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17화 (115/293)

117화

6.

빅토리안 공작은 두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를 호위하는 기사조차 방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있는 건 어둠과 침묵, 그 두 가지뿐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빅토리안 공작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귓속말을 속사이듯, 그 귓속말에 반응하듯. 남들이 봤다면 빅토리안 공작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우런 남작이 실패했군.”

이윽고 빅토리안 공작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말과 함께 빅토리안 공작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부릅뜬 빅토리안 공작의 안광(眼光)은 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빛이었다. 영롱함 혹은 아름다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많은 붉은 빛이었다.

사악함, 비열함, 처절함…… 빅토리안 공작의 눈빛이 품고 있는 기운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처음 보는 형식의 기가스가 4대나 등장했다고? 제이머스 후작 놈이 음모를 꾸미는건가?”

중얼중얼.

“아니야. 제르둔 후작을 고문했을 때는 그런 말이 없었어. 제이머스 후작이 수작을 부렸다면 제르둔 후작이 모를 리가 없지. 아무렴 제르둔 후작은 거짓말을 해도 놈의 시체와 살점은 거짓말을 못하니까.”

계속해서 혼잣말을 지껄이던 빅토리안 공작. 그 순간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기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는 빅토리안 공작을 보자마자 허리를 깊게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보아스 백작과 연락을 취해라.”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바로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따악! 빅토리안 공작은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새로운 기사가 문 너머에서 등장했다. 그 기사 역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베르베 백작에게 연락을 취해라. 내 영지로 오라고.”

“알겠습니다.”

그 기사 역시 빠르게 움직였다.

이윽고 빅토리안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두둑!

그 순간 그의 뒤편에 늘어져있던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움직인 건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7.

문수르가 보우런 남작령에 머문지 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몇 가지 일이 일었다.

일단 보우런 남작령의 이름이 바뀌었다. 이제르트 부속령이란 이름을 가지게 됐다.

두 번째로 바뀐 일은 학교가 세워진 것이었다. 아직 이제르트 자작령에도 세워지지 못한 학교가 이제르트 부속령에 세워진 것이다.

사실 문수르도 학교까지 세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아마 계획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콘돌.

그와의 만남이 문수르로 하여금 이제르트 부속령에 학교를 세우도록 만들었다.

처음 그와 만난 건 한 달 전이다.

아이어가 임시지만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역할도 생겼다. 이제르트 부속령에서 문수르의 호위 및 이제르트 부속령의 경비를 책임지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보우런 남작을 따르던 기사들이 보우런 남작과 함께 떠난 바람에 결과적으로 이제르트 부속령의 기사는 아이어 밖에 없게 되었으니까. 아이어도 정식 기사는 아니었지만 보우런 남작 밑에서 기가스 파일럿으로 활동했으며 오러 나이트인 그를 정식 기사가 아니라고 푸대접을 할 만한 병사는 없었다.

더불어 아이어는 기사들 사이에서는 왕따나 다름없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다.

“아이어 경! 아침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찰스. 오늘도 수고해줘.”

“어제 하신 명령, 일찌감치 끝내뒀습니다.”

“역시 파이오, 당신이 최고야.”

아이어, 그는 덕장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가진 지식이나 배움이 깊지는 않았지만 인품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힘이 있다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언제나 상대를 보며 자세를 낮추었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해결하려 했다.

보우런 남작 밑에서 어떻게든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다 보니 그런 성정이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다. 이런 아이어를 싫어하는 병사는 없었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의외의 소득이었다.

‘가장 걱정되던 부분이 해결됐군.’

이제르트 부속령 내에 남게 된 사병을 관리하는 게 사실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무기가 있고, 힘이 있다. 그런 그들이 이제르트 자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문수르도 예의주시했다. 혹여 폭동이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며 그들을 대접했다.

당연히 문수르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데, 병사들이 팔자 늘어지게 행동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병사들 역시 새롭게 주인이 바뀌었기에 새 주인의 눈치를 보며, 극도로 긴장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긴장감이 극의에 다다르지, 서로가 피곤해진다. 이런 과정에서 문수르와 이제르트 부속령 내의 병사들 사이에는 물과 기름처럼 보이지 않는 막이 생겼다.

그 막을 아이어가 단숨에 치워버린 것이다.

아이어 덕분에 병사들과의 관계가 개선되자, 꽉 막혔던 부분들이 뚫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병사들의 의견이 아이어를 통해 문수르에게 조금씩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처우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문수르 입장에서는 좋은 점수를 딸 기회였다. 그들의 불만을 해결해준다면 문수르에 대한 평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무조건 잘 해주지만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한 법이다. 채찍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채찍을 들었다. 심지어 큰 죄를 저지른 병사 두 명을 문수르가 직접 처형했다. 피를 무서워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문수르가 과감하게 채찍을 휘두르자, 오히려 문수르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갔다.

그 무렵이었다.

이제 병사들이 아니라 영지민들이 문수르를 받아들일 무렵, 아이어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문수르를 찾아왔다.

“저기…… 문수르 경. 실례하겠습니다.”

쭈뼛쭈뼛, 고개를 숙이는 아이어의 모습에 문수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바로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어. 이내 아이어가 갑작스레 문수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문수르는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그런 문수르에게 연타를 날리듯, 아이어가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바보 같이 문수르 경의 명예에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아이어 경, 갑자기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말하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이후 아이어가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영지 내에서 아이어의 주가는 이미 상한가를 여러 차례 찍은 상황이었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핍박 당하고, 구박 당하기만 했던 아이어에게 그런 주변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신비롭고 즐거운 것이었다. 마치 구름 위에 올라탄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어가 아주 난봉꾼마냥 행동한 건 아니었다. 아이어의 성정은 그런 성정이 못 됐으니까.

문제는 오히려 사람이 착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힘이 없어 외면했던 사람들을 이제는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서서 행동했다.

그러다가 오래 전에 만났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됐다.

그 친구의 이름이 콘돌이었다.

“그러니까…… 콘돌은 보우런 남작님의 시동이었습니다.”

시동.

그냥 심부름꾼이다. 귀족들의 묘한 취미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들을 심부름꾼으로 쓰는 취미 말이다.

시동은 대개 똘똘한 아이들이 맡는다. 최소한 글을 읽고 쓸 줄을 알아야 하고, 여기에 귀족가의 예법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보통 시동으로 지내던 아이들은 성장하면 그 귀족가의 하인으로 지내게 된다.

‘이 세계를 기준으로는 하인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지.’

귀족가의 하인의 삶은 평민들이 나름 꿈꾸는 삶이다. 일단 귀족가 함께 성에서 생활하게 된다. 봉급도 나온다. 먹을 것도 준다. 잠자리도 마련해준다. 여기에 귀족가에서 지낸다는 것 자체가 평민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나 다름없다.

콘돌은 보우런 남작이 나름 총애하던 시동이었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콘돌은 절 구해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콘돌이 없었으면 저도 여기 없었을 겁니다.”

아이어의 삶이야 비루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식사조차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배부르게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우런 남작은 아이어가 잘못을 할 때마다 그를 크게 혼냈고, 그럴 때마다 음식을 주지 않았다. 배부른 날보다 배고픈 날이 더 많았다.

콘돌은 그런 아이어에게 몰래 먹을거리를 줬다.

서슬 퍼런 보우런 남작이 있음에도 아이어를 도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콘돌은 제 친구입니다.”

친구!

그 이유 하나만으로 콘돌은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잡은 채 아이어를 도와준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이들의 우정이다. 어느 순간 콘돌이 아이어에게 몰래 음식을 주는 게 들켰고, 그 길로 콘돌은 성에서 쫓겨났다. 당장 목이 잘리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 이후 아이어는 콘돌을 만나지 못했다. 기회도 없었다. 아이어는 언제나 보우런 남작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까.

그런데 최근 콘돌이 아이어를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반가워서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술이 한두 잔 쌓이기 시작했다. 아이어는 본래 술을 그리 많이 마시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실 줄도 모른다. 보우런 남작이 아이어에게 술을 마실 경험을 줬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술이 계속 들어갔다.

그렇게 서로가 반쯤 취했을 무렵…….

콘돌이 묘한 부탁을 했다.

“아이어…… 아니, 아이어 경. 나 좀 도와주시오. 내 아이들을 살려주시오.”

그 부탁에 아이어는 놀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를 구해준 친구에게 뭔들 못할까!”

취기에 나온 부탁이었다.

그리고 취기에서 깼을 때, 아이어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콘돌이 말한 아이들은 한 명이 아니었으니까.

“몇 명이나 됩니다.”

“그게…….”

“친구 분이 정력이 좋아서 아이를 많이 낳기라도 했습니까.”

“백 명…… 백 명 조금 넘는다고 했습니다.”

백 명!

콘돌이 살려달라고 부탁한 아이들의 숫자는 무려 백 명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고아들이군.’

콘돌, 그는 자신처럼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고아들을 모아 키운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케르빈 월드에 무슨 복지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주가 나서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극히 드문 경우다.

‘가만 생각하면 이제르트 자작령에서도 고아원은 운영하지 않았지.’

심지어 나름 영지민들을 생각한다는 이제르트 자작조차 고아원을 세우지 못했다.

단순히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아원을 대신해 버림 받은 아이들을 어느 정도 데려다 키우는 단체가 있긴 했다.

신을 모시는 자들, 바로 교단이 그러한 일을 했다. 그러나 교단은 아이들을 가려 받았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절대 받지 않았고, 또한 교단도 재정 상황이 있는 지라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쁘거나 잘 생겼거나 혹은 다른 재능이 있는 아이들 위주로 가려 받았다.

사실 이제까지 고아들을 데리고 버틴 것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상황이 됐다. 겨울이 되자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먹을 게 없어졌으니까.

아사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콘돌은 절망했다.

그런데 갑작스런 소식이 들여왔다. 영지전이 치러진다는 소식, 보우런 남작이 패배했다는 소식, 보우런 남작이 떠난다는 소식, 뒤숭숭한 영지 상황…….

그 와중에 아이어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가 되어 이제르트 부속령의 요직에 앉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때 콘돌은 염치 불구하고 아이어를 찾아간 것이다.

아이어는 이마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취해 문수르 경의 명예에 먹칠을 했습니다.”

약속은 했다.

하지만 아이어 입장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이어가 고아 백 명을 먹여 살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결과적으로 아이어가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아이어가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손가락질이 문수르에게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뭐, 그 정도야.’

사실 문수르 입장에서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손가락질 정도면 애교 중의 애교다. 당장 이제르트 자작가에 활시위를 겨누고, 칼을 겨누는 이들이 수두룩한 세상인데.

‘그건 그렇고 사람이 참 순수해.’

한편으로는 이런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사과를 하는 아이어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다.

‘그래, 이런 사람도 필요하지.’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자신 곁에 이렇게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동시에 고아라는 말에 몇 가지 계획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고아에 대한 처우는 확실히 중요하다.’

보통 영주들은 고아에 대한 문제를 고려조차 안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고아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오히려 고아들을 잡아다 처리하는 영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영지가 번듯하게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하는 법이다.

‘고아도 고아지만, 여긴 교육기반이 너무 부족해.’

고아뿐만이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평민들이 키우는 자식들의 삶도 고아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버지, 어머니가 번듯한데 먹지 못해 아사하는 아이들이 나오고, 자식을 파는 부모가 있을 정도면 할 말 다한 셈이지.

또한 문수르는 10년 후 그리고 그 후의 미래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이들의 교육,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이제까지 사정 때문에 그 중요한 일을 뒷전으로 미뤄두었을 뿐이다.

‘고급 교육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소양교육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여기서 문수르는 곧바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콘돌이란 자,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에 백 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모아 키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아직 자금 여유는 충분하다. 그러면 임시로 고아원을 만들고, 그 고아원의 관리를 콘돌이란 사내에게 맡긴다면?

더 나아가 그 고아원에서 몇 가지 간단한 교육 프로그램을 돌려 학교의 기능도 함께 한다면?

‘나쁠 건 없지.’

문수르가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아이어 경,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시지요. 그리고 아이어 경의 친구분과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