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3.
베르베 백작의 병력의 움직임이 느릿해졌다. 그들이 이제르트 자작령에 돌입한 것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건 약탈이었다. 애초에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베르베 백작의 병력들은 정도와 도리를 무장한 정규군이 아니라, 무법이란 이름의 옷을 휘감은 강도들이었다.
문수르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문수르는 진즉에 성 밖의 영지민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었다. 농지 역시 전부 갈아엎었다. 모든 작물을 진즉에 수확하거나, 수확이 불가능한 것들은 불태웠다. 건물도 다 부셨다.
“모 아니면 도.”
죽기 아니면 살기.
단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또한 세상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외로운 전쟁이기도 했다. 명분이 없음에도 전쟁을 한다는 건, 왕이 용납한 전쟁이란 의미니까. 왕이 용납한 전쟁에 끼어들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가진 귀족은 콩탄 왕국에 빅토리안 공작, 그밖에 없었다. 지금 그런 빅토리안 공작에게 기댈 수는 없는 상황 아닌가?
“장기전도 염두에 두어야지.”
때문에 문수르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했다. 장기전도 당연히 고려했다. 때문에 어떻게든 베르베 백작가의 병력에게 조금의 이익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때.
“성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남았지?”
- 98시간 남았습니다.
“며칠 안 남았군.”
운 좋게도 메가히트는 예상보다 일찍 완성됐다. 이제르트 팩토리의 모든 인력이 메가히트 제조에 투입되니, 생각보다 결과가 빨리 나왔다. 가장 큰 짐은 하나 덜어낸 것이다.
‘이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나 자신인가?’
메가히트는 훌륭하게 완성됐다.
본래 설계도만큼의 전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케르빈 월드에서 최고로 강력한 기가스라고 불리는 제국의 3배 급 기가스와 싸워도 결코 밀리지 않을 기가스였다.
메가히트는 전장에서 제 몫을 충분히 할 것이다.
만약 그럼에도 메가히트에 졸전을 치른다면 그건 그 누구도 아닌 메가히트의 파일럿이 될 문수르의 무능함 때문이겠지.
“로이드, 너만 믿는다.”
메가히트에 타는 건 무조건 문수르다.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로이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문수르 뿐이니까.
- 너무 기대하진 마십시오.
로이드가 앓는 소리를 뱉었다.
- 그보다 테블스 산의 오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빌어먹을 오크 놈들.”
그러나 상황을 이제르트 자작령에 시시각각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베르베 백작의 병력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또 다시 테블스 산의 오크들이 설치고 있다.
봄이 되니까 아주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다.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또 다시 이제르트 자작령을 노리는 걸 보면 말이다.
‘만약 오크들이 공격을 시도할 무렵에 베르베 백작과의 전쟁을 치르게 되면…….’
오크의 등장.
뭐가 됐든 최악이다. 오크와 먼저 싸우든, 오크와 나중에 싸우둔 이제르트 자작가에 좋을 건 하나 없다.
하지만 정말 최악 중의 최악을 꼽으라면 오크와 동시에 싸우는 거겠지. 오크가 공격하는 순간 베르베 백작의 병력도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격하는 경우!
‘끔찍하군.’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도무지 방법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경우가 발생되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맞설 도리가 없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문수르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다. 이제르트 자작과 이리아 이제르트, 그 둘을 데리고 이제르트 자작령을 버린 채 도망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영주가 영지를 버린다는 것.
끔찍한 일이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이제르트 자작 스스로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혹여 이제르트 자작이 모든 걸 포기하게 된다면…… 한석균은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지도 모른다.
케르빈 월드의 파멸!
엄청난 마법 또는 엄청난 어스 월드의 무기를 이용해, 이제르트 자작가를 몰락시킨 모든 것을 파괴하겠지.
‘그건 피해야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런 세상이 오는 건 문수르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한다.’
결국 이 세상의 미래가, 케르빈 월드의 미래가 문수르의 손에 달린 셈이다. 참으로 우습게도 케르빈 월드의 사람이 아닌 문수르의 손에 말이다.
“후우.”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상황이 펼쳐질 줄은 몰랐다. 숨이 막혀온다. 제 아무리 어스 월드에서 많은 훈련과 각오를 다졌다고 해도 결국 문수르도 사람은 사람이다. 그는 결코 신이 아니다.
“미치겠군.”
다시금 속이 쓰려왔다.
“전쟁이 걱정되나?”
그런 문수르를 찾아온 사람.
“가누스? 여긴 무슨 일입니까?”
탈라트 부족의 오러 마스터, 가누스의 등장. 그의 등장이 문수르는 의외였다.
가누스는 이미 사전에 이제르트 자작과 합의를 했다. 전쟁에 참가는 하겠으나,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엘프 부족을 데리고 테블스 산으로 숨어들어가겠다고.
탈라트 부족은 이제르트 자작과 운명은 공유해도, 멸망을 공유할 생각은 없었다. 비단 탈라트 부족만이 아니었다. 호우투 부족 역시 비슷한 의견을 표시했다.
문수르는 그런 두 부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매몰차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테블스 산이 뭐 좋은 곳이라고.’
이제르트 자작령은 그들에게 굉장히 우호적이고 동시에 매우 안전한 땅이었다.
그런 땅을 버리고 테블스 산이란 지옥 아닌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건 보통 각오로 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한다는 건, 종족을 지키기 위해서겠지. 그런 그들을 옹졸하다, 비겁하다, 매몰차다 할 수는 없었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가누스는 현재 이제르트 자작령 내에 거주 중인 엘프들 중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엘프들을 미리 대피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런 그가 문수르를 찾아올 이유는 없다.
또한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가누스는 문수르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엘프였다.
“문수르, 너를 보러 왔다.”
“뭐, 저를 보러 오신 거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저를 보러 오신 겁니까?”
“전쟁 때문에 긴장할 것이라 생각됐으니까.”
“하하, 위로라도 해주려고 오셨습니까?”
가누스의 위로.
문수르는 그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솔직히 가누스와 위로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니까.
“말로 위로하는 방법은 모른다.”
그 순간 가누스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꺼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짓인지는 잘 알고 있지.”
왜일까?
왜 가누스는 지금 갑작스레 검을 뽑아든 것일까?
문수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누스를 노려봤다. 그의 기세를,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러를 살펴봤다.
‘진짜다.’
허세가 아니다. 가누스의 온몸에서는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흘러나온 오러는 가누스의 의지에 따라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절제된 그리고 완벽하게 통솔된 오러다. 전투를 각오한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광경이다.
“지금 싸울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싸울 때가 아니다? 그럼 언제 싸우려는 거지? 내일? 모레? 그 다음 날?”
가누스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전쟁은 시작인가 끝인가? 전쟁은 언제 끝나지? 끝나는 시점은 누가 정하는 거지? 나? 아니면 적인가?”
모르겠다.
왜 가누스가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지, 문수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가누스가 헛소리를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또한 말이 많은 사내 역시 아니다. 그는 할 말만 하고, 그 후에는 말을 아끼는 타입이다.
지금이라고 다를 건 없다. 최근 가누스가 머리를 둔기 따위로 맞은 것도 아니고, 그는 변한 게 없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말하는 건 헛소리가 아니다. 지금 꼭 해야 할 말이라는 거다.
“글쎄요…… 전쟁이 끝나는 날이 언제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 생각을 말하자면 전쟁은 끝나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추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은?”
“전쟁이 멈춘 상황이겠군요.”
“전쟁이 멈췄을 땐 뭐를 하지?”
“다음 전쟁을 준비해야겠지요.”
“그래서 지금 문수르, 너는 뭘 하고 있지? 다음 전쟁을 준비하고 있나?”
“그야 당연히…….”
그 순간 문수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문수르는 자문했다.
‘나는 정말 전쟁을 준비한 건가?’
베르베 백작과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이 될 메가히트의 제조에 전력을 다했다. 그 외에도 영지민들을 성으로 부르고, 베르베 백작의 병력들이 약탈조차 하지 못하도록 모든 농작물을 수확하거나 불태웠다. 모든 건물을 부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게 전쟁을 위한 준비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아니야.’
문수르는 이내 부정했다.
그가 전쟁을 준비한 건 맞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건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 그건 다름 아니라 문수르 본인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병기를 만들고, 군수물자를 비축한다고 해도 전쟁을 이끄는 건 인간이다.
메가히트가 제 아무리 대단한 병기라고 해도 그걸 다루고, 조종하는 건 결국 문수르 본인이다.
그런데 막상 문수르는 다른 건 다 준비해놓고서, 정작 중요한 본인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평소에 하던 수련조차 빼먹었다.
바빠서 못했다는 소리는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 전쟁에선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어서, 일이 바빠서 준비를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적이 봐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악착 같이 했어야 한다. 잠을 줄여서라도 문수르는 자신의 창을 보다 날카롭게 갈았어야 했다.
“제가 무언가를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제야 가누스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누스는 문수르에게 가장 중요한 걸 알려주러 온 것이다.
“네가 오러 마스터란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겠지.”
더불어 가누스가 가르쳐주고자 하는 건 단순한 깨달음만이 아니었다. 가누스는 좀 더 현실적인 것을, 좀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문수르 앞에서 검을 빼든 것이다.
“너는 반쪽짜리 오러 마스터다. 신목의 도움을 받아 운 좋게 오러 마스터가 됐을 뿐이지.”
그 누구도 문수르에게 해주지 못했던 이야기.
오직 오러 마스터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
가누스가 하는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때도 분명히 말해줬지. 실력이 날이 갈수록 퇴보한다고. 그 이후에 조금 발전된 것 같았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이더군.”
예전에도 가누스는 문수르를 위해 충고를 해줬다. 그리고 문수르는 그 충고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해만 할뿐, 그 충고를 실천을 통해 약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으로만 품고 있을 뿐.
문수르는 할 말이 없었다.
“보통 때라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이제 문수르, 네 어깨 위에 탈라트 부족의 미래가 걸린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창을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문수르는 더 이상 이런 말뿐인 대화가 무의미하는 걸 깨달았다.
가누스는 진즉에 검을 꺼내들었다. 그는 검으로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렇다면 문수르는 혀가 아닌 창으로 대답을 해야겠지.
“아니.”
그러나 문수르를 막는 가누스.
쉬익!
순간이었다.
가누스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뱉으며, 문수르의 목젖을 노리고 날아왔다.
휘익!
문수르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숙이며 피했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목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무슨!”
가누스가 검으로 문수르의 전투 감각을, 전투 능력을 깨워주려고 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문수르는 무방비 상태다. 문수르의 애병이라 할 수 있는 창은 지금 그의 손에 없다.
그런데 이런 기습적인 공격이라니?
“창이 없어서 차라리 잘 됐군. 죽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반 푼짜리라도 오러 마스터를 상대하려면 힘 조절이 쉽진 않을 것 같군. 이제부터 공격은 계속된다.”
다시금 검을 휘두르는 가누스!
그가 마지막 경고를 내뱉었다.
“목숨을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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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요.
모두들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