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4.
베르베 백작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베르베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상대로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의 성벽을 두드리는 오크들의 함성소리 정도는 말이다.
베르베 백작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기가스 8대 전부 투입하도록.”
“예?”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살짝 놀랐다.
“지금 당장 8대 전부를 투입하는 건 위험하지 않습니까? 일단 최소한 탐색전은 치른 후에…….”
기가스는 강력한 병기다. 대부분의 전쟁에서 기가스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달리 말하면 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기가스는 강력하면서도 나름 섬세한 병기다. 그리고 제한 시간이 있는 병기이기도 하다. 마나 동력이 다 떨어지면 그저 무거운 짐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령까지 오는 와중에 동력을 적지 않게 소모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오는 길이 번듯하게 정비되어 있을 리 만무했고, 하물며 베르베 백작가의 병력들은 동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은밀한 루트를 찾아 이동했다.
말이 은밀한 루트지, 그냥 사람이 다니지 않아 들킬 리 없는 루트, 달리 말하면 험한 길이다.
그런 길에선 결국 기가스가 직접 두 다리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병사들이 옮기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 베르베 백작가가 보유한 8대의 기가스들은 대부분 마나 동력의 충전상태가 60퍼센트 수준이다. 만약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서 충전상태가 4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면 조금 문제가 생긴다.
‘4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을 경우, 70퍼센트 수준까지 충전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기가스 운행은 위험하다.’
기가스의 마나 동력 충전상태가 4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면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기가스를 운영하면, 충전된 마나 동력 소모 속도가 걷잡을 수 없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충전상태가 4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면 운행을 멈추고 마나 동력이 70퍼센트 근처까지 충전되길 기다린다.
만약 무리하게 운영을 하다가 10퍼센트 이하까지 떨어지게 되면 그 기가스는 마나 동력원을 교체해야 할 정도로 위험해진다.
베르베 백작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만무하다. 베르베 백작은 전술, 전략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적은 숫자의 기가스를 통해 적의 동세를 살핀 후 공략법을 찾는 게 최선이다.
“필요 없다.”
그러나 베르베 백작은 강수를 두었다.
“어차피 저들은 제대로 방어조차 못할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이끌고 단숨에 전쟁을 끝낸다.”
베르베 백작은 전쟁을 길게 끌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늦으면 엘프랑 드워프 놈들이 몰살 당하거나, 도망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베르베 백작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격하려는 이유가 뭐 때문인가?
엘프와 드워프 때문이다.
황금보다 더 비싼 놈들을 잡아 노예로 팔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을 몬스터들이 두드리고 있는 상황. 잘못했다가는 몬스터 놈들이 엘프와 드워프를 잡아다 죽일지도 모른다. 놈들에게는 노예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그저 약탈과 살인, 두 가지만 있을 뿐이다.
엘프와 드워프 시체는 돈이 안 된다.
살아있는 놈들만 돈이 된다.
‘이번 전쟁에서 엘프와 드워프를 합쳐 최소한 서른 마리 이상 잡지 않으면 손해다.’
이미 계산도 끝낸 상황이다.
최소 서른 마리다. 그 이상은 잡아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하지만 드워프와 엘프를 잡는 게 그리 쉬울 리 만무하다. 놈들이 숲으로 도망치면 정말 잡을 도리가 없다.
하물며 그들이 도망치게 될 숲이 어디인가?
테블스 산이다.
어설프게 테블스 산 안으로 들어가면 전멸이다. 제 아무리 베르베 백작에게 숨겨진 능력이 있다고 해도 테블스 산은 결코 허접한 산이 아니다. 지옥이나 다름없는 땅이다.
결국 이런저런 계산을 하면, 엘프와 드워프들이 고립된 지금이 적기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백작님 다시 한 번 재고를…….”
기사들은 그래도 다시 한 번 충언을 뱉었다.
사실 기사들의 충성심이 너무 깊다거나, 베르베 백작을 향한 마음이 너무 강해서 이렇게 계속 직언을 하는 건 아니었다.
‘젠장, 무리하게 전투를 치르다 죽으면 나만 손해잖아?’
결국 최전선에서 싸우는 건 그들이다. 기가스가 대단하다고 해도, 상대 쪽 역시 기가스를 보유한 상황.
기가스 대 기가스 전투에서 까딱 잘못했다가 재수 없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다.
기사들 입장에서는 최대한 안전한 방향으로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략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세 번 이상 말해야겠나?”
주군이 까라고 하는데.
“명을 받들겠습니다.”
까라면 까는 수밖에.
5.
8대의 기가스가 동시에 움직이는 광경은 나름 장관이었다. 거대한 거인병기가 발을 맞추어 이동할 때마다 땅이 울렸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움푹 파이고, 갈라졌다.
또한 동시에 이동하는 기가스의 육중한 동체들은 마치 성벽이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문수르도 보았다.
“생각만큼 강렬하진 않은데?”
문수르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이죽거리듯 말했다.
- 주인님의 심박 수는 충분히 강렬합니다만?
그런 문수르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가볍게 말꼬리를 낚아채는 로이드의 행동에 문수르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원래 좀 혈압이 높잖아.”
- 혈압 높아서 좋을 거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이제 혈압을 낮춰야겠지.”
- 빨리 끝내고 푹 쉬시지요.
“오냐.”
문수르가 와이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드래곤 파이터의 동체가 가라앉았았다.
무릎을 꿇을 것이다.
동시에 스프링처럼 무릎이 튀어 올랐다. 드래곤 파이터의 거대한 동체도 떠올랐다.
순식간이었다.
거대한 드래곤 파이터가 성벽을 뛰어넘었다. 기존의 기가스들은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광경.
“아니!”
“저, 저건 무슨 기가스지?”
당연히 이제르트 자작령을 향해 돌진하는 기가스 파일럿들은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비단 기가스 파일럿뿐만이 아니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전장을 보던 베르베 백작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저건 뭐야?”
7미터가 넘어가는 신장. 2배급 기가스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커보인다. 그뿐인가? 덩치는 보통 기가스 2대를 합친 것 같다. 그런 주제에 성벽을 뛰어넘었다.
이런 기가스는 듣도 보도 못했다.
아니, 비슷한 기가스가 있긴 하다.
페스로 제국의 3배 급 기가스 중 하나인 스타라인.
페스로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인, 신속(神速)의 기사 아델 후작의 기가스다.
이 세상 그 어떤 기가스보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기가스다. 얼마나 날렵한지 성벽을 한 번의 도약으로 넘길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기가스는 아델 후작의 스타라인이 결코 아니다. 스타라인의 동체는 기동력을 중시해 최대한 가볍게 제작되었고, 때문에 동체의 크기는 1배 급 기가스와 큰 차이가 없다고 했으니까.
“대체 뭐지?”
베르베 백작은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 순간 기사들의 직언이 떠올랐다.
탐색전을 펼치자는 말.
‘젠장.’
이제르트 자작가가 저런 기가스를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탐색전을 했을 것이다.
아니, 알았다면 전쟁 자체를 달리 접근했겠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기가스를 뒤로 무를 수도 없는 노릇. 더군다나 상대가 전장에 나온 이상 물러나는 것도 우습다. 물러난다고 상대 역시 같이 물러날 보장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기회다.
‘적은 혼자다.’
다른 기가스들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베르베 백작이 알기로 이제르트 자작가가 보유한 기가스는 최소 5대다. 전부 기준치에 미달하는 기가스이지만, 그 전력은 언제라도 전장에 투입될 수 있고, 투입되면 충분히 위협적이다.
‘몬스터를 막느라 바쁜 거겠지.’
아마도 그 기가스들은 지금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터.
그럼 오히려 적기다.
‘저 기가스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8대1의 싸움이다. 질 이유가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베르베 백작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만약 저 기가스를 내가 가질 수만 있다면, 앞으로 제국을 상대로도 협상을 벌일 수 있겠지.’
상황을 좋게 생각하니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다.
베르베 백작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전했다. 명령을 전달받은 기사들이 깃발을 통해 기가스 파일럿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강공!’
베르베 백작의 명령은 다름 아니라 강공이었다.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공격!
‘좋아.’
‘어차피 수적으로는 우리가 유리하지.’
전장에서 지휘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제 아무리 그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전쟁을 치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명령은 무조건 따른다. 그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건 더 이상 전쟁이 아니라, 재롱에 불과하다.
8대의 기가스가 동시에 움직였다.
쿵쿵!
천천히 움직이던 베르베 백작가의 기가스들이 가속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포위한다.’
다수가 소수를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 때였다.
콰앙!
“어헉!”
순식간이었다.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기가스를 한 대를 공격했다. 창에 담긴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쿠웅!
한 번의 충격, 그 충격만으로 장갑이 떨어져 나가고, 기가스는 충격이 붕 떴다.
그 거대하고, 무거운 몸뚱이를 가진 기가스가 하늘에 떠오른 것이다. 떠오른 기가스는 바닥에 추락했다. 추락한 기가스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충격으로 인해 부품의 일부에 손상이 간 것이다. 물론 쉽게 일어날 수 없을 뿐이지, 전투를 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공격이 전장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공격으로 기가스를 띄어?’
‘대체 파워가 어느 정도야?’
하지만 상대가 무섭다고 꽁무니를 말고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 더군다나 기체가 파괴된 건 아니다.
이 순간 2배 급 기가스가 움직였다. 그들은 삼각형의 꼭짓점 형태로 포지션을 취했다. 드래곤 파이터가 삼각형 안에 갇힌 꼴이 됐다.
그러나 그런 포지션은 아주 잠깐이었다.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단숨에 정면에 위치한 기가스를 후려쳤다. 이번 공격에는 쉽게 당하지 않았다. 2배 급 기가스 파일럿은 방패를 들어 창을 막았다.
꽈앙!
굉음이 터졌다.
방패가 찌그러졌다. 하지만 기체는 무사했다. 그것만으로도 방패는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
문제는 너무나 강력한 파워에 2배 급 기가스가 밀렸다는 사실이다.
포지션이 무너졌다. 드래곤 파이터가 무너진 포지션 틈새를 뚫고 나왔다. 1배 급 기가스들이 그런 드래곤 파이터들을 붙잡기 위해 앞을 가로 막았다. 2배 급 기가스들이 다지 포지션을 취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크게 반월을 그리며 움직였다.
드래곤 파이터의 앞을 가로 막은 1배 급 기가스들이 동시에 방패를 들었다.
그와 함께 드래곤 파이터 후방에 있던 2배 급 기가스 2대가 드래곤 파이터의 후면을 향해 검을 날렸다.
드래곤 파이터의 공격이 방패에 막힌다면, 2배 급 기가스의 검이 드래곤 파이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터!
그때였다.
휘익!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갑작스런 상황에 기가스 파일럿 전부가 놀랐다.
반면 드래곤 파이터의 파일럿, 문수르는 미소를 지으며 와이어를 잡아 당겼다.
“기가스라고 허초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
누가 봐도 방어를 위해 최대한 자세를 웅크린 기가스. 그런 기가스를 굳이 공격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문수르는 로이드를 통해 후방에 날아오는 공격을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단한 가드를 때리는 걸로 공격 기회를 날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문수르는 허공을 벰과 동시에 드래곤 파이터를 한 바퀴 회전시켰다.
반월을 그리던 창이 만월을 그렸다.
카앙!
이윽고 창이 드래곤 파이터의 후방을 노리던 기가스의 몸통을 정확히 가격했다.
드래곤 파이터의 파워에 원심력까지 더해진 공격이었다.
공격에 맞은 2배 급 기가스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었다.
하지만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드래곤 파이터의 후방을 공격한 기가스는 2대다.
아직 1대가 남아있다.
“죽어라!”
공격기회를 잡은 2배 급 기가스가 검을 내리 찍듯 휘둘렀다. 목표는 드래곤 파이터의 왼쪽 어깨 장갑!
피할 순 없다.
막을 수도 없다.
이윽고 2배 급 기가스의 검이 드래곤 파이터의 어깨를 후려쳤다.
츠그그!
그 순간 드래곤 파이터의 어깨가 기울어졌다. 그러자 드래곤 파이터의 어깨를 내려친 기가스의 검 역시 기울어진 어깨에 미끄러졌다. 드래곤 파이터의 어깨 장갑의 도색이 긁혀나갔다.
그뿐이었다.
도색이 긁혀나갔을 뿐, 장갑 자체의 파손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무슨!”
검을 흘린다는 개념…… 기사들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가스를 이용해 그런 능력을 보여주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기가스는 사람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문수르는 해냈다.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과 조작 능력. 그리고 그런 문수르의 능력을 120퍼센트 소화해준 드래곤 파이터의 성능 덕분이었다.
한 번의 공격 기회를 날린 2배 급 기가스, 당연히 다음 공격 기회권은 드래곤 파이터의 것이었다.
문수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바로 와이어를 조작하고, 잡아당겼다.
그러자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2배 급 기가스를 향해 날아갔다.
카앙!
훗날 전설로 남게 될 전투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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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얼마 안 남았네요.
내일부터는 온도가 팍팍 떨어진다고 하네요.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