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3.
문수르가 이제르트 부속령 운영에 박차를 가했다. 문수르는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 인정(人情)도 어느 정도 버렸다. 쳐낼 것은 쳐냈다. 안 될 것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덕분에 문수르에 대한 평가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이제르트 부속령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그런 와중에 헬라 신전이 철수했다. 제 입으로 철수했다고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새로운 주교가 오기 전까지 대신전으로 돌아가 자기수양을 하겠다고 떠났다.
하지만 앞으로 헬라 교가 이제르트 부속령에 사제를 파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제르트 부속령의 주인이 바뀌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미 떨어질 때로 명성이 떨어진 상황. 헬라 교단 입장에서 이제르트 자작가는 적, 그 자체일 테니까.
문수르는 개의치 않았다.
단지 푸흐르 교단과의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차라리 내가 그럴싸한 종교 하나를 만들고 싶군.’
가끔은 종교를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문수르는 다각도에서 상황을 분석하고 해결하려고 했다.
그렇게 문수르가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에 이제르트 부속령에 반가운 손님이 왔다.
“문수르 경!”
환한 미소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자는 바로 마구르였다.
“마구르? 당신이 왜 여기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반갑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령 일로 바쁜 마구르가 이제르트 부속령에 온다니?
“영지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영지 일이야 언제나 넘쳐나지요.”
“그런데 왜 이곳에……?”
이제르트 자작령이라고 해서 너널한 건 결코 아니다. 사실 이제르트 부속령보다 업무량이 곱절이나 많은 곳이 바로 이제르트 자작령이다. 애초에 테블스 산, 그것 하나만으로도 기타 영지에 비해 업무량이 곱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관리로 일을 하는 건 마구르뿐만이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도 있고, 다른 관리들도 있다.
‘그래도 마구르가 시간이 날 리가 없을 텐데?’
의문을 품는 문수르. 그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마구르가 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중요한 일?”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르트 부속령에 제가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소문을 말이지요.”
문수르와 마구르는 이제르트 부속령에 위치한 어느 술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 쨍쨍했다. 솔직히 술을 먹기엔 좋은 시간이 아니다. 하물며 문수르와 마구르, 둘 다 술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낮술을 하려 술집을 찾는 건 아닐 것이다.
이윽고 그들이 술집에 들어갔을 때.
“어서 오십시오!”
술집 주인은 낮술을 즐기러 온 손님들을 향해 우렁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시간이 흘렀다.
술집 주인은 손님의 행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술집 장사라는 게 술만 팔아서 끝나는 게 아니다. 사실 술은 누구나 먹을 수 있고, 누구나 마시고 싶어 한다. 문제는 돈이다. 술을 팔면 돈을 받아야 한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과연 손님이 술을 먹고 돈을 낼 처지가 되는가,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헉!”
그때 술집 주인이 문수르를 알아봤다.
모를 리가 없다. 최근 문수르는 영지민들에게 자주 얼굴을 비추고는 했으니까. 성 내에 거주하는 영지민들이라면 아이들까지도 문수르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
“무, 문수르 님?”
술집 주인이 기겁하며 문수르를 불렀다. 문수르가 멋쩍은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영주 대리님!”
술집 주인이 당장 문수르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문수르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 익숙하진 않다.
그 무렵 마구르는 따로 움직였다. 문수르가 술집 주인을 상대하는 사이, 마구르는 술집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구르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주점 내에는 마구르가 찾는 이가 없었다.
“영주 대리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사람? 무슨 사람 말입니까?”
순간 술집 주인이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찾는다는 게 나쁜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범죄자라던가…….
“저, 저희 술집에 범죄자는 없습니다.”
문수르는 술집 주인이 착각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혹시 손목이 없는 사람이 이곳에 자주 오지 않습니까?”
마구르가 술집 주인에게 기습적인 질문을 건넸다. 술집 주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문수르의 눈치를 살폈다. 문수르가 눈빛을 보냈다. 대답하라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매일 오긴 합니다.”
“혹시 이름을 아십니까?”
“지미. 일단 그렇게 부릅니다만, 정확한 이름은 잘 모릅니다.”
“역시!”
그 순간 마구르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르미온 론, 그가 여기 있습니다.”
4.
지르미오 론.
론 남작가 출신, 말 그대로 귀족가 출신이지만 론 남작가는 아주 오래 전에 몰락해버려 허명(虛名)뿐인 가문이었다.
마구르가 기억하는 지르미오는 해톤 같은 사내였다. 아니, 해톤보다 더 대단한 사내였다.
그는 천재였다. 모든 분야에 만능이었다. 가진 능력이 너무 엄청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경쟁을 즐겼고, 경쟁에서 언제나 승리했다.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지르미오, 그가 남긴 온갖 기록들은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마구르가 처음 페르코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그때 지르미오는 6학년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지르미오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마구르는 꼭 지르미오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적어도 지르미오, 그가 손목이 잘린 채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귀족가의 자제들은 지르미오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단순히 시험에서 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르미오는 다른 귀족가의 자제들이 감히 덤벼들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으로 그들을 짓눌렀다.
치욕이나 굴욕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지르미오와 같은 학년에 재학 중이던 귀족가의 자제들이 느끼는 감정은 절망감, 그 비슷한 것이었다.
결국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지르미오, 그를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내쫓기로!
그 합의가 현실로 등장한 건 지르미오가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있을 때였다. 어떤 괴인이 지르미오를 납치했다. 다시금 지르미오가 발견되었을 때 그는 오른손 손목이 잘려나가 있었다. 동시에 귀족가의 영애가 나타나 지르미오를 지목하며 말했다.
“저자가 날 강간했어요! 날 덮쳤다고요!”
페르코 아카데미가 뒤집어졌다. 지르미오가 퇴학당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장 지르미오를 처형해야 한다는 이야기마저 돌기 시작했다. 그때 지르미오는 도망치듯 페르코 아카데미를 나왔다.
그런 지르미오의 삶이 마구르에게 많은 충격을 줬다. 마구르가 해톤과 다르게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외방인처럼 행동한 건 지르미오의 사건 탓이 컸다.
그런데 이제르트 부속령에 지르미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사를 해봤다. 이것저것 조사를 해보니, 지르미오일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마구르가 직접 이제르트 부속령까지 온 것이다.
“그는 천재입니다.”
마구르는 지르미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혁명가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위험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혁명가!
그 단어에 문수르의 표정이 굳었다. 혁명가란 단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문수르도 케르빈 월드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혁명가나 마찬가지니까. 그것도 보통 혁명가가 아니다.
하지만 혁명가는 언제나 주류(主流)의 위협을 받는 법이다. 그 사상과 이상…… 솔직히 문수르에게는 버겁다.
‘마구르가 빠진 이유가 그 부분 때문이겠지.’
반대로 마구르가 지르미오란 사내를 그렇게도 칭찬하는 이유는 지르미오란 사내가 가진 이상에 동감하기 때문이겠지.
‘만나봐서 나쁠 건 없겠지.’
어쨌거나 마구르의 말대로 문수르는 지르미오란 사내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그가 어떤 자인지, 그리고 그가 정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자인지…… 아니면 독이 되는 자인지 직접 확인해보면 되는 일이니까.
‘그래도 기왕이면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지.’
정말 마구르의 말대로 능력이 좋은 인물이고, 사상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문수르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라, 술집 단골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문제가 있다. 문수르는 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알콜 중독자를 데려다 쓰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술은 모든 걸 망친다.’
술이란 건 적당히 즐기는 선에서 멈춰야지,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술에게 먹히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답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지금 문수르가 고용하고자 하는 인물은 영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게 될 인재다. 그런 자리에 알콜 중독자를 앉힌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매일 저녁에 오니까…… 오늘도 올 겁니다. 어제도 왔으니 말입니다.”
술집 주인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보다 지미, 그 친구는 무슨 일로…….”
“별 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그냥 기다리기도 뭐하니, 가볍게 요기나 해야겠군요. 주인장,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이 뭡니까?”
그 말에 술집 주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당연히 양고기 스테이크입니다. 제가 양고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압니다. 곧바로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자, 저기 앉으시죠.”
가벼운 식사가 마련됐다.
그동안 많은 격무에 지친 문수르와 마구르는 말없이 식사를 했다.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기분이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고갔다. 영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상황 그리고 이제르트 부속령의 상황, 서로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대답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해는 금방 떨어졌다. 밤이 찾아왔다. 동시에 문수르와 마구르가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왔다.
“주인장, 언제나 똑같은 요리 부탁합니다.”
“아! 지미!”
술집 주인은 지미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와 다르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르미오는 술집 주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는 퉁명스럽게 대하던 술집 주인의 반응이 오늘 따라 왜 다른 걸까?
의구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지미 형님!”
마구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르미오는 마구르를 슬며시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훑어봤다. 얼마나 훑어봤을까? 지르미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구르군. 여긴 무슨 일이지?”
지르미오는 마구르를 알아봤다.
한편 문수르는 지르미오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멀쩡하군.’
문수르는 지르미오가 매일 술집을 찾아온다는 말에 그가 알콜 중독자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막상 지금 눈앞에 보이는 지르미오는 절대 알콜 중독자로 보이지 않았다. 차림새부터가 반듯했다. 값비싼 옷은 아니지만, 매우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매무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총기가 확실하게 깃든 눈빛이었다. 술에 취한 자는 결코 보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생김새도 번듯했다. 얼굴이 말상으로 길쭉하고,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번듯한 겉모습이다. 흠이라고 한다면…….
‘오른쪽 손은…… 그냥 장갑을 씌운 건가?’
잘려나간 오른 손목이겠지.
문수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상대가 알콜 중독자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포자기한 사내가 아니라는 의미다.
문수르가 움직이자 마구르가 반응했다.
“지미 형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문수르를 소개해주려는 마구르.
그 순간 지르미오가 문수르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르트 부속령의 영주 대리이자,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 문수르 경.”
말과 함께 왼손을 내미는 지르미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르미오 론이라고 합니다.”
문수르는 그런 지르미오의 손을 마주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 자, 나를 기다렸군.’
아무래도 이번 만남의 결과물은 예상과는 다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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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군요.
모두 좋은 일만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