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5.
늦은 밤.
달이 오롯하게 하늘 위를 비추고 있을 때.
모든 이들이 깊은 잠에 빠졌어야 하는 이 늦은 시간 무렵이거늘, 이제르트 자작령은 분주했다.
“성벽으로 이동하라.”
“횃불을 밝혀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곤히 잠들었던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 아직까지 눈빛에 초점이 제대로 맺히지 않은 이들이 보일 정도다. 그러나 그들은 목숨을 걸고 움직이고 있었다.
“오크들이다!”
“자이언트 트롤을 앞세우고 있다!”
병사들의 단잠을 깨운 자, 다름 아니라 몬스터들이었다. 테블스 산의 오크 무리들이 다시금 자이언트 트롤들을 앞세우고 이제르트 자작령을 함락시키기 위해 늦은 밤에 등장한 것이다.
“빌어먹을!”
“젠장, 저 놈들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는 날이 없어!”
성벽 위로 올라간 병사들은 눈에 어렴풋하게 잡히는 오크 무리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가 갈리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한편 전장 상황을 보고 받은 기사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특이점은 그 자리에 모인 게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들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이언히트 2대가 출격해야 할 듯합니다.”
“포비어 경의 기가스는?”
“아직 수리가 덜 됐습니다. 출격은 가능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출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품이 파괴라도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겁니다.”
“그럼 아이언히트 파일럿으로는…….”
기사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그 시선 끝에는 드워프와 엘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별 수 있나. 내가 나가겠네.”
고개를 끄덕이는 드워프는 다름 아니라 말론이었다. 호우투 부족 소속의 드워프 중에 이제르트 자작가에 가장 우호적인 드워프이자, 이제는 이제르트 자작가에 새롭게 신설된 이제르트 팩토리의 리더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더불어 아이언히트를 직접 조종하는 파일럿이기도 했다.
“가누스 자네도 나가야지?”
“흥.”
그런 말론 옆에 앉은 엘프의 정체는 바로 가누스였다. 탈라트 부족 최고의 전사! 그리고 세상은 알지 못하는 오러 마스터!
말론와 가누스, 그 둘이 각자의 부족을 대표에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략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문수르가 의도한 계획이었다. 문수르는 호우투 부족과 탈라트 부족이 이제르트 자작가의 일에 참가하도록 만들었다. 단순히 테블스 동맹이란 틀을 벗어나, 그들을 이제르트 자작가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전략회의는 굉장히 중요한 회의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이 내려진다. 보안이 어느 때보다 철저한 회의이기에 이제르트 자작이 정말 믿을 수 있는 이들만 참석이 가능하다.
효과는 확실했다.
처음에는 말론이나, 가누스는 전략회의 자체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말론은 장인의 일에만 집중하고 싶어 했다. 가누스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폐욤 족장의 명령으로 인간과 교섭을 하는 거지, 그들과 한 곳에 어우러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문수르는 당연히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몇 가지 수작을 부렸다.
말론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이제르트 팩토리란 것을 만들었다. 기가스 제조 및 관리부터 시작해, 이제르트 자작령 내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업 부분을 총괄하는 기구였다. 물론 현실은 장인들이나 기가스 정비사들을 관리하는 부서지만, 말론에게는 나름 매력적인 자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문수르는 이제르트 팩토리에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력 중 몇 개를 공개했다. 이제르트 팩토리를 마음껏 다룰 수 있다는 건, 그 기술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말론은 이제르트 팩토리의 리더가 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문수르가 내 건 조건, 전략회의에 참석하란 조건 역시 수락했다.
이후 말론은 전략회의에 꾸준히 참석했고, 그럼으로써 이제르트 자작가와 좀 더 가까워졌다.
사실 말론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테블스 산의 일부 지역을 개간했고, 그 개간된 땅은 드워프와 엘프 부족의 몫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언제나 몬스터들의 침입이 버거운 그 땅에서 어떻게든 드워프와 엘프의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이제르트 자작가와 원활한 합의가 필요했고, 전략회의는 그 원활한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가누스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도 전략회의에 참석했다.
더불어 가누스는 자신이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략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단순히 동일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제르트 자작가를 견제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중요하다.
당장 이제르트 자작이 가누스를 비롯해 탈라트 부족을 공격한다면, 솔직히 막을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전략회의에 참석한다면, 최소한 어떤 낌새 정도는 느낄 수 있을 터.
심지어 가누스가 최근 이제르트 자작의 호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길 경우, 이제르트 자작을 인지로 삼는 수밖에 없다.’
호위란 요인과 가장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럴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법이다. 대비를 해둬서 나쁠 건 없다.
“내가 나설 필요까진 없겠지. 히스티, 그 아이를 보내면 충분할 것이다.”
“좋아, 그럼 파일럿 2명은 다 나왔군. 특별히 작전은 있는가?”
“전술적 작전보다는 여차할 경우 호우투 부족과 탈라트 부족이 대피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아직 그 근처까지 성벽을 제대로 확장하지 못한 상황이니까요.”
“말해두겠네.”
“그럼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전략회의가 끝이 났다. 기사들과 말론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르트 자작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누스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이제르트 자작.”
“음?”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가누스의 존재에 이제르트 자작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가누스가 오러 마스터란 건 이미 알고 있다. 더불어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했다.
“가누스는 뛰어난 실력자이지만, 인격자는 아닙니다. 아마 그는 탈라트 부족의 권리를 위해서 자작님을 인질로 삼을 지도 모를 겁니다.”
이제르트 자작은 되물었다.
“그럼 위험한 인물 아닌가?”
“위험하지만 적어도 우리 쪽에서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이상 행동할 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탈라트 부족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이상, 절대 먼저 그가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해 칼을 들이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이익을 보장해주는 이상, 가누스는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와주고, 자작님을 지켜줄 겁니다.”
그때 대화 이후로 이제르트 자작은 가누스의 행동을 주시했다.
사실 문수르가 없는 상황에서 가누스가 작정하고 이제르트 자작을 공격한다면 그를 막을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오?”
그런 그가 갑작스레 이제르트 자작, 자신을 부른 것이다. 평소라면 회의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자리를 뜨던 그가 말이다.
“조심해라.”
“음?”
“낌새가 좋지 못하다. 오늘은 내가 특별히 호위를 서두도록 하지.”
정말 갑작스런 선언이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은 당황하기보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가누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호의를 보여준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된다.
“감사하오. 오러 마스터인 그대의 호위를 받는다니, 내가 정말 호강을 하는구려.”
호탕하게 웃는 이제르트 자작.
그러나 몇 시간 후…… 이제르트 자작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르트 자작의 미소를 없앤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3구의 시체였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암살자의 시체.
이제르트 자작, 그를 향한 암살위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6.
지미는 말했다.
“일단 어떤 이유로 절 찾아왔는지, 그것부터 물어보겠습니다.”
그 물음에 마구르가 당연하다는 듯이 다짜고짜 대답을 해주려고 했다.
“잠깐.”
그러나 문수르가 그런 마구르의 행동을 막았다. 문수르의 몸에서는 묵직한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러 마스터의 위압감이라고 해야 할까?
문수르가 마구르에게 말했다.
“마구르 군, 잠시 자리를 비켜주면 고맙겠습니다만?”
그 말에 마구르는 감히 싫은데요?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지 못했다.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잽싸게 자리를 비켜줬다.
덕분에 지미와 문수르, 둘만 남게 됐다.
지미는 문수르를 보았고, 문수르는 입을 열었다.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물었던 지미. 하지만 문수르는 지미의 물음을 정중하게 무시했다.
거절이 아닌, 무시다.
“그렇게 하시지요.”
“이쪽에서 먼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게 맞습니까?”
문수르의 질문, 그건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었다. 지미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말을 뱉지 못하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아주 미약하지만 흔들림을 보였다.
문수르가 그 흔들림을 포착했다.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신기합니까?”
문수르.
그는 지미가 멀쩡한 행색을 하고 있는 걸 보았을 때,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이제르트 자작가에 정보를 흘렸어. 마구르가 찾아오도록…….’
만약 지미가 알콜 중독자 신세로 있다가 발견되었다면 그런 의심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제까지 아무런 소문도 없던 그의 행적이 지금 이 시점에 갑작스레 마구르의 귀에 들어갔을 리는 없을 터. 마구르가 갑작스레 지미의 행적을 알게 된 건 분명히 지미가 의도한 일일 것이다.
그럼 대체 왜?
문수르는 그 이유를 알면서도 물어봤다.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문수르 경과 만나고 싶었습니다.”
바로 문수르와 만나는 것!
“저와의 만남, 목적은 무엇입니까?”
“보우런 남작령…… 아니, 이제르트 부속령에 자리를 잡은 지는 제법 오래 됐습니다. 왜 하필 제가 다른 곳도 아닌 보우런 남작령에 자리를 잡은 지 아십니까?”
이유?
귀족가의 자제들에게 찍혀서 페르코 아카데미를 도망치듯 나온 그가 빅토리안 공작의 총애를 받는 보우런 남작의 밑에 들어간 이유를 말하는 걸까?
“빅토리안 공작 파벌을 무너뜨릴 만한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문수르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수르 역시 빅토리안 공작 파벌을 현재 가장 중요한 정적(政敵)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 대답을 들은 지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수르 경.’
문수르에 대한 소문은 질리도록 들었다. 오러 마스터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없던 소문이 우후죽순 생기는 양반인데, 이제르트 부속령에서 그가 보여준 일들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들뿐이었다.
특히 전염병이 퍼지고, 헬라 교단이 그 전염병을 이용해 세를 회복하다 반대로 그 전염병에 의해 단숨에 몰랐을 때, 지미는 그동안 조용히 갈고 있던 칼을 꺼내들기로 작심했다.
“제게는 군대가 있습니다.”
지미.
그는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도망치듯 쫓겨났을 때 한 가지 각오를 했다.
복수를 하겠다고!
자신의 손목을 자르고, 자신에게 없던 강간죄를 뒤집어씌우고, 빌어먹을 쓰레기로 만든 귀족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그래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암중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지미는 자신과 뜻이 맞는 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물론 콩탄 왕국의 귀족들이 가진 세력에 비하면 정말 있으나 마나한 크기의 세력이었다. 군대라고는 하지만 그 숫자는 백을 넘지 못하는 수준. 보안을 위해 사람을 가릴 수 있을 만큼 가려서 받은 탓이었다.
나라를 크게 뒤집을 힘을 모으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숨어 살려고 했다.
보우런 남작령에 자리를 잡은 건 보우런 남작의 동태를 살피면, 빅토리안 공작 파벌의 의중을 살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빅토리안 공작 파벌의 실세라고 해도, 보우런 남작은 남작이다. 그가 가지는 영향력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기에, 그를 관찰하는 건 다른 귀족들을 관찰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그러던 와중에 갑작스레 일어난 영지전.
그리고 문수르의 등장…….
혼란 속에서 지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 후에 지켜봤다.
문수르의 동태를 말이다.
문수르는 모르겠지만, 지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이용해 문수르를 지켜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 자는 무언가 다르다.’
무언가 문수르에게는 독특한 것이 있다.
또한 문수르는 바우런 남작 이상으로 철두철미한 자였다. 그리고 보우런 남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지 장악능력이 있는 자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지미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군대의 존재가 들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지미는 선택해야 했다.
‘문수르란 자가 이제르트 부속령에 있는 이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제르트 부속령을 떠나거나 아니면 문수르란 자의 밑으로 들어가거나.’
종국에 지미는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지미는 문수르와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지미가 죽거나 사로잡힌다면, 지미와 뜻을 같이하던 이들은 이제르트 부속령을 떠나기로 했다.
“이 군대는 세상을 뒤집기 위해 만든 군대입니다.”
지미, 그는 목숨을 담보로 문수르와의 만남을 가지려 한 것이다.
그런 지미의 각오에 문수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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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날씨가 풀린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모두들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