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37화 (135/293)

137화

2.

베르베 백작은 병력의 선두에 섰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귀족인 그가 병력의 선두에 서다니?

‘급하다.’

그 정도로 베르베 백작은 속이 바짝 탔다.

그러나 성벽이 가까워질수록 베르베 백작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어졌다.

‘그래, 얼마 안 남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전투 소리, 그러나 베르베 백작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베르베 백작이 소리쳤다.

“내가 성문을 내리겠다.”

베르베 백작의 그 말에 병사들과 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베르베 백작을 의심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병사들과 기사들은 알고 있다. 베르베 백작이 가진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둔하다 못해 제대로 걷지 못할 것 같은 비대하고, 비루한 몸뚱이지만 베르베 백작은 그 어떤 기사보다 날렵하다.

베르베 백작은 엄청난 몸놀림을 보이며 단숨에 해자를 건너 뛰었다.

사실 성벽을 넘는 행위, 그 자체는 숙련된 오러 나이트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다. 오러를 쓸 수 있고, 제대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오러 나이트의 신체능력은 보통 인간의 능력의 한계치를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니까.

그런 오러 나이트들보다 뛰어난 베르베 백작에게 해자는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 다음 성벽은?

그 역시 문제될 건 없었다.

베르베 백작은 단숨에 성벽에 발을 박아 넣으며, 껑충껑충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순식간이었다.

베르베 백작의 비대한 몸뚱이가 날아가듯, 성벽 위를 단숨에 올라갔을 때.

“쏴라!”

성벽 위의 병사들이 소리쳤다.

베르베 백작은 기겁했다.

“이, 이 무슨!”

성벽 위에 포진한 수십여 명의 병사들, 그리고 성벽 너머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기가스들!

“서, 설마?”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력들이 남문에 모여 들고 있었다.

3.

문수르의 도발……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그 도발에 베르베 백작의 기사들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성적인 판단이란 놈이다.

지금은 전투 상황이었다. 그것도 그냥 전투가 아니라, 기가스란 병기를 타고 이루어지는 전투다. 짧은 전투라도 몸이 느끼는 부담감은 보통이 아니다. 진이 빠진다. 체력이 금방 거덜 난다.

체력이 떨어지면?

인간은 절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체력이 떨어지면 모든 게 흔들린다.

단순히 근성이 있다, 없다 그런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체력이 빠진 상황, 에너지가 전부 빠진 상황, 그럼 생리학적으로 봤을 때 뇌 자체의 움직임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에 대한 타협, 그냥 이루 말할 수 없니 치고 올라오는 짜증, 귀찮음, 피곤함, 어설픈 만족감…… 이러한 모든 것이 평소와는 다른 판단, 멍청한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베르베 백작가의 기사들이 그랬다.

‘어차피 놈은 지금 하나다.’

‘무기도 없는 상황이지?’

일단 나름 합리적으로 생각해봤다. 상대는 하나고 이제 무기도 없고, 방패도 버렸다.

무방비 상태라는 거다.

합리적인 생각은 딱 여기까지다.

‘감히 우리들을 도발해?’

‘개새끼, 네놈 때문에 젤 경이 죽었어.’

‘동료의 복수, 우리가 해주겠다.’

‘그래, 이제까지 도망치던 놈이 알아서 덤벼드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 이후에는 감정적으로 변하고, 이성이 아닌 감성적인 판단, 머리가 아닌 가슴의 판단에 끌리게 된다.

문제는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감정적인 판단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대의 기가스가 전부 문수르의 도발에 넘어갔다. 그래서 5대의 기가스는 모두 동시에 움직였다.

합의되지 않은 움직임, 전술적이지 못한 움직임, 전략적이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문수르는 말했다.

“왼팔.”

- 쓸모없지요.

“좋아.”

만약 베르베 백작의 남은 기가스 파일럿들이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움직였다면, 동시에 움직였을 것이다. 한 번에 같이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같은 보폭, 같은 속도…… 마치 행군을 하듯, 전열을 유지한 채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하나씩 온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가장 기대하던 상황, 적이 알아서 1대1 상황을 만들어주는 상황!

문수르 앞에 가장 먼저 도달한 건 2배 급 기가스였다.

기가스가 검을 움직였다. 수직으로, 대지 위를 내리 찍듯, 벼락이 내리치듯.

동시에 드래곤 파이터의 주먹이 움직였다. 수평으로, 직선으로 바람을 가르며.

콰광!

드래곤 파이터의 주먹이 먼저 기가스에 닿았다. 기가스의 머리, 마나 동력이 있는 그곳을 드래곤 파이터의 왼 주먹이 박살을 냈다.

퍼버벙!

거친 굉음이 틀렸다. 갈 곳 잃은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들이 폭발하는 소리였다.

콰직!

동시에 드래곤 파이터의 왼 주먹이 박살이 났다.

기가스의 머리, 마나 동력원을 보호하는 머리는 가장 단단한 부분이다. 그 어느 곳보다 두터운 장갑이 있다. 기가스의 보통 신체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의미다.

제 아무리 드래곤 파이터에 사용된 금속이 일반 철보다 강도 등이 낫다고 해도 압도적으로 우월한 건 아니다. 경량화를 위해서 금속을 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 파이터의 주먹으로 기가스의 머리를 전력으로 후려치면, 드래곤 파이터의 주먹도 박살이 날 수밖에!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직!

동력원을 잃는다고 해도 그 전에 휘두른 검이 멈추는 건 아니다. 2배 급 기가스가 휘두른 검이 드래곤 파이터의 어깨 장갑을 박살냈다. 드래곤 파이터가 크게 들썩였다.

그러나 문수르는 개의치 않았다.

와이어를 잡아당기며.

“로이드, 이제부터 검술이다.”

- 프로그래밍 완료. 타깃 설정 들어갑니다.

곧바로 운행이 정지된 기가스의 검을 빼앗았다. 팔 하나를 대가로 2배 급 기가스 1대와 무기를 얻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1배 급 기가스 2대다 드래곤 파이터를 향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좌우, 양쪽에서 고하(高下) 차이를 둔 채 날아오는 검이다.

자세를 낮춰서 피할 수도 없고, 점프를 해서 피할 수도 없다. 애초에 점프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드래곤 파이터는 개중에서 보다 높은 쪽으로, 드래곤 파이터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기가스를 향해 맞대응하듯, 검을 휘둘렀다.

공격은 기가스 쪽이 먼저 했지만, 속도는 드래곤 파이터가 훨씬 빨랐다.

드래곤 파이터의 검이 단숨에 기가스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리고…….

콰직!

단숨에 상대방의 가슴팍을, 파일럿이 탑승한 그곳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파일럿을 잃은 기가스의 검을 드래곤 파이터는 자세를 낮추며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콰직!

드래곤 파이터의 다리를 가격하는 다른 기가스의 검!

드래곤 파이터의 왼쪽 다리가 작살이 났다. 다리를 잃은 드래곤 파이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순간 드래곤 파이터는 그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 검을 내리찍었다.

콰광!

검은 단숨에 1배 급 기가스의 머리를 내리쳤다. 기가스의 투구가 흉물스럽게 박살이 났다. 동시에 마나 동력을 잃은 기가스가 그 자리에서 힘을 잃었다.

“로이드!”

- 검술이 무의미했군요.

“아직 2대 남았다!”

긴박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로이드와 짧은 대화.

그러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다리를 잃고, 팔을 잃었다. 이제는 드래곤 파이터는 혼자 힘으로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런 드래곤 파이터를 작살내기 위해, 마무리 짓기 위해 2배 급 기가스 2대가 엄청난 속도로 접근 중이었다.

그 중 1대가 단숨에 드래곤 파이터에 도달했다. 2배 급 기가스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양손으로 검을 잡은 채 넘어진 기가스를 향해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동시에 바닥에 넘어진 드래곤 파이터가 검을 휘둘렀다.

콰직!

2배 급 기가스가 휘두른 검이 드래곤 파이터의 남은 팔 하나마저 완벽하게 베었다.

사실 가슴부를 향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공격은 빗나갔다. 파일럿의 실수? 아니다.

드래곤 파이터의 공격이 빨랐다.

마지막으로 휘두른 드래곤 파이터의 검이 기가스의 발목 부근을 박살낸 것이다.

당연히 균형을 잃은 기가스가 제대로 된 공격을 할 리 만무하다. 그 순간 어떻게든 검로를 틀어 드래곤 파이터의 어깨를 마무리 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발목이 박살난 기가스는 쓰러졌다. 동력 장치도 무사하고, 파일럿도 무사하지만, 전투는 불가능한 상황.

그러나 드래곤 파이터는 두 팔과 다리 한쪽을 잃은, 말 그대로 이제는 전투가 무의미한 상황.

이 와중에 남은 2배 급 기가스 1대!

“끝이다!”

방어도, 반격도 불가능한 드래곤 파이터를 향해 달려드는 2배 급 기가스.

그 순간 기가스 파일럿의 시야 위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야생동물 비슷한 것이었다.

“응?”

기겁하는 파일럿.

그 기가스 파일럿의 시야 위를 스쳐간 건 다름 아니라 문수르였다.

어느새 드래곤 파일럿에서 나온 문수르가 단숨에 적의 기가스를 타고 오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문수르는 드래곤 파이터의 마지막 남은 팔이 작살나기 전에 빠져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드래곤 파이터가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로이드 덕분이다. 로이드가 마지막으로 드래곤 파이터의 와이어를 강제로 움직인 것이다. 혹시 몰라 설치해둔 긴급조종 시스템이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문수르가 몸을 뺀 이유는?

그저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아니다.

문수르, 기가스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남아있는 카드 한 장 더 있었다.

“후우!”

단숨에 기가스의 머리끝까지 오른 후 짧게 한숨을 돌린 문수르, 그의 손에는 다름 아니라 마나 쇼크 장치가 들려 있었다. 문수르는 마나 쇼크 시스템을 기가스의 머리 근처에, 마나 동력원 근처에 놔두었다.

유효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전투에 제대로 써먹지 못했던 마나 쇼크 시스템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척의 거리면 유효하다.

설치가 끝난 문수르가 기가스를 타고 내려왔다.

“작동!”

- 마나 쇼크 시스템 작동합니다.

파지지직!

그 순간 마나 쇼크 시스템이 작동했고, 기가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일시적인 현상이다. 마나 쇼크 시스템은 아직 미완성이다. 마나의 움직임을 아주 잠시 동안만 방해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오러 마스터 문수르, 그가 일시정지한 기가스의 파일럿을 처치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말이다.

4.

포비어는 다급했다.

‘어떻게든 빨리 문수르 경을 도와야 한다.’

오크와의 전투!

문수르는 무척이나 힘드리라 예상했던 전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아이언히트의 활약도 활약이었지만, 포비어의 활약이 눈부셨다.

충분히 훌륭하게 개조된 1.2배 급 기가스는 포비어의 능력을 120퍼센트 이상 발휘가능케 해줬다.

그뿐인가?

포비어의 능력은 엄청났다.

단순히 기가스를 다루는 능력, 그 자체만으로는 오러 마스터인 가누스 이상이었다.

포비어의 활약뿐만이 아니었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가 이제르트 부속령에서 지내는 동안, 이제르트 자작령은 놀지만 않았다. 오히려 문수르가 있을 때보다 더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반면 무작정 공격하는 오크들에게는 나름 발전된 전법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또투가 있을 때 오크들은 통솔이 됐다.

그러나 이번 오크들은 그저 어느 정도의 전법을 이용해 덤벼들기만 할 뿐, 통솔되지 않았다.

문수르가 로이드를 통해서 볼 수 없었던 부분, 그 부분이 전쟁의 승패를 좀 더 빨리 가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니었다.

전투를 끝낸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력들은 전장을 정리하기보다는 곧바로 남문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성벽을 넘으려던 베르베 백작의 병력과 마주친 것이다.

아직 아이언히트가 3대나 멀쩡하고, 포비어의 기가스도 멀쩡한 상황, 반면 상대는 그저 기사와 병사들.

전투는 없었다.

학살만 있었다.

이 와중에 포비어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채 성문을 뒤쳐나왔다. 그리고 전장으로 향했다.

문수르를 도와야 했다.

무려 8대의 기가스와 혼자 싸우는 문수르를 도와야 했다.

그러나 포비어가 전장에 도달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너부러진 기가스 시체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기가스 시체들 중에서는 눈에 띄는 거대한 시체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아!”

짧게 탄식하는 포비어.

설마 늦은 것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포비어의 가슴을 박차고 목구멍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이, 포비어 경! 지금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땅 아래에서 그 무엇보다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기가스를 움직이며 아래를 바라보는 포비어, 그의 눈에는 상의를 탈의한 문수르가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쌀쌀했는데 이제는 완전 여름이군요.”

그렇게 이제르트 자작가의 봄이 끝났다.

============================ 작품 후기 ============================

설 연휴 시작이군요. 짧아서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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