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37화. 폭풍>
1.
베르베 백작의 병력이 성 너머에 진을 쳤다.
8대의 기가스, 그중 2배 급 기가스가 3대, 1배 급 기가스가 5대였다. 이끌고 온 병력은 기가스 파일럿을 포함해 14명의 기사와 5백 명의 사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전포고 따위는 없었다.
협상도 없었다.
각자의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전쟁이 아닌, 말로 상황을 풀어갈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선공은…… 테블스 산의 오크들이 먼저 취했다.
2.
오크들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바뀐 건 베르베 백작의 병력이 성 앞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1만 마리?”
무려 1만 마리의 오크들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무리 중에는 자이언트 트롤은 물론 오우거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우거? 맙소사.”
문수르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우거라니? 이제까지 오크 놈들이 자이언트 트롤을 전쟁에 이용한 경우는 많았지만, 오우거를 이용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오우거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표현이었다. 오우거가 어떤 몬스터인가? 최상위 포식자다. 본능에 충실한 오크들은 오우거의 오줌 냄새만 맡아도 기절한다.
그런 오우거를 오크들이 무기로 이용한다?
자이언트 트롤과 오우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우거는 결코 무언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가 다룰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 종(從)이 되지 않는 생명체, 그게 오우거였다.
그런 오우거가 오크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당장 오크들의 목을 뽑아 사탕마냥 씹어 먹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 오우거가 오크들과 발을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오우거의 숫자가 5마리였다.
“흑마법사!”
문수르는 이를 물었다.
이쯤 되면 문수르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젠장.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빅토리안 공작은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테블스 산은 흑마법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피처다.
문수르가 확실히 흑마법 하나를 해치우긴 했지만 그 흑마법사를 제외해도 분명 더 많은 흑마법사가 있었다.
흑마법사들은 나름 서로 연결된 커뮤니티가 있다. 그렇다면 빅토리안 공작이 테블스 산의 흑마법사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만 마리의 오크, 자이언트 트롤, 5마리의 오우거…….”
문수르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렸다.
“막을 순 있다.”
테블스 산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 엄청난 숫자이긴 하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그 병력을 막아낼 힘이 충분히 있었다. 아이언히트와 1배 급 기가스, 7개의 기가스가 투입되면 충분히 싸울 만하다.
문제는 뒤다.
“베르베 백작의 병력.”
베르베 백작은 알고 있다. 이 몬스터 무리들의 습격을. 그가 의도한 습격일 테니까.
그렇다면 노릴 것이다.
오크 무리들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두드리는 사이, 자신 역시 병력을 움직여 이제르트 자작령을 두드릴 것이다.
“으윽……!”
문수르는 쓰려오는 속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지금 속 쓰림 따위에 결단을 미룰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문수르는 확실하게 결단을 해야 했다.
“병력을 둘로 나눠야 해.”
이제 어쩔 수 없다.
좋든 싫든, 한 곳에 올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병력을 둘로 나누어서 싸워야 한다.
“메가히트와 나머지.”
그리고 지금 최선의 방법은 메가히트 따로, 나머지 병력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 외에는 답이 없다.
기가스와의 싸움에서 어설프게 일반 보병을 추가해봤자 무의미하다. 2배급 기가스의 싸움에 0.6배급 기가스인 아이언히트를 한대 더 추가하는 것도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쯤 되면 답이 나온다.
“내가 혼자 베르베 백작의 병력을 막아야 하는 건가?”
- 무리입니다.
그 순간 로이드가 태클을 걸었다.
“무리? 벌써 시뮬레이션이 나왔어?”
- 적의 병력과 현재 메가히트의 능력치 그리고 주인님의 능력치를 고려해 1,392번의 전투 시뮬레이션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 약 7.32퍼센트의 승률이 나왔습니다.
“7퍼센트?”
- 정확히는 7.32퍼센트입니다.
“그거나 저거나.”
굉장히 낮은 수치다. 100번 싸우면 7번 이긴다는 소리 아닌가? 1천 번 싸우면 73번 간신히 승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가능은 아니다.’
그러나 문수르는 오히려 로이드의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아주 참담한 수치는 아니다.
‘그래, 로또 당첨자도 매주 대여섯 명씩 나오는데.’
오히려 생각보다 이길 확률이 제법 됐다. 확률이 높은 건 메가히트가 가지는 특이성, 그 특이성에서 나오는 변수 때문이겠지. 만약 반대로 메가히트가 오크를 막고, 오크를 막아야 할 병력을 베르베 백작의 병력과 대치시킨다면 결과는 더 참혹할 것이다.
문수르가 나서야 한다.
‘피할 순 없다.’
확률이 낮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질 것 같다고 해서 물러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상대는 무법자다. 협상은 없다. 타협도 없다.’
죽음조차 각오해야 하는 상황.
“패배는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도 찾아온다. 그러나 승리는 도전하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문수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재미난 명언이군요. 그러나 제 정보에는 그런 명언을 한 사람이 검색되지 않는군요. 누가 한 말입니까?
“레드폴.”
- 처음 듣는 위인이군요. 어떤 사람인가요?
“대단한 사람이었지. 백기의 기사단을 데리고 1만 명의 병사들을 막아세운 위대한 기사니까.”
- 그런 전쟁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씨익.
문수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 소설 속에서.”
3.
메가히트.
7미터가 넘어가는 신장. 2배 급 기가스들보다 머리 2개는 더 크다. 어깨 넓이 역시 기존 1배 급 기가스의 2배 수준이다. 그 크기가 1배급 기가스 두 대를 합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거대한 동체.
사실 기가스의 덩치를 크게 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무게와 밸런스.
기가스는 장식품이 아니다. 전투병기다. 전장에서 그 어떤 병기보다 격렬하게 싸운다. 무겁기만 하고 느리기만 하면, 전장에선 그저 무거운 쓰레기에 불과하다.
무겁더라도 빨라야 한다.
무겁더라도 단단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빨라지기 위해 가벼워져야 한다.
이 모든 걸 위해선 보다 강력한 마나 동력이 필요하다. 보다 강력한 마나 동력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고품질의 라인이 필요하고, 이 모든 걸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와이어가 필요하다.
기가스는 케르빈 월드의 모든 기술과 마법이 집약된 작품이다.
그리고 메가히트는 그런 케르빈 월드의 기술을 단숨에 구시대의 기술로 만들어버린 악마의 기가스다.
“이렇게 보니 감탄이 나오는군.”
덩치는 1배 급 기가스의 2배 수준. 그러나 기체의 무게는 1배 급 기가스와 똑같다.
아르늄 합금 덕분이다. 강철보다 단단하지만 강철보다 가벼운 아르늄 합금이 있었기에 이런 거대한 동체를 만들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거대한 동체, 자체는 그 정상에 위치한 마나 동력원에 비하면 가소로울 지경이다.
“멋있군.”
기사가 투구를 쓴 것처럼, 마나 동력원을 보호하기 위해 씌운 투구. 말론이 가장 정성을 들인 투구였다.
“역시 기가스의 꽃은 투구지. 기가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투구만큼은 병기가 아니라, 예술이지.”
투구 정면에 솟아오른 3개의 뿔. 그리고 투구 전체를 휘감듯 조각된 드래곤.
말론이 직접 밤을 새우며 일일이 손으로 조각한, 말 그대로 드워프의 예술작품이었다.
저 투구 안에 MX시스템이 있다.
케르빈 월드의 기술력으로는 그 방법을 알아도 결코 만들 수 없는 한석균의 역작이다.
“이건 이제르트 자작가의 수호신이다.”
두말할 것도 없다.
기체 타입, 메가히트.
기체명(機體名)은 말론이 지어진 드래곤 파이터.
“드래곤 파이터, 이제 정말 네가 이제르트 자작가를 지킬 차례다.”
문수르는 각오를 다시금 다졌다. 앞으로의 전쟁을 앞두고, 자신의 마음 속의 비수를 가다듬었다.
- 주인님.
“응?”
그 순간 로이드가 끼어들었다.
- 드래곤 파이터는 좀 유치하지 않습니까? 작명센스가 솔직히 너무 유치한 것 같은데…….
“뭐가? 난 괜찮기만 한데.”
- 의외로 주인님도 센스가 떨어지셨군요. 하긴 그러니까 책이 안 팔린 거겠죠.
“응? 야! 왜 지금 그 이야기가 나와? 책이 안 팔린 거하고 내 센스하고 무슨 상관인데?”
- 뭐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이 자식이! 최근 잠잠하다 했는데 너 요즘 많이 개기는 것 같다? 내가 만만해 보이냐?”
- 뭐 사실 툭 까놓도 이야기해서 주인님을 상대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닙니다.
“뭐?”
문수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꼭 이렇게 중요한 분위기에 이렇게 초를 쳐야만하다.
‘짜식.’
그러나 문수르가 로이드의 의중을 모를 리 만무했다. 로이드가 갑작스레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하나다.
‘그래, 분명 이제르트 자작가의 모든 게 걸린 전장이지만…… 그렇다고 긴장만 할 수는 없지.’
문수르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적당한 긴장은 필요하지만, 너무 긴장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몸이 굳으니까.
- 그냥 정말 네이밍 센스가 구려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수르의 생각을 읽은 로이드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톡 쏘았다.
문수르가 이죽거렸다.
“로이도, 언젠가 네놈을 때려줄 날이 오겠지.”
-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수르는 천천히 드래곤 파이터에 탑승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드래곤 파이터의 또 다른 장점, 그건 바로 외부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탑승 및 출격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기가스가 가지지 못했던 편의성마저 추가된 것이다.
때문에 문수르는 주변 도움 없이, 홀로 금방 드래곤 파이터 안에 탑승할 수 있었다.
드래곤 파이터의 가슴에 마련된 조종실, 이 조종실에도 파일럿을 위한 많은 배려가 숨겨져 있다.
특히 드래곤 파이터는 그 누구도 아닌 문수르를 위해 만든 기가스였다. 문수르만이 탑승할 수 있도록 제약도 걸어두었다.
- 암호 코드 해제. MX시스템 가동 시작. 기체 상태 테스트 시작. 파일럿에게 권한 양도.
로이드가 아니면, 드래곤 파이터는 움직이지도 않는다.
혹시 모를 상황.
메가히트가, 드래곤 파이터가 적에게 넘어갔을 때를 대비해 마련한 시스템이었다.
“3배 급이라서 그런가…… 동체의 무게는 1배 급 기가스랑 똑같은데, 와이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다르군.”
문수르는 기체의 동체를 조종하게 해줄 와이어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느껴지는 반발력이 상당했다. 보통 기가스가 오래 되어 동체 곳곳이 녹 쓸거나, 무리한 업그레이드를 통해 마나 동력 이상의 동체를 가지게 되면 와이어가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드래곤 파이터에서 느껴지는 무거움은 그런 종류의 무거움이 아니었다.
주먹을 쥐는데 너무 힘을 넘칠 때의 무거움!
이대로 주먹을 쥐면 내 주먹이 부셔질 것만 같은 무거움!
“재미있군.”
힘이 넘친다.
아니, 힘이 폭발할 것 같다.
문수르는 이 강력한 힘을 전장에서 폭발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이상 전장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즐거움이 생겼다.
몸이 저절로 흥분됐다.
- 시스템 동기화 완료.
그 순간 문수르의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로이드가 GPS시스템을 이용해 보여주는 광경, 마치 세상 전체를 하늘 위에서 아우르는 듯한 광경!
“오케이.”
문수르가 움직였다.
전쟁이 시작됐다.
============================ 작품 후기 ============================
눈이 많이 왔는데, 또 눈이 온다고 하는군요.
아침에 날씨는 포근했는데, 밤 날씨는 추습니다.
빙판길이 될 것 같네요.
모두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