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22화 (120/293)

122화

3.

전염병.

케르빈 월드로 넘어오기 전 한석균과 문수르가 가장 많은 걱정을 했던 부분이었다.

그 어떤 전쟁보다 무서운 게 병과의 전쟁이다. 어스 월드만 해도 흑사병 하나에 유럽이 겪은 고난은 전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독하고, 처절한 것이었다.

하물며 케르빈 월드에는 어떤 질병이 있을지, 한석균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

물론 지식은 있다.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방법, 치료를 위한 기본적인 도구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케르빈 월드에서 병으로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어코 터졌구나.’

문수르는 전염병이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당장 사람들을 격리시켰다. 시체와 접촉했던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았다. 병원에 있던 이들 역시 모두 한 자리에 모았다.

‘공황 상태를 막는 게 중요하다.’

최대한 병이 퍼지는 걸 막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영지 전체에 위생상태를 고치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병에 걸리는 요인을 최대한 제거해야 한다. 깨끗한 생활, 먹는 모든 것을 익히거나 끓여먹는 습관까지…….

솔직히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어스 월드에서는 방송 한 번이면 대충 처리 될 만한 일, 전화 몇 통이면 당장 빠르게 대처 가능한 일이지만, 여긴 어스 월드가 아니다.

이 순간 문수르는 잠깐 고민했다.

‘그래, 여긴 어스 월드가 아니다.’

어스 월드라면 어떤 전염병이 생기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매뉴얼이 통할 것이다.

그러나 여긴 아니다. 제대로 된 매뉴얼이 있다고 해도 그게 통할거란 보장이 있는가?

‘피해는 피할 수 없다.’

최대한 희생자를 줄이는 게 어스 월드의 목적이라면, 케르빈 월드에서는 방향을 달리 봐야 한다.

‘희생자를 줄이는 것보다 이 병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문수르는 사고를 바꾸었다. 그가 습득한 기존의 매뉴얼은 잊었다. 대부분 뭉텅뭉텅 잘랐다.

‘원인을 파악하고, 치료법을 만든다.’

병자들을 관리하는 건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노력할 시간보다 치료법을 확보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이다. 그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죽는다고 해도 감수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건 치료법의 확보니까.

“헤인 경.”

문수르가 헤인을 불렀다. 그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문수르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하는 일, 그리고 헤인 경이 해야 하는 일을 말해줬다. 헤인은 문수르의 말을 금방 이해했다.

‘헤인 경, 역시 큰 도움이 된다.’

케르빈 월드에서 어스 월드의 지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다. 수용의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는 자조차 많지 않을 것이다. 헤인은 그런 소수의 인물이었다. 이해도 하고, 수용도 할 수 있는 인물!

문수르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동료였다.

문수르는 일단 시체로부터 병의 원인을 알 수 있는 시료를 채취한 후에 시체를 소거했다. 활활 태웠다. 질병이든 뭐든 다 타죽을 정도로 말이다. 잿더미도 그냥 버리지 않았다. 단단한 석관을 만들어 그 안에 넣은 후 땅에 묻었다.

그리고 병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파악하기 위해 역으로 추적을 시작했다.

그때 환자가 더 늘어났다.

문수르는 환자에 대한 처리는 헤인에게 맡겼다. 그들을 격리하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치료를 진행시켰다. 물론 가장 중요한 사실을 헤인에게 인지시켰다.

“그 무엇보다 헤인 경의 목숨이 중요합니다. 위생에 철저하세요.”

“알겠습니다.”

헤인이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손해다.

한편 문수르는 환자들이 단순히 한 지역이 아니라, 이제르트 부속령의 여러 장소에서 발생된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뭐지?”

그게 문수르에게는 의문으로 다가왔다.

전염병이 퍼지는 건 맞다. 그러니까 전염병이다. 이제르트 부속령 전체가 전염병의 원인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발병 장소를 보면 마치 제한된 장소에서만 병이 퍼진 느낌이다.

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우연인가?”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솔직히 의심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 의심은 어떠한 일을 계기로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 계기는 다름 아니라 헬라 교단, 바우먼 주교의 움직임이었다.

“신께서 이제르트 부속령을 버리셨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바우먼 주교가 갑자기 등장해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그냥 뱉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르트 자작과 그 수하가 헬라 신의 노여움을 샀다. 이제르트 부속령의 모든 이들, 헬라 신께 진심으로 무릎 꿇고 엎드리지 않은 자 신의 분노 앞에 쓰러질 것이다.”

아주 작정을 하고 말을 내뱉었다. 이제까지 바우먼 주교가 자기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강하게 나온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적은 없었다.

그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자다. 그런 그가 이렇게 갑작스레 강하게 나온다면, 그 이유는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 뒤를 봐준다는 소리다. 확신이 있다는 거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와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때 문수르의 머릿속에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설마 이 병을 바우먼 주교가 직접 퍼뜨린 건가?’

병을 퍼뜨린다는 개념.

무시무시한 개념이지만, 인간이라면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어스 월드에서는 생화학 무기를 아주 유용한 전략적 무기로 사용하지 않았던가?

병을 통제할 능력만 있다면 문제될 건 없다. 아니, 병을 제대로 다룰 능력과 여건이 된다면 병을 무기로 이용한다는 건, 기가스나 마법보다 훨씬 위력적일 것이다.

‘아니야. 그래도 신을 모시는 자인데.’

그러나 바우먼 주교가 못돼 먹은 인간이긴 하지만, 병을 무기로 쓸 정도의 위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질병을 무기로 쓴다는 건 확실한 능력과 자금 그리고 체계가 필요하다. 바우먼 주교가 독단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 바우먼 주교가 아니라 헬라 교단이 일을 진행했다는 건데, 헬라 교단이 병을 무기로 쓰는 교단이었던가?

아니라고 확신은 못하겠지만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젠장.”

뭐든 간에 한 번 의심이 시작되니 걷잡을 수가 없다.

“당장 바우먼 주교를 족칠 수도 없고.”

바우먼 주교가 수작을 부렸다면 그를 족치면 치료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문수르의 처지 아닌가?

더군다나 바우먼 주교의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바우먼 주교를 지금 당장 건드리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다.

“젠장.”

더욱이 전염병의 전염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병 자체가 가지는 치사율도 낮은 편이 아니었다.

“내 선택이 틀린 건가?”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치료법의 확보에 더 힘을 쓰겠다는 문수르의 선택. 그러나 매일 죽어가는 영지민들을 생각하니, 그 선택을 한 스스로가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빨리 찾아야지.’

문수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문수르의 처지는 더욱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우먼 주교의 공세가 더 강해진 것이다.

4.

“신이 주신 고난과 역경입니다. 헬라 신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만이 이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헬라 신께 기도하십시오. 그것만이 이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우먼 주교의 말에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바우먼 주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속마음은 달랐다.

‘흐하하,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다.’

사람이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말한 대로 기도를 할 때. 그때에는 마치 자신이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는 한다. 이럴 때면 왕이 부럽지 않다.

바우먼 주교는 작금의 상황에 만족했다.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병에 걸린 영지민들은 더 이상 병원이란 괴상한 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모두가 헬라 교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넘치는 기부금과 함께 말이다.

‘문수르란 놈은 움직임이 없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이런 상황에서 문수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도리가 없는 거겠지.

전염병 앞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흐흐흐,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바우먼 주교는 그런 문수르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를 품었다.

바우먼 주교가 품은 독기의 정체를 문수르가 알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수르는 골치가 아팠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건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헬라 신전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했다.

오히려 문수르는 지켜봤다. 만약 정말 바우먼 주교가 이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단숨에 병을 고칠 수 있는 치료법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동시에 이 병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우먼 주교가 의도적으로 뿌린 전염병이라 여길 수도 있으니까.

이 부분은 확실했다.

“바우먼 주교가 전염병을 뿌린 건 확실하다.”

역학조사 결과 이건 자연스럽게 생긴 전염병이 결코 아니었다. 이미 전염병이 시작된 지역의 식수를 조사한 결과 병균이 발견됐다. 더 웃긴 건 그 식수를 농업용으로 사용함에도 토지 등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균이 식수에 퍼진지 얼마 안 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그 식수가 공급되는 원류(原流)에서 병이 시작된 것인가? 해서 상류까지 조사를 했지만 병균은 찾을 수 없었다.

중류부터 갑자기 병균이 득실거릴 리 만무하다. 거기에 모든 식수가 오염된 것도 아니었다. 똑같은 물줄기에서 떨어져 나왔는데 어디는 감염이 되고, 어디는 멀쩡하다.

사실 이 정도 결과가 나왔을 때, 그리고 헬라 신전을 찾아간 환자들 중에 차도를 보이는 환자가 보였을 때는 그냥 앞뒤 재지 않고 복면이라도 쓴 채 바우먼 주교를 납치해다가 고문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바우먼 주교의 다음 행동이 문수르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내가 잘못해서 신의 저주가 내렸다고?”

바우먼 주교는 사람을 치료하면서, 언제나 강조하듯 말했다.

“헬라 신을 향한 이제르트 자작의 불신이 결국 헬라 신의 저주를 부른 것입니다. 문수르 경의 오만함이 신의 분노를 부른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헬라 신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우시나, 자신을 부정하는 자에게는 한없이 엄하십니다.”

뭐 이 말까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바우먼 주교의 행동이 끝나기 무섭게 문수르 앞에 온 한 장의 편지.

“보우런 남작이 수작을 부렸어.”

보우런 남작의 이름으로 보내진 편지 한 장이 문수르의 생각을 바뀌게 만들었다.

보우런 남작은 편지로 말했다.

- 영지전에 패배하여 영지를 빼앗긴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의 후회도, 앙심도 없다.

첫문장은 그럴싸했다.

-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의 무능함으로 인해 나의 영지민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감히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가소롭기만 했다.

- 때문에 나 보우런 남작은 영지민들의 미래를 위해 다시 한 번 이제르트 자작과 싸울 것이다. 나에게 나의 영지민들을, 콩탄 왕국의 백성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

그 편지를 다 읽었을 때 문수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지랄을 하는군.”

그렇게 영지민을 위했으면 세율을 낮추던가 아니면 영지민들의 복지를 위해 돈을 쓰던가!

이제까지 개판 같이 영지를 운영한 주제에 이제와서 영지민들이 불쌍하다고?

웃기는 소리다.

문수르가 이제르트 부속령의 영지민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는데!

하물며 까놓고 전염병하고 영지 운영 능력하고는 연관이 크지 않다. 병은 병이다. 말 그대로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병을 가지고 걸고 넘어지는 거다.

물론 보우런 남작은 이 병을 신의 저주, 즉 이제르트 자작이 무능해 신이 벌을 준다는 것으로 꾸몄다. 합리적인 이성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개소리라고 치부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케르빈 월드에서는 신의 말이 그 어떤 진리나, 지식보다 중시된다.

하물며 보우런 남작이 그냥 나설 리 만무하다. 분명 헬라 교단을 움직였을 것이고, 만약 헬라 교단이 이 병을 신의 저주라고 공식 발표라도 한다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뭐라고 항변할 도리가 없어진다. 병균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준다고 그들이 믿기는 할까? 괴상한 사술(邪術)이라고 지랄을 떨겠지.

결국 또 다시 영지전을 해야 한다.

‘지금 다시 영지전을 하는 건 부담이다.’

보우런 남작이 기가스를 잃었지만 그 배경에는 빅토리안 공작이 있다.

새로운 전력 보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반면 이제르트 자작령은 현 시점에서 갑작스런 전력 보강이 쉽지 않은 상황.

아이언히트를 제조하지만 파일럿은 부족한 상황이고, 병사의 숫자도 아직 부족할 뿐더러, 날씨가 풀리면 동면을 끝낸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이 설칠 것이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문수르가 고민을 시작했다.

영지전 없이 이번 일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

그걸 찾는 게 문수르의 또 다른 과제였다.

============================ 작품 후기 ============================

뭐 한 거 없는데 벌써 금요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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