다. 주요한 업무 처리는 대부분 로이드가 담당하지 않는가?
여기에 이제르트 부속령은 지미가 처리해주고, 문수르 만큼이나 일처리를 해주는 마구르도 있다. 힘들긴 하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기가스 파일럿은 아니다.
문수르의 몸이 여러 개가 아닌 이상, 아이언히트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파일럿이 필요하다.
하지만 파일럿 육성은 결국 최소한 오러를 느낄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자를 선별해서 키워야 한다.
“재능…….”
솔직히 말하면 재능 있는 자들은 이제르트 자작령 내에도 없진 않다.
아니,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오러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재목들은 제법 발견됐다.
문제는 마나 호흡법이다.
마나 호흡법을 보급하면, 적어도 반 년 안에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보급형은 있다.’
심지어 한석균은 이미 보급형 마나 호흡법을 만들어둔 상황이었다. 신창 페르수스의 마나 호흡법을 입수한 한석균이 그 마나 호흡법을 다운그레이드한 보급형 버전을 만들지 못할 리 만무했다.
문제는 보급형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보급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충성심이 중요해.’
아무에게나 가르쳐줄 수는 없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줄 수 있는 자…… 최소한 재능보단 충성심이 우선이다.
또한 인격적으로 훌륭해야 한다.
‘마나 호흡법을 보급한다는 건, 결국 기가스를 보급한다는 의미.’
충성심도 높고, 재능도 있어서 마나 호흡법을 보급해준다?
여기까진 좋다.
문제는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그냥 오러 나이트 한 명이 난동을 부리는 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기가스 파일럿이 기가스를 타고 난동을 부리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제까지 계속해서 미뤄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마나 호흡법의 보급을 미뤄왔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마나 호흡법을 보급할 필요가 있다.
“계획을 짜야지.”
당연히 선별 작업을 거칠 것이다.
이 선별 작업이 앞으로 이제르트 자작가의 군사력에 중요한 구분점이 될 것이다.
7.
문수르는 다시금 떠날 준비를 했다. 아니, 떠날 준비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정말 오랜만이로군.”
문수르가 가려는 곳은 다름 아니라 어스 월드였다. 본래 문수르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곳으로 떠난다는 표현보다는 돌아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제까지 정말 바빠서 돌아가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문수르는 바쁘다. 당장 문수르의 공백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은 적지 않다. 영지가 어수선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가게 된다면, 어수선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큰 문제가 될 테니까. 빅토리안 공작 파벌이 나서지 않을 여름이야 말로 그나마 가장 안전하게 어스 월드로 돌아갈 기회였다.
무엇보다 필요한 게 있다.
앞으로 있을 더 거센 폭풍에서 버티기 위해선 어스 월드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좋아.”
이제르트 자작에게는 말을 전해뒀다. 상황을 알고 있는 이제르트 자작이라면 문수르의 공백을 충분히 현명하게 처리할 것이다.
문수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허공을 두드리며.
“노크 노크.”
주문을 외웠다.
문수르의 몸이 신기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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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데 일요일 같지가 않네요.
명절이 명절 같지고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