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5.
종교의 힘은 무섭다.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부류가 말이 통하지 않은 부류 아니었던가?
세를 잃고 추락하던 바우먼 주교가 다시 예전처럼 기세등등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바우먼 주교의 손길이 닿자마자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났는데 바우먼 주교를 부정하고, 헬라 신을 부정할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병원은 텅텅 비었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허탈하군.”
병원에 홀로 남은 헤인 경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병원 내부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문수르 경의 의중은 무엇인가?’
보통 때라면 억지로라도 사람을 데려다가 치료했을 것이다. 지금 바우먼 주교를 찾아 가는 영지민들 중에서 전염병에 걸려 가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전염병에 걸린 이들이 신전을 찾아가는 건 아무래도 좋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가?
문제는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영지민들, 전염병이 다른 병에 걸린 이들이었다. 바우먼 주교가 대단한 권능을 발휘해 그들마저 전부 치료해주면 좋겠지만, 바우먼 주교의 치료가 먹히는 건 전염병에 걸린 병자들뿐이었다. 그 외에는 솔직히 효과가 없었다. 나름 성수를 뿌리거나, 기도를 해준다거나…… 열심히 노력은 하는데 그런 걸로 사람이 나았다면 세상에 고통 받아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헤인 경은 기사다. 이제르트 자작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정식으로 받은 진짜 기사!
만약 헤인 경이 작정하고 바우먼 주교와 대립각을 세울 각오를 했다면, 말도 안 되는 치료를 받는 영지민들을 데려와 자신이 직접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싶다.
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헤인은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달았으니까.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참았다.
자신이 치료하던 영지민이 가진 재산을 전부 털어 바우먼 주교가 만든 성수를 샀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 성수를 상처에 뿌렸다고 했을 때, 오히려 상처 부위가 곪고, 악화되어 목숨을 잃었다고 했을 때!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았다.
이를 꽉 물고, 참았다.
‘문수르 경, 나는 당신을 믿소.’
바로 문수르를 위해서였다. 문수르는 결코 지금의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자가 아니었다.
답을 내놓을 것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답을, 모든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헤인이 멋대로 나섰다가 일을 망치면 문수르를 볼 면목이 없지 않은가?
“최대한 참는 거다.”
그렇게 헤인은 인내를 곱씹었다.
문수르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난 눈이 있다. GPS시스템과 그것을 다루는 로이드. 이 두 가지는 말 그대로 천리안이다. 영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상황은 좋지 못했다.
‘바우먼 주교의 발언권이 점점 커진다. 바우먼 주교의 발언권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보우런 남작이 명분을 잡을 확률도 높아지겠지.’
정말 어쩌면 이제르트 부속령을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수르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인가?
“치료법은 알아냈는데 말이야.”
아니다.
한 달 동안 전염병에 대한 연구를 했고, 의외로 치료법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전염병의 균을 죽일 수 있는 항생제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 당장 어느 정도 양산도 가능하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 항생제를 풀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항생제를 푸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전염병이라고 하지만 환자는 꾸준히 줄어든다.’
자연적인 이유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아니라 인위적인 원인으로 발생한 전염병이었다. 전염 속도가 느릴 뿐더러, 헬라 신전에서 해주는 처치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환자가 나오는 족족 치료가 되니,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솔직히 지금 당장 전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건 헬라 신전의 자력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다.
지금 나서봤자 의미가 없다. 생색조차 내지 못하는 짓이다. 결국 항생제를 내놓아도 바우먼 주교의 발언권은 그대로일 것이고,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한 위협은 유효하겠지.
‘다른 무언가가 필요해.’
가장 중요한 건 바우먼 주교의 입지를, 위치를 고꾸라트리는 것이다. 그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확실하게 처치해야 한다.
그럼 대체 어떻게?
“흥.”
그 순간 문수르의 눈이 번쩍였다.
아주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 병을 무기로 쓴다면, 그에 맞게 대항해야지.”
바우먼 주교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뒷주머니에는 돈이 넘쳐났고, 그의 인지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발언권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그의 한 마디에 이제르트 부속령의 영지민들이 흔들렸다.
안색이 좋지 못한다면 그게 문제일 것이다.
“콜록, 콜록.”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반대가 됐다. 기분은 언제나 최고인데, 기침이 잦아졌다.
“끄응…… 너무 무리를 한 건가?”
안색은 멀쩡했다.
딱히 눈으로 보기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단지 기침이 잦아지고, 몸에 힘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바우먼 주교님.”
“콜록, 콜록.”
“기침이 잦으신데 괜찮으십니까?”
그런 바우먼 주교를 찾아온 헬라 교단의 사제, 에얼. 그의 걱정에 바우먼 주교는 손을 내저었다.
“아무 일도 아닐세. 날이 추워서 그런 모양일세. 그보다 에얼 사제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다름이 아니라 영지 대리인인 문수르 경께서 바우먼 주교님과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그 순간 바우먼 주교의 기침이 절로 멎었다. 바우먼 주교의 얼굴에 만족의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기어코 왔군!’
기어코 문수르가 고개를 숙인 거다. 이제까지 뻣뻣했던 놈의 모가지가 부러진 것이다.
‘아무렴. 네놈이 제 아무리 뛰어봤자 벼룩이지.’
문수르가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 그 무엇보다 기쁜 사실이지만 바우먼 주교는 다른 의미로 더 기뻤다.
‘드디어 저울질을 할 수 있게 됐어.’
바우먼 주교는 지금 보우런 남작과 베르베 백작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 꼭두각시 인형 마냥 그들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불쾌하다. 아니, 불쾌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위험하다. 그들은 바우먼 주교가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그런 바우먼 주교가 그들로부터 자기 이익을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과 이제르트 자작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것이다. 그 둘을 경쟁 시킨 후에 바우먼 주교 자신은 가운데에서 양측으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뜯어내는 것이다.
‘하하하.’
이제까지 기다린 게 바로 그것이다.
‘그래, 좋아.’
문수르는 어떻게든 바우먼 주교를 포섭하려고 할 테고, 바우먼 주교가 적당히 튕겨주면 문수르는 개처럼 바닥을 기겠지. 한편 문수르가 고개를 숙이면 보우런 남작 입장도 곤란해질 터.
“하하하…… 콜록, 콜록.”
기쁨에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 그러나 사레가 걸린 듯 계속해서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콜록, 콜록.”
몇 번의 기침을 더나 후에야 바우먼 주교는 에얼 사제에게 말했다.
“문수르 경에게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라 전하라.”
문수르는 직접 바우먼 주교를 찾아왔다.
헬라 신전에 마련된 접객실에서 문수르와 바우먼 주교는 얼굴을 마주봤다.
문수르는 다짜고짜 고개부터 숙였다.
“바우먼 주교님, 그 전의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바우면 주교의 입가에 이보다 클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바우먼 주교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인간인 이상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오. 그러니 우리는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겠소?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실수를 반성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믿음이오.”
분위기는 좋았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문수르는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어떻게든 바우먼 주교의 비위에 맞춰주려 노력했다.
바우먼 주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자세를 낮추는 문수르를 상대로 장난을 칠 생각은 없었다. 장난이 심하면 상대가 독기를 품을 수도 있으니까.
이야기는 좋게 흘러갔다.
“일단 당장 바우먼 주교님께서 탐탁지 않게 여기셨던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겠습니다.”
문수르는 헬라 교단에 기부하는 헌금에 대해 암묵적으로 붙였던 세금을 없애준다고 했다.
“또한 앞으로 이제르트 부속령은 헬라 교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또한 이제르트 부속령 내에서 헬라 교가 번창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일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영지민을 위해 희생하신 바우먼 주교님께 영지를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그동안의 미안함을 담아 직접 영지민들을 모아두고, 그 자리에서 바우먼 주교의 업적을 문수르, 자신이 설명해주겠다고 했다. 이 부분이 바우먼 주교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문수르란 자,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방법을 알아.’
바우먼 주교는 분명 업적이 있다. 이제르트 부속령에 창궐하던 전염병을 고치지 않았던가?
그런 바우먼 주교의 업적을 영지 대리인 문수르가 직접 영지민들 앞에서 알린다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며 또한 굉장히 중요한 상징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헬라 교단 내에서 바우먼 주교의 입지도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영지 내에서 바우먼 주교의 위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되겠지.
달리 말하면 문수르는 바우먼 주교의 위치를 용납해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감사할 따름이오. 콜록콜록.”
그 순간 터지는 기침. 문수르가 살짝 놀랐다.
“괜찮으십니까?”
입을 손으로 틀어먹은 바우먼 주교. 그럼에도 기침은 쉽게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기침이 멈춘 듯 바우먼 주교가 입을 열었다.
“요즘 날씨가 추워서인지 기침이 잦소.”
“제가 좋은 보양식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하하, 감사하오.”
“그보다…… 아무래도 영지 사정이 뒤숭숭하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날을 잡겠습니다. 자리는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바우먼 주교께서는 몸만 오시면 됩니다.”
“기다리고 있겠소.”
그 순간 문수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느낌의 미소였다.
바우먼 주교는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제르트 부속령에는 바우먼 주교의 놀라운 업적과 희생을 기리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많은 영지민들이 모였다. 이제르트 부속령의 모든 영지민들이 모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모든 영지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바우먼 주교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계속되는 토혈은 그 누구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순간 누군가 소리쳤다.
“전염병이다!”
“바우먼 주교님이 신의 벌을 받으셨다!”
무수히 많은 인파 사이로 들려오는 어떠한 목소리. 그 목소리로부터 시작된 웅성거림.
피를 토하며 쓰러진 바우먼 주교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바우먼 주교는 자신을 부축하는 문수르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설마…….’
문수르,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
그것이 바우먼 주교가 살아생전 본 마지막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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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금요일이 끝나고 신나는 토요일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