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35화. 도발.>
1.
혁명.
듣기에는 좋은 단어다.
그러나 혁명은 결국 파격이다. 기존의 이치를 뒤집는 것이니, 파격이란 표현을 써도 무방할 터.
파격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진 파격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
하물며 기존 체제를 향한 혁명은 좋든 싫든 엄청난 피해를 만들 수밖에 없다. 조급하게 진행될수록 그 피해는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당한 세상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부당하면 바꾸는 게 맞는 거다. 그게 바로 정당함 아니겠는가? 단지 어설프게 할 바에는 아예 시도를 하지 말고, 이왕 할 거면 완벽하게 준비를 한 채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다.
문수르는 그런 의미에서 지미, 그가 말하는 혁명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지르미오, 이 자가 원하는 건 기존 체제의 붕괴다.’
지미.
귀족가 출신이지만, 자신을 낳은 가문이 몰락한 탓에 귀족 대접을 받지 못하는 자.
가진 능력은 뛰어나지만, 몰락한 가문 때문에 제 능력을 제대로 평가 받기는커녕 오히려 귀족들은 그의 능력이 자신들이 이익에 위협이 된다 생각한 탓에 그들로부터 핍박은 받은 자.
‘하지만 이해는 되는군.’
그런 지미가 세상이 부당하다 여기는 건 당연한 논리였고, 그런 세상을 바꾸고자 시도했던 건 그가 가진 능력을 봤을 때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문수르가 고민을 하는 이유. 그건 바로 문수르 본인도 결국 본질은 혁명을 원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수르가 내놓는 모든 건 이미 파격, 그 이상이다. 파격의 정도로 따지면 지미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단지 그럴싸한 포장을 통해 파격을 감추고 있을 뿐.
‘좋아.’
이윽고 문수르가 머릿속에서 어떠한 답을 내놓았다.
지미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2.
이제르트 자작가의 아침이 밝았다. 태양은 언제나 그렇듯 하늘 높이 떴다. 그 태양 빛 아래로 붉은 핏물들이 강물마냥 늘어져 있었다. 한밤중에 시작된 오크와의 전쟁은 아침이 되어서야 끝났다.
“으아…… 이제 끝났다.”
“이겼다! 이겼다고!”
누군가는 승리에 기뻐하며 환호성을 내질렀고, 누군가는 그런 환호성도 내지를 힘이 없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쿠울쿠울.
자리에 주저앉은 이들은 금방 깊은 잠에 빠졌다. 가뜩이나 잠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한밤중에 깨어나 전쟁을 치렀다. 생각 이상으로 치열한 전쟁이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런 전쟁이 끝났으니, 잠이 몰려오는 건 당연지사.
“자리에서 일어나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장을 정리해라.”
기사들은 그런 병사들을 일일이 부르며 다그쳤다. 기사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다. 그들이라고 같은 사람인데 피곤하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하물며 기사들은 더 힘들었다.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기 위해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당장 주저 앉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여기서 마무리를 확실히 해야 한다.’
지금 확실히 정리를 해야 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전투도 전투지만, 마무리도 그만큼 중요하다. 마무리가 어설프면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군기가 빠질 때가 아니다.
‘죽인 오크의 숫자가 적진 않지만 몰살은 아니다. 오크들이 때를 보고 물러났어.’
대승이긴 하다.
아이언히트 2대의 활약으로 이제르트 자작가는 큰 피해 없이 1천 마리가 넘는 오크를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크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특히 자이언트 트롤을 이용하는 작전은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이제 자이언트 트롤을 이용해 단순히 해자를 메우는 식이 아니라, 자이언트 트롤을 조련해 해자를 건너려고 했다.
‘오크들의 전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한다.’
기사들은 솔직히 오늘 전쟁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소름이 돋았다.
“나중에는 기가스까지 가지고 올지도 모르겠군.”
기사는 우스갯소리로 내뱉었지만 등골이 오싹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때였다.
“이제르트 자작님을 노리고 암살자가 성에 들어왔네.”
어느 기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다른 기사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경악할 만한 이야기가 나왔다. 제 귀를 의심해야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혹감이야 느꼈다. 그러나 그걸 속으로만 삼킬 뿐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부는 남아서 병사들을 관리했고, 일부는 이제르트 자작의 처소로 향했다.
“이라아 아가씨는?”
“무사하시네.”
더불어 누군가는 이리아 이제르트를 걱정했다.
이윽고 기사들이 이제르트 자작 앞에 모였다. 이제르트 자작 앞에는 시체 2구가 있었다.
몸에 찰싹 달라붙는 검은 옷, 검은 복면. 여기에 얼굴에 검은 숯마저 발랐다. 누가 봐도 암살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시체 주변에는 암살자들이 가져온 무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진즉부터 이제르트 자작 곁에 머물며 상황을 정리했던 포비어가 자신이 정리한 것들을 기사들에게 알려줬다.
“가누스 님 덕분에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암살자의 등장. 그 암살자로부터 이제르트 자작을 구해낸 건 다름 아니라 가누스였다.
가누스는 진즉에 낌새를 느꼈다.
오크들이 내뿜는 지독한 살기, 투쟁 의지 사이에 피어오른 이색적인 살기를 말이다.
그래서 가누스는 자신이 아이언히트에 탑승하는 대신 자신의 수제자인 히스티를 내세웠다.
그는 이제르트 자작의 곁을 지켰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가누스가 암살자 시체 2구를 이제르트 자작 앞에 가져다놓은 후에야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이제르트 자작가는 암살자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동시에 이제르트 자작령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암살자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사들이 경거망동하지 않은 채 최대한 표정을 관리한 건 암살자란 게 단독행동을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기사들이라면 모두가 알아야 하는 이야기다. 암살자와 동조하느 세력이 분명히 있다. 암살자는 암살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내부의 배신자와 연락을 취하니까.
암살자가 발견되면 일단 내부부터 단속하는 게 최우선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배신자가 나왔다.
하인 2명 그리고 하녀 3명.
그들이 내부의 정보를 빼돌렸다. 대단한 정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암살자들에게는 침입루트를 확정할 수 있는 굉장히 귀중한 정보였겠지.
용서는 없었다.
그들 다섯은 전부 목이 잘렸다.
그들의 처형을 기점으로 이제르트 자작이 암살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3.
지미는 문수르에게 말했다.
자신이 혁명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와 그 당위성을 말이다. 지미가 문수르를 찾아온 목적은 간단했다.
지미는 문수르와 함께 힘을 합쳐 세상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문수르와 힘을 합친다면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될 테니까.
문수르는 그런 지미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부 들을 후에 말했다.
“일단 하나는 확실히 합시다.”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이 세상의 체제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미는 각오했었다.
문수르를 설득할 수 없다면, 죽음을 맞이하기로. 그가 죽는다면 그를 따르던 이들은 곧바로 이제르트 부속령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지르미오, 당신의 생각에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능력 있는 자가 그에 맞는 대우를 받는 것. 적어도 성격이나,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지 않다면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미가 눈을 번뜩였다.
“현 체제에서는 그런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체제를 놓고 보면 그렇게 되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개인을 보고 이야기해봅시다.”
“개인?”
“말 그대로입니다. 귀족들 중에서는 능력에 맞은 대우와 대접을 해주는 이가 있습니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요.”
“극히 소수라도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귀족이 소수이건, 다수이건 그건 지금 지르미오, 당신에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소수의 귀족에게 당신이 인정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지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세상의 근본을 바꾸려고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당신에게 그럴 능력은 결코 없습니다.”
지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자신이 콩탄 왕국을 뒤집기 위해 보우런 남작령에서 숨죽인 채 군대를 모으며 살아오긴 했지만, 그가 제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콩탄 왕국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세상에는 콩탄 왕국 하나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제국은 어떠한가? 콩탄 왕국 역시 제국이란 거대한 땅덩어리 앞에서는 어깨가 절로 움츠려든다.
그러나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부당함에 대한 저항감이 지미를 이제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
“당신의 능력은 기껏해야 영지 하나를 바꾸는 정도가 전부일 겁니다.”
“그래서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분수에 맞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당신은 무리하게 혁명이란 걸 일으킬 필요가 없겠지요?”
지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지?’
지금 문수르의 이 말, 지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줄 테니 혁명을 그만두라는 소리입니까?”
억지로 상황을 다르게 풀이하는 지미.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머리가 좋으십니다. 두루뭉술한 제 말의 핵심을 확실하게 짚으셨군요.”
이 순간 지미는 생각했다.
‘문수르란 자, 머리가 이상한 건가?’
지미의 혁명이 싫다면, 지미를 해치우면 되는 거다. 그게 당연한 논리 아닌가?
그런데 지미가 말하는 혁명에는 찬성하지 않으면서, 반대로 그 혁명을 포기하면 그 대가를 주겠다고 한다.
이해하기 힘들다.
대체 이러는 의도가 무엇인가?
그런 지미의 의중을 읽은 듯, 문수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지르미오, 당신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무리하게 혁명을 부르짖다 무의미하게 죽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런 당신을 살릴 수 있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문수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미는 두 눈을 감았다.
‘아.’
지미의 속에서는 무언가가 터졌다.
이제까지 응어리진 무언가가, 이제까지 지미를 혁명이란 두 글자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팡! 하고 터져버렸다.
‘나는 어쩌면 이제까지 인정받기 위해 혁명을 부르짖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미, 그가 세상을 뒤집으려 한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이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지미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등장했다.
이 순간 지미는 역사적 사명감, 그 비슷한 걸 느꼈다.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겠지만, 문수르를 무조건 따라야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까지 귀족이라면 이를 갈고, 치를 떨고, 그 귀족들의 사회를 뒤집으려는 그가 문수르 앞에서 순한 양이 된 것이다.
“나는…….”
지미, 그가 문수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