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38화. 봄의 끝.>
1.
문수르는 최후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최소한 마나 동력원의 충전 상태가 1시간 정도 남을 때까지, 그정도까지 판단을 보류하고자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전장에 변수가 너무 많은 탓이었다. 당장 북문에서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력들이 몬스터와 싸우고 있다. 그런 그들의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 수는 있어도 예측하는 건 힘들다.
최후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시간을 끄는 것도 충분히 유효한 수단이며, 선택지 중 하나였으니까. 시간을 들여 고민을 하는 건 그렇게까지 나쁜 일이 결코 아니었다.
‘베르베 백작!’
그러나 베르베 백작의 움직임이 그런 문수르의 생각을, 모든 계획을 송두리째 뽑았다.
‘절대 네놈은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못한다!’
지금 당장 베르베 백작의 병력이 성 안으로 들어가면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베르베 백작은 전쟁을 느긋하게 즐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찌를 건 제대로 찌르고, 얻을 건 충분히 얻고 떠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동시에 문수르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베르베 백작의 병력이 빠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눈앞의 기가스는 더 이상 원조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기가스가 전투에 투입될 때 파일럿과 기가스만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지금처럼 다수의 기가스가 활동하는 경우에는 손상을 입은 기가스가 후방으로 빠져서 수리를 하거나, 파일럿이 교체된다.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파일럿은 전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기가스를 운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와이어 조작, 이 조작은 막대한 힘과 체력을 요구한다.
거기에 기가스 내부에서 싸운다는 것, 기가스의 움직임 자체만으로도 온몸에 충격이 온다. 에어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충격 흡수장치가 나름 마련되었지만 조잡하기 그지없다.
때문에 기가스의 경우 전투 중에 기가스는 무사한데 파일럿만 죽는 경우도 있다.
이런 기가스를 서포터하기 위해서는 일반 병력과 예비 파일럿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문수르와 전투 하던 베르베 백작가의 기가스들 중에서는 파일럿을 교체한 경우만 3번이 넘는다. 8대 중 3번이란 수치는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반대로 뒤집어 보자.
베르베 백작이 모든 병력을 이끌고 성으로 향했다. 지원은 없다.
“로이드, 지금 당장 강공으로 나서면?”
- 승률은 19.3퍼센트입니다.
“좋아, 이쯤 되면 도박도 해봐야지.”
문수르가 결단을 내렸다.
“출력 3.2배 급으로 올려.”
- 라저!
로이드가 MX시스템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드래곤 파이터의 출력이 3배 급에서 3.2배 급으로 급상승했다. 수치 상으로는 고작 0.2배 급이지만, 전투에선 무려 0.2배 급이란 표현을 써야한다.
더군다나 이제까지 3배 급 출력을 가진 기가스에 익숙해졌던 베르베 백작가의 파일럿들이다.
적기의 갑작스런 스펙업은 그들에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움직였다.
휘익!
예상보다 빠른 움직임!
1배 급 기가스가 방패를 드는 속도가 조금 늦었다. 때문에 제대로 공격을 막지 못했다.
카앙!
방패 위를 후려치는 드래곤 파이터의 창!
휘청!
방어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한 1배 급 기가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문수르가 와이어를 조작했다.
“돌진!”
외침과 함께 드래곤 파이터가 휘청이는 1배 급 기가스를 향해 몸통박치기를 달렸다.
기가스끼리의 전투에서 무기가 아닌 육탄전은 보기 힘들다. 공격하는 쪽도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수르는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이 전투를 끝으로 드래곤 파이터는 버려도 좋다.’
전장을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걸 위해서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무리한 공격, 그로 인한 피해…… 감수해야 한다.
문수르의 각오는 그의 전투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드래곤 파이터가 공격에 대해 공격으로 응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잡아!”
“기회다! 부딪쳐!”
베르베 백작가의 기가스스 파일럿들은 순간 출력이 상승한 드래곤 파이터에 놀랐지만 그들 역시 전장에서 나름 닳고 닳은 실력자들이었다. 드래곤 파이터의 전투 스타일의 변화를 모를 리 만무하다.
상대가 강공으로 나온다.
그럼 베르베 백작가의 파일럿들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여전히 그들의 머릿수는 여덟이다.
오히려 이제까지 치고 빠지는 식으로 시간만 끌었던 상대편이 알아서 덤벼 주는 꼴이다.
“기다렸던 바다!”
기가스 파일럿들, 그들 역시 몸을 던졌다. 1배 급 기가스들은 들어오는 드래곤 파이터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뛰어들었다. 물론 혼자서 덤벼들진 않았다. 그들은 뭉쳐 있었다. 2대씩 또는 3대씩.
2배 급 기가스들이 그 주변에서 대기했다.
이제까지는 이런 경우 드래곤 파이터는 물러났다. 한 놈을 잡으려다간 오히려 주변에 포위되는 형색이 되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드래곤 파이터는 덤벼드는 기가스를 향해 창을 내찔렀다. 말론이 심혈을 기울여 연마한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바람을 갈랐다.
쉬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1배 급 기가스는 그 창을 향해 방패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던졌다.
콰지직!
순식간이었다. 1배 급 기가스의 몸통을, 파일럿이 탄 가슴부를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뚫고 들어갔다.
“컥!”
당연히 파일럿는 그 자리에서 즉사.
그러나 파일럿은 그 전에 와이어를 조작했다. 아직 마나 동력은 유효한 상황이다.
끼릭끼릭!
1배 급 기가스가 제 가슴을 뚫은 드래곤 파이터의 창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창이 빠지지 않았다.
“잡았다!”
한 명의 희생!
그러나 가치 있는 희생이다. 상대는 창을 뽑지 못한다. 도망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 순간 드래곤 파이터가 전진했다. 기가스의 가슴에 창이 꽂은 채로 전면으로 돌진했다.
“어어!”
“너무 무식하잖아!”
그러나 이 순간에도 몇몇 파일럿들은 반응했다. 그들은 죽은 동료의 기가스의 뒤로 갔다. 그리고는 죽은 동료의 기가스를 막아섰다. 2대의 기가스가 달라붙었다.
그러자 드래곤 파이터의 전진이 멈췄다.
이 순간 2배 급 기가스들의 묵직한 검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전력을 담은 채 드래곤 파이터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래곤 파이터는…….
창을 놓았다.
창을 놓고, 동시에 살짝 주저앉았다.
끼릭끼릭!
드래곤 파이터의 하체에서 부품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드래곤 파이터가 땅을 박찼다.
콰광!
거친 굉음과 함께 드래곤 파이터의 몸뚱이가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있던 기가스를 뛰어넘었다.
“어?”
“뭐, 뭐야?”
기가스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점프력!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아니었다.
“이익!”
드래곤 파이터를 향했던 공격…… 그런데 드래곤 파이터가 사라졌다. 창을 버린 채로.
그렇다면?
“젠장, 멈춰!”
드래곤 파이터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던 1배 급 기가스들…… 2배 급 기가스들의 거대한 검이 향한 건 바로 자신들의 동료였다.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상대를 한 방에 무력화시키기 위해 2배 급 기가스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이었다. 멈추려고 하기 전에 와이어를 조작하던 파일럿의 근육이 찢어질 게 분명했다.
결국 멈출 수 없었다.
콰과과광!
기어코 2배 급 기가스들이 동료인 1배 급 기가스들의 몸뚱이를 제 검으로 후려쳤다.
“크헉!”
“으악!”
이미 드래곤 파이터의 창에 찔려 죽은 기가스를 떠밀고 있던 다른 두 기가스가 동료의 검에 희생양이 됐다.
한 대는 머리가 날아갔고, 다른 한 대는 왼팔이 날아감과 동시에 가슴부엔 안의 파일럿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큰 상처가 생겼다.
이 정도면 전력 외(外)다.
단숨에 1배 급 기가스 3대가 무력화가 된 것이다.
엄청난 소득이다.
“젠장, 이 짓도 할 짓이 못 되는군.”
- 왼쪽 다리 부분의 부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방금 전 도약으로 와이어 몇 개가 끊어졌습니다. 자체적인 수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문수르가 입은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무리한 움직임이었다.
‘솔직히 거기서 창을 잡을 줄이야.’
상대가 그렇게 창을 잡는 식으로 드래곤 파이터의 움직임을 막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밀고 갔다. 드래곤 파이터의 출력이라면 기가스 한 대쯤은 밀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뒤에 1배 급 기가스 2대가 붙으면서 밀리지도 않았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문수르가 모를 리 만무하다. 후방에서 날아오는 2배 급 기가스의 무시무시함 검격(劍擊)을!
그 순간 창을 포기했다.
도약으로…… 기가스를 뛰어넘고자 했다. 그때는 그저 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다.
“재수가 좋았어.”
그런데 공격을 회피한 건 둘째 치고, 단번에 2대의 기가스가 자멸한 꼴이 됐다.
‘남은 건 5대.’
2배 급 기가스 3대와 1배 급 기가스 2대.
상대편의 전력이 급감소했다.
하지만 문수르의 상황도 좋지 못했다.
- 드래곤 파이터의 기체 손상이 큽니다. 전투 시뮬레이션을 다시 시작합니다. 시뮬레이션 완료.
로이드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줬다.
- 승률은 5.5퍼센트입니다.
19퍼센트가 넘었던 승률이 갑자기 떨어졌다. 드래곤 파이터의 상황은 그 정도로 좋지 못했다.
3.2배 급 출력으로 올린 상황에서, 도약을 위해 출력을 갑작스럽게 높여버렸다.
3.6배 급 이상으로!
사실 드래곤 파이터는 3.6배 급 출력을 충분히 버틸 만한 기체다. 문제는 갑작스럽게 올렸다는 것, 바로 이 부분이다. 출력을 높이면서 생기는 부품 손상. 여기에 도약이란 무리한 행위 그리고 착지까지. 준비된 상황에서 성벽을 넘는 것과 긴박한 전투 중에 적인 기가스를 뛰어넘는 것, 이 두 가지는 같은 도약이지만 상황은 천지차이다.
무엇보다 지금 드래곤 파이터는 큰 실수 하나를 했다.
“사용 가능한 무기가?”
- 보조 무기는 탑재하지 않았습니다. 방패만 존재합니다. 창을 회수하시거나, 상대의 무기를 뺏으셔야 합니다.
창을 잃어버렸다.
무기를 잃었다는 건, 이건 문수르에게 굉장히 불리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베르베 백작가의 기사들이 모를 리 만무했다. 그들은 문수르가 버린 창을 빠르게 회수했다. 그리고는 제 무기로 창을 내리찍었다.
까앙!
창이 단숨에 반토막이 났다.
상대가 회수하기 전에 무기를 박살내는 것……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제 문수르는 창을 쓸 수도 없다. 원래 기가스들의 주요 무기는 창이 아니라 검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편의 무기를 빼앗는다고 해도, 결국 검일 수밖에 없다.
“로이드, 검술 좀 알아?”
- 알긴 합니다.
“다행이군.”
- 근데 책으로 배웠습니다.
“곁눈질로 배운 나보단 낫겠지.”
짧은 농담으로 긴장을 푼 문수르, 그러면서 드래곤 파이터를 조작했다. 드래곤 파이터의 등에 장착된 방패를 꺼냈다. 방패에는 드래곤 파이터란 이름에 맞게 거대한 용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어디 성벽에 걸어두면 참 멋있을 것 같다. 방패로 쓰기엔 아깝다.
그 방패를 앞세운 드래곤 파이터.
문수르는 순간 와이어에서 느껴지는 힘이 방금 전보다 훨씬 무겁고, 거칠다는 걸 느꼈다.
방패를 꺼내드는 과정도 매끄럽지 못했다. 사람이 몸 어딘가 쑤실 때 행동이 이상해지는 것처럼, 부품 손상과 조작에 사용되는 와이어에 이상이 생긴 드래곤 파이터의 움직임은 조금 어색했다.
지금이야 작은 어색함이다.
하지만 전투에서 이 작은 어색함은 승패를 가르는 결과물이 될 것이다.
‘좋아.’
그 순간 문수르가 무언가를 각오했다.
“전투는 빨리 끝낸다.”
무언가를 각오한 문수르.
- 주인님, 그건 잠시…….
문수르의 각오를 읽은 로이드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드래곤 파이터가 방패를 던졌다.
완전한 무방비!
“이렇게까지 밥상을 차려줬는데 엉덩이 무겁게 앉아있으면 사내새끼도 아니지!”
문수르, 그가 베르베 백작가의 기가스들을…….
“덤벼!”
도발했다.
============================ 작품 후기 ============================
날씨 진짜 춥네요. 얼어죽을 뻔했습니다.
내일은 더 춥다고 하네요. 도로도 빙판이고 설 연휴를 시작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몸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