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33화. 저주.>
1.
“바우먼 주교께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말하기도 짜증이 날 정도입니다. 저로써는 하루 빨리 보우런 남작님께서 돌아오시길 신께 기워할 뿐입니다.”
조촐한 자리였다. 빵과 와인, 그 정도만이 식탁 위에 간촐하게 올라온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는 진지하고, 무거웠다. 그 묵직한 자리에 참석한 이는 세 명이었다.
한 명은 최근 영지전에서 패배해 가진 영지를 잃은 보우런 남작. 다른 한 명은 이제는 이제르트 부속령이 되어버린 전 보우런 남작령의 헬라 신전의 주교 바우먼.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그렇지요, 하루 빨리 보우런 남작이 영지를 되찾아야지요.”
후덕한 인상, 두툼한 살집, 그 살집에 가려진 눈동자. 보기에는 아둔해보이지만, 이름을 듣는다면 모두가 무시할 수 없는 자.
베르베 백작이었다.
빅토리안 공작의 명에 따라 불스 백작과의 일전을 준비하던 그가 바우먼 주교와 보우런 남작이 함께하는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바우먼 주교는 처음 보는 베르베 백작의 모습에 진땀을 흘렸다.
‘이 자가 콩탄 왕국의 백작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란 말인가?’
베르베 백작에 대한 소문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소문은 그가 은밀한 거래를 한다는 소문이다. 그 은밀한 거래에서 거래되는 품목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다. 노예를 사고판다. 문제는 정당한 이유로 노예가 된 이들이 아니라, 강제로 멀쩡한 이를 노예로 만들어 사고판다는 소문. 아름다운 귀족가의 여식을 강제로 납치해 약물 따위를 이용해 성노예로 판다는 이야기, 뛰어난 실력의 기사를 잡아다 약물이나 마법 따위를 이용해 개보다 충성스러운 병사로 만들어 판다는 이야기…… 여하튼 그가 파는 인간이란 품목은 단순하지 않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이다.
콩탄 왕국에서 노예 거래가 금지된 건 아니지만, 멀쩡한 귀족가의 여식이나 기사를 납치해 약물이나 마법을 이용해 노예처럼 부리는 건 정당한 행위는 아니니까.
그래도 좋은 소문은 아니다. 이런 소문 때문에 베르베 백작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넘쳐난다.
바우먼 주교도 그랬다.
베르베 백작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런 사람과는 상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끄응.’
그런데 세상일이란 역시 모르는 법이다. 이렇게 베르배 백작과 한 자리에 있는 날이 올 줄이야. 더군다나 그 앞에서 억지로 미소까지 지으려니, 참으로 곤욕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래, 내 미래를 위해서.’
보우런 남작이 베르베 백작을 대동하고 자리를 만드는 이유, 다름 아니라 이제르트 부속령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다.
“솔직히 지금 당장 이제르트 자작을 짓밟을 만한 힘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우런 남작이 운을 띄었다.
“그러나 명분이 없습니다. 바우먼 주교님께서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영지전에는 명분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말인데…….”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긴장한 기색으로 보우런 남작의 이야기를 듣던 바우먼 주교의 표정이 어느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나중에는 바우먼 주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경악 그리고 분노, 그런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보우런 남작, 아무리 그래도 그건…….”
보우런 남작의 제안. 그건 제 아무리 자기 사정이 급한 바우먼 주교라고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의 것이었다.
바우먼 주교의 이런 모습에 보우런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바우먼 주교님,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 해봅시다. 바우먼 주교께서도 그리 상황이 좋지만은 않으실 텐데요? 그동안 몰래 기부금을 빼돌리고, 제게 받은 사례금이 보통은 아닐 텐데요?”
“그, 그건!”
보우런 남작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바우먼 주교에게 뇌물을 준 건 바우먼 주교가 귀여워서 준 게 결코 아니다. 이런 날을 대비해서 뇌물을 뿌린 것이다.
성직자에게 돈이란 독이 든 사과다. 알면서도 먹는다. 그리고 결국 독에 취한다.
“사실 일만 잘 처리되면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약속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다시 영지를 되찾는다면, 결코 바우먼 주교님을 섭섭하게 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 제가 언제 바우먼 주교님을 섭섭하게 대한 적이 있었습니까?”
“끄응…….”
보우런 남작의 계속되는 설득에 결국 바우먼 주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2.
이제르트 자작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가누스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테블스 동맹이라고 해도 이제르트 자작의 호위직은 가누스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은 모양이다. 대신에 폐욤 족장으로부터 긍정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마법을 이용한다면 암살자의 침입에는 어느 정도 대비가 충분히 가능할 걸세. 또한 가누스는 아니더라도 귀가 밝을 엘프를 이제르트 자작의 호위로 붙여두도록 하지.”
폐욤 족장은 문수르가 뭐를 하든 그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줬다. 실제로 그럴 만큼 결과물이 나오고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생산되는 아이언히트는 탈라트 부족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여기에 테블스 산을 일부 개간하는데 성공했고, 그 중 일부분을 농지로 이용하게 되면서 탈라트 부족의 식량난이 해결됐다.
가장 큰 소득은 문수르의 말대로 신목을 다른 곳에 심자, 죽어가던 신목이 살아났다는 점이었다.
폐욤 족장이 문수르를 좋게 보는 가장 큰 이유도 결국 신목이 부활한 덕분이다.
일이 나름 좋게 풀려갔다.
‘그래서 걱정이군.’
여전히 이제르트 부속령에 남아있는 문수르는 좋게 풀려가는 현 상황에서 오히려 불길함을 느꼈다.
‘바우먼 주교가 너무 조용하다.’
특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바우먼 주교였다.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보였어야 하는 인물이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다. 요즘에는 신전 운영도 그냥 하느니, 마느니 한다. 얼굴을 비추는 경우조차 드물다. 최근 일주일 동안은 영지에서 바우먼 주교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도망친 건가?’
바우먼 주교가 후환을 두려워 해 도망쳤을 가능성…… 충분히 있다. 그동안 해먹은 게 있는데, 헬라 교단에 들키기 전에 적당히 재산을 챙겨서 도망치면 남은 인생 호사를 누리기엔 부족하지 않을 터.
‘차라리 그게 낫지.’
그런 인간이 호사를 누린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그런 인간이 이제르트 부속령에 남아 애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문수르의 기대에 불과하다.
바우먼 주교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예의주시해야겠지.’
헤인 경은 언제나 바빴다.
이제르트 부속령이 남작령 크기이기는 하지만, 영지민의 숫자는 꽤나 많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사람이란 게 아픈 곳이 없어도 공짜로 고쳐준다면 없던 병도 생기고는 한다. 하물며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고 소문이 난 헤인 경이 공짜로 사람을 고쳐주겠다는데, 시간이 나는 영지민들은 무조건 병원을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날 때 한 번, 저녁에 잠들기 전에 한 번, 이 약을 꼭 달여드시오. 그리고 물은 반드시 끓여드시고.”
“그게…… 몸을 데울 장작도 없습니다.”
“부족한 게 있다면 밖의 병사들에게 말하시오. 이제르트 자작님의 은혜는 거룩해서, 그대들의 부족함을 결코 좌시하지 않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더불어 헤인 경은 치료를 할 때마다 이제르트 자작을 꼭 언급했다.
헤인 경도 기사다. 지금은 의사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영지 운영에 전반적으로 참여했던 자다. 어째서 문수르가 의술을 펼칠 때마다 이제르트 자작을 언급하라 했는지, 그 의중을 모를 리가 없다.
“헤인 경, 시간은 나십니까?”
그때 문수르가 헤인을 찾아왔다. 헤인 경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문수르 경이 필요하시다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요.”
헤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여전히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헤인은 곧바로 문수르와 독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문수르가 왔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할 만큼 담이 크거나, 정신 나간 영지민은 적어도 이제르트 부속령에는 없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 수고라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사람을 치료하는 게 제게는 일이며, 공부인데. 하루하루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실력이 많이 느셨습니다. 요즘은 아예 전용 수술도구도 가지고 계시던데.”
“보셨습니까?”
“봉합 때 사용하는 실이 신기해보이더군요.”
“엘프 족의 머리카락입니다.”
“호오. 신기하군요.”
“인간의 머리카락보다 훨씬 질길 뿐더러, 가늘기도 하더군요. 깨끗하기도 하고. 더러운 실로 봉합을 하면 감염 때문에 염증이 생기는데, 엘프 족의 머리카락은 그런 게 없습니다. 아, 그리고 수술 도구들은 말론 님이 특별히 제작해주신 겁니다. 너무 잘 들어서 가끔 깜짝깜짝 놀라고는 합니다.”
헤인은 마치 지금의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사실 헤인에게 있어 문수르는 스승, 그 이상의 존재였다. 제자가 스승에게 자신의 발전을 보여주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다. 헤인은 문수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성장했다고!
문수르는 그런 헤인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보다 제자육성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나 헤인이라도 모든 일이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특히 문수르도 중요시 했던 제자 육성, 즉 새로운 의사의 육성에 있어서느 결과물이 좋지 못했다.
이미 한 차례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제자를 모집했지만 지원률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더군다나 문수르가 가르쳐준 의술은 마음만 있다고 배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재능이 필요했다.
어스 월드에서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자들만이 의사가 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추리고 저렇게 추리는 사이 제자를 한 명도 키우지 못하게 됐다. 그저 도우미 정도만 있을 뿐이지.
“그게…… 이제르트 부속령에 의외로 괜찮은 아이가 보입니다.”
“호오, 헤인 경에 눈에 들 정도면 재능이 대단한가 봐요?”
“그 때문에 한 번 문수르 경을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혹여 제가 제자를 두고, 이 의술을 가르쳐주어도 되는 건지…….”
“그런 문제라면 제게 상의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헤인 경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저야 말로 헤인 경의 도움에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저런 덕담이 오고가는 사이.
밖이 시끄러워졌다.
문수르와 헤인이 대화를 나누는데 소란이라니? 병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병사들조차 이러다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웅성거림만 있을 뿐,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보통 이들이라면 이 소란에 짜증을 냈을 터.
그러나 문수르와 헤인은 달랐다. 그들은 이 소란이 보통 소란이 아님을 깨닫고, 긴장했다.
“무슨 일인가?”
문수르와 헤인이 대화를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가장 먼저 바닥에누운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걸 본 문수르는 직감했다.
‘시체다.’
생기(生氣)가 티끌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건 분명히 시체다.
‘왜 시체가?’
보통 시체가 생기면 알아서 매장을 한다. 굳이 병원에 가지고 올 필요는 없다. 헤인이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소문이 돌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
그때였다.
- 주인님.
로이드가 문수르를 불렀다.
‘뭐야 갑자기?’
- 조심하십시오. 아무래도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체 같습니다.
전염병!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문수르가 소리쳤다.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움직이지 마라! 모두들 내 명에 따른다!”
갑작스런 문수르의 호통.
이제르트 부속령의 고난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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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내일 버티면 즐거운 주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