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4.
가누스의 검은 빠르다. 이 세상 그 어떤 검보다 빠르다. 적어도 문수르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속(神速)이다.’
쾌검(快劍).
솔직히 문수르는 쾌검을 가볍게 봤다. 소설을 쓸 때도 그랬다. 소설 속에는 언제나 쾌검을 다루는 캐릭터가 나오고는 했다. 쾌검을 쓰는 캐릭터, 그런 캐릭터는 등장은 화려하지만 언제나 좋지 못한 꼬리표가 붙는다.
‘겉만 그럴싸하고 알맹이는 없는 검.’
문수르는 이 순간 저도 모르게 자신이 소설에서 쾌검에 대해 썼던 구절을 떠올렸다.
‘그럴싸한 모양으로 사람을 해할 수 있었다면, 사람은 검이 아니라 보석을 흉기로 썼다.’
그 다음 구절도 떠올랐다.
‘내가 미쳤지.’
그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었다.
문수르는 은연중에 쾌검이란 놈을 우습게 봤다. 아니, 애초에 검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쾌검이 무엇이고, 중검이고 무엇이고…… 그럴싸한 표현으로 대충 포장만 할 뿐, 진짜 검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무섭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진짜 쾌검을 맛보는 중이다.
그것도 그냥 맛보는 게 아니다.
“웃음이 나오나보군. 검이 눈에 적응하는 것 같나?”
검을 피하면서 미소를 짓는 문수르의 행동에 가누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그의 검이 더 빨라졌다. 어느 순간 문수르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걸 느꼈다.
‘이게 진짜 쾌검인가?’
이제까지 가누스의 검은 빠르긴 빨랐을 때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너무 빠른 탓에 궤로가 정직했다. 처음 시작점만 파악하면, 검의 궤로를 예측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부분은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가누스의 검은 여전히 정직하다. 궤로를 예측하는 건 일도 아니다.
쉬익, 쉬익!
그런데 피하는 건 점차 어려워졌다.
단순히 빨라져서?
아니다.
‘내 움직임이 못 따라간다.’
단순히 빨라진 게 아니라, 문수르의 몸이 반응할 수 있는 속도 이상으로 빨라진 것이다.
우연이 아니다. 가누스는 일부러 문수르의 움직임을 상회하는 속도만큼만 검을 휘두르고 있다.
알려주기 위해서다.
‘피할 수 없다.’
진짜 제대로 된 쾌검은 보고 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막는 수밖에.’
방어 밖에 없다.
‘어떻게?’
그러나 지금 문수르의 수중에는 창이 없다. 지금 문수르는 공수공권, 말 그대로 맨손에 맨주먹이다. 제 아무리 살덩이에 오러를 두른다고 해도 이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가누스의 검과 부딪치면 작살이 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잠시 가누스에게 양해를 구할까? 이제부터는 피하는 게 힘들어서, 창을 가져와서 막아야 할 것 같은데, 창 좀 가지러 가게 좀 놔주시겠습니까? 이런 말이라고 할까?
‘전투에서 변명은 필요없다.’
웃기는 소리다. 가누스는 시작부터 말했다. 그런 구질구질한 변명 따윌 하고 싶으면 그냥 전쟁에 뛰어들지 말라고.
그 순간 문수르의 머릿속에 소설에서 자주 써먹던 케케묵은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소설에서 너무 자주 써먹어서 이제는 유치해 보이는 내용. 그러나 지금 문수르에게는 금과옥조 같은 진리였다.
‘상대방의 공격은 빠르다. 그래서 너무 반듯하다.’
궤적이 저절로 예측될 정도로 빠른 공격이다. 보다 빨라지기 위해 최단거리로 날아온다.
예측되는 공격 그리고 상체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
그럼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은?
‘카운터.’
아이어의 장기였던 카운터. 지금 문수르는 아이어가 되어야 한다. 아이어의 그것처럼 목숨을 거는 거다.
나도 죽는다.
대신에 너도 죽는다!
문수르가 주먹을 쥐었다. 쥔 주먹에는 그 의지가 깃들었다. 각오가 어린 문수르의 기세는 보통 기사들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호오.”
반쪽짜리라고 해도 문수르는 오러 마스터다. 그가 가진 오러의 양 그리고 오러의 질은 보통의 오러 나이트들과는 비교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오러는 곧 힘이다.
제 아무리 주먹질이 주요 장기가 아니더라도 문수르의 오러가 잔뜩 실린 주먹은 날카로운 보검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무기다.
가누스의 공격이 멈췄다.
그 역시 오러 마스터, 문수르가 쥔 주먹에 담긴 각오가 얼마나 결연한 것일지 모를 리 만무하다.
“이제야 좀 상황을 볼 줄 아는군.”
문수르의 대처법.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싸움에는 정답 따위는 없다. 승리했을 때의 방법이 다음 싸움에서 유효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전투라고 해서 똑같은 방법을 쓴다고 해도 승패가 뒤바뀌는 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래도 합격점 정도는 줄 수 있겠지.
그정도다.
“이제 간신히 해볼 수준이 됐군.”
그렇다고 가누스는 지금 이 상황에서 문수르와의 싸움을 끝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럼 진짜로 시작해볼까?”
진짜 제대로 된 교육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5.
조잡하게 세워진 막사 안.
“하악, 하악.”
발가벗은 여자 위로 사내 한 명이 올라타 있었다. 사내는 여자의 음부를 제 양물로 미친 듯이 쑤셨다. 여성의 음부는 이미 찢어져 핏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 쾌락을 위해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으아악!”
이윽고 사내가 오르가즘에 도달한 신음 소리와 함께 사정했다. 그 순간 누군가 사내의 어깨를 잡았다.
“야이 새끼야 쌌으면 나와.”
“젠장 이제 처음이라고! 난 한 번 싸야지 시작이야.”
“지랄하고 있네, 지금 네 놈 뒤에 있는 줄은 보이지도 않냐? 한 번 쌌으면 됐지.”
몇 마디 대화에 사내는 풀이 죽은 듯 덜렁거리는 아랫도리를 내놓은 채 천막을 빠져나왔다.
“아, 진짜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계집은커녕 사람 하나 보기가 이렇게 힘드니.”
그런 사내의 말을 뒤로한 채 천막 안에서는 다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인은 이미 실성한 듯 눈빛이 맛이 간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내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인형이 되어버린 여인을 마구잡이로 겁탈하고 있었다.
이 잔혹한 광경의 범인들은 다름 아니라 베르베 백작의 병사들이었다.
“최악이군.”
아젠트 리우.
베르베 백작을 섬기는 기사이자, 기가스 파일럿이기도 한 그는 베르베 백작이 없는 지금 병사들을 총괄하는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지금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설마 우리들이 이동하는 걸 알고 있었을 줄이야. 젠장,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가기라도 한 건가?”
불스 백작령으로 향하던 병력을 이제르트 자작령 쪽으로 바꾸었을 때, 아젠트는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불스 백작을 상대하는 것보다 이제르트 자작을 상대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
또한 그는 직감했다.
이제르트 자작령과의 전쟁은 명분 없는 전쟁이다. 당연히 베르베 백작가의 병력은 무법자가 되는 것이다.
베르베 백작 휘하에는 성질이 사나운 이들이 많다. 베르베 백작은 원래 그렇게 까지 영향력이 큰 귀족은 아니었다. 빅토리안 공작의 눈에 든 이후로 빠르게 세력을 넓힌 귀족이다. 그 과정에서 베르베 백작은 능력만 있으면 무조건 등용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다지 인지도가 없던 베르베 백작 밑으로 실력과 매너, 두 가지를 전부 겸비한 모범적인 기사가 모일 리 만무했다. 대부분 실력만 있고, 성격에는 모난 부분이 많아서 다른 영주들이 기사로 삼기를 꺼리는 자들이 모였다.
베르베 백작은 그런 그들에게 쾌락을 선사함으로써 그들을 휘어잡았다.
여자가 필요하면 여자를 주었고, 노예가 필요하면 노예를 줬다. 가끔은 노예들을 데리고 쇼를 보여주며 기사들과 병사들을 달래고, 아우르곤 했다.
하지만 인간이란 어떤 쾌락에도 익숙해지는 동물이다. 더 강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이제르트 자작령을 향한 걸음은 그 쾌락을 위한 걸음이었다.
‘약탈, 방화, 강간.’
아젠트는 기대했다.
마음껏 약탈하고, 마음껏 방화하고, 살인도 마음껏 저지르며, 마음껏 강간할 수 있을 거라고.
이제까지는 베르베 백작의 명성을 위해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지만,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그들은 무법자가 될 테니까, 약탈이고, 방화고, 강간이고 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제트르 자작령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건 허허벌탄에 이미 다른 누군가 불을 질렀는지 모든 건물들을 무너져 있었다. 약탈할 것도, 방화할 것도 없었다.
가끔 여자를 발견하면 납치해 강간을 했지만, 그 숫자는 정말 극히 드물었다. 여자 한 명을 납치하면 거기에 사내 수백여 명이 달려들 정도였다.
“빌어먹을.”
한껏 기대했던 아젠트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아젠트에게는 또 다른 역할이 있었다.
병력을 총괄하는 것!
아젠트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대놓고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에선 약탈과 방화, 강간 모든 게 허락된다. 전쟁에서 승리만 해라! 그러면 지휘관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
처음 그 말은 약빨이 제대로 먹혔다.
갑작스런 진로 변경에도 병사들은 조금의 불만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은 불스 백작령을 향할 때보다 훨씬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막상 이제르트 자작령에 들어오니, 약탈이고 방화고 나발이고 먹을 것조차 없다.
병사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건 당연했다.
“젠장, 전쟁이 코앞인데 이런 풀죽을 먹고 뭘 하라는 거야?”
“싸우기도 전에 굶어 죽을 판이군.”
사기 외에도 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식량 보급에 대한 문제였다.
전쟁에서 물자를 보급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베르베 백작은 물자 보급 루트를 확실하게 갖춘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 보급 루트가 향하는 방향이 불스 백작령이라는 것. 이제르트 자작령 쪽으로 병력을 이동하면서, 보급 루트를 확보하지 못했다.
사실 처음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약탈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면 새로운 보급 루트가 확보되어 보급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가는 베르베 백작의 군대가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 아닌가?
당연히 그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충분히 약탈을 해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보가 누출된 게 분명해.’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가는 베르베 백작의 병력이 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도 갖추었다. 심지어 집마저 불태웠다. 이건 베르베 백작의 병력이 온다는 확신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젠장.”
여기서 아젠트의 고민이 시작됐다.
만약 이제르트 자작가가 베르베 백작의 병력 이동을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불스 백작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불스 백작의 병력이 이제르트 자작을 돕기 위해 움직인다면?
전투 도중 후방에서 갑자기 불스 백작의 병력이 덮친다면?
아젠트는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서 불스 백작가에 대한 경계 및 감시를 위해 병력을 따로 차출해야만 했다.
‘그보다 백작님은 대체 어디에?’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
그건 다름 아니라 베르베 백작의 부재였다. 아젠트가 제 아무리 병력의 총괄자라고 해도, 베르베 백작이 명령을 내릴 때와 아젠트가 명령을 내릴 때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더군다나 베르베 백작은 카리스마가 있다. 보통 귀족들은 그를 그저 살만 뒤룩뒤룩 찐 돼지 정도로 여기겠지만, 베르베 백작의 병사들 중에서 베르베 백작을 우습게 보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오히려 베르베 백작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을까, 벌벌 떨 정도다.
베르베 백작은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자에게는 그 이상의 대가를 약속하지만, 반대로 자신에게 대드는 자에게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자였다.
지금 사기가 떨어지고, 보급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베르베 백작의 공백까지 겹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진격을 해야 할지, 아니면 적당한 곳에 진을 치고 보급이 갖추어지길 기다려야 할 지…… 아젠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면, 나중에 그 책임을 어떻게 진단 말인가?
그런 아젠트에게 희소식이 왔다.
“아젠트 경.”
“무슨 일입니까?”
“베르베 백작님이 돌아오셨소.”
가장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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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엄청나게 오는군요.
금요일은 비가 오고, 월요일은 눈이 오고, 날씨가 참 변덕입니다.
빙판길 조심하세요.
그리고 앱으로 다신 리플의 경우에는 제가 볼 수는 있는데, 리플 수치가 표시는 안 되더군요. 혹시나 해서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