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16화 (114/293)

116화

4.

전쟁은 전쟁 자체도 힘들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 힘들다. 영지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영지전에 승리한 대가로 영지를 얻었다는 건 권리를 얻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의무와 책임 역시 얻었다는 이야기다. 당장 문제가 되는 건 두 가지다.

영지민들의 분위기 그리고 주변 영지와 얽힌 관계다.

보우런 남작은 훌륭한 영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주 쓰레기 같은 영주 역시 아니었다. 때문에 보우런 남작령 내에서는 이제르트 자작을 탐탁지 않아하는 무리들이 분명 등장할 것이다.

주변 영지와의 관계는 더 껄끄럽다. 주변 영주들이 빅토리안 공작가의 측근인 보우런 남작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런 와중에 정치적으로 외톨이나 다름없는 이제르트 자작이 들어왔는데 곱게 행동할 리가 만무하다.

“이래도 고민, 저래도 고민이군.”

앞으로 문수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그런 일이다.

“당장은 숨 돌릴 틈도 없겠어.”

일단 문수르는 당장 먹을 것부터 해결하고자 했다. 보우런 남작령은 부유한 영지가 아니었다. 부유하다고 해도 그 부유함은 보우런 남작, 개인의 것. 영지민들은 언제나 배고팠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식량을 가져와 그것들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먹을 것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이다. 우중충했던 보우런 남작령의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업무를 지휘하기 위해서 문수르는 보우런 남작령에 아주 자리를 잡았다.

몇몇 사람들은 문수르가 보우런 남작령의 영주가 되는 게 아니냐,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 문수르는 영주가 될 수 없다.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기사 이상의 대우를 받지만, 당장 성조차 없다. 정식으로 기사 작위조차 받지 못했다는 의미다. 물론 당장 원한다면 문수르는 얼마든지 작위를 받을 수 있다. 무려 오러 마스터 아닌가? 백작 위 정도라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받아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정치적인 문제도 있다. 문수르가 정말 백작 위를 받고 싶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를 나와야 한다. 또한 혹여 그게 아니더라도 문수르가 백작 위를 받는 순간 이제르트 자작과의 관계가 미묘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람들은 혹시나 했다. 문수르가 이제까지 세운 공이라면 이제르트 자작이 보우런 남작령을 통째로 문수르에게 줘도 이상할 게 없을 테니까.

어쨌거나 그 정도로 문수르는 보우런 남작령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보우런 남작령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

‘마구르가 있어서 다행이다. 적어도 이제르트 자작령을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

그나마 마구르가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불철주야 업무를 처리해주니까 이렇게 숨이라도 돌리는 거다. 마구르가 아니었으면 문수르는 과로로 죽었을 지도 모른다.

“늦은 밤까지 이게 무슨 고생인지…….”

- 실제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건 저입니다만?

물론 대부분의 중요 업무들을 처리하는 건 로이드였다. 특히 회계 쪽은 문수르는 진즉에 손을 놨다. 문수르가 처리하는 건 로이드가 내놓은 결과물을 다시 확인하고 수정하고, 결재를 하는 정도?

“그래서 뭐? 초과수당이라도 달라는 거야?”

- 뭐, 알아주셨으면 해서 하는 말입니다.

“나중에 회장님한테 보고서 낼 때 열심히 했다고 네가 써서 내면 되잖아?”

그때였다.

-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농담을 냅던 로이드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문수르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침입자군.’

사실 문수르가 보우런 남작령에 남은 가장 큰 이유는 지금과 같은 경우…… 침입자나 의문 모를 공격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보우런 남작이 그냥 물러날 리는 없다. 더군다나 보우런 남작령은 보우런 남작이 가장 잘 아는 땅 아닌가? 문수르가 모르는 비밀 통로 같은 걸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승리에 취해 방심을 하고 있다면, 보복 기습을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때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문수르가 남아야 했다.

‘드디어 왔어.’

문수르가 빠르게 움직였다. 로이드가 알려준 방향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내성의 성벽을 지나, 단숨에 외성의 성벽까지 도달했다. 침입자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100미터 내의 거리가 되었을 때 문수르의 창은 어느새 섬뜩한 창날을 앞세운 채 돌진하고 있었다.

- 아이어 보우런입니다.

그 순간 문수르의 귓가를 때리는 문수르의 음성.

파밧!

문수르가 도약했다. 지금의 가속은 문수르도 줄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상대를 피하기 위해서는 도약, 그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문수르의 몸이 붕 뜨며 빠르게 포물선을 그렸다.

츠츠츠!

착지도 쉽지 않았다. 땅 위에 창을 박은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내 힘을 내가 주체하지 못하는군.’

자세를 바로 잡은 문수르. 그제야 문수르의 눈에도 아이어의 모습이 들어왔다.

적당히 다부진 체격 그리고 검은 무언가를 덕지덕지 붙인 탓에 힘없이 늘어진 금발 머리. 굵은 턱선, 굵은 눈썹, 조금은 작은 눈.

확실하다.

“아이어 경 아닙니까?”

문수르는 상대를 보우런 경이 아닌, 아이어 경이라 불렀다. 아이어는 그런 문수르를 보고 놀란 눈을 떴다. 갑작스레 무언가가 달려오나 싶어서 긴장을 했는데 그게 문수르였다니?

“문수르 경이 여기에 왜……?”

놀라는 아이어. 그 순간 옅은 달빛 사이로 아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어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단순히 넘어지고, 굴러서 생긴 상처부터 날카로운 쇠붙이에 베인 상처까지…….

‘보우런 남작이 아이어를 죽이려고 했군.’

빠르게 상황이 파악됐다.

보우런 남작은 아이어를 설득하거나 그의 해명을 듣기보다는 그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역시 냉철해.’

이런 보우런 남작의 판단은 잔혹하지만 반대로 냉철한 판단이기도 했다. 보우런 남작에게 아이어가 귀중한 전력이겠지만, 기가스도 파손된 마당에 아이어를 품기보다는 혹시 모를 화근을 확실하게 제거하고자 했을 것이다.

반대로 아이어 입장에서는 날벼락일 것이다. 믿고 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일 것이다.

“침입자가 왔다고 해서 온 겁니다. 지금 보우런 남작령에서 쓸만한 인력은 저밖에 없거든요.”

“그래도 문수르 경께서 직접 나오시다니…….”

문수르 밑에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오러 마스터인 문수르가 이렇게 직접 행차한다는 건 아이어에게는 충격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이렇게 사람이 없습니다. 당장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런 아이어를 향해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말인데, 다시 제안하겠습니다. 아이어 경을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 말은 기습 공격이었다. 무방비한 상대의 가슴을 제대로 파고드는 기습 공격!

아이어는 이 상황에 당황한 듯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멍한 표정으로 그저 문수르만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문수르는 그런 아이어 앞에서 창을 거두었다.

“여기서 이렇게 서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갑시다.”

5.

아이어는 거침없이 음식을 먹었다. 먹는 게 아니라 흡입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어디에도 귀족가의 자제다운 예법은 없었다. 오히려 일반 평민들보다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단순히 배가 고파서?

그건 아닌 것 같다. 물론 정말 배고프면 식사예절 따위는 염두에 두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예절이란 저도 모르게 몸에 배는 법이다.

문수르는 혀를 찼다.

‘보우런 남작이 아주 제대로 개수작을 부렸군.’

보우런 남작은 일부러 아이어에게 그릇된 식사예절을 가르친 것이다. 이유? 어떻게든 아이어에게서 후계자 자격을 없애기 위해서다. 귀족가의 일이란 혹시 모르는 법이다. 더군다나 케르빈 월드의 기대 수명은 그리 높지 못하다. 온갖 질병도 있고 유전병도 있다. 심폐소생술 따위도 없다. 숨이 잠시 넘어가면 거기서 끝장이 난다.

그래서 보우런 남작은 어떻게든 아이어를 짓밟았다. 보우런 남작이 원하는 건 기가스를 다룰 능력, 단지 그것뿐이었다.

‘사람을 짐승처럼 키웠어.’

남의 자식이라면 이렇게 안 키웠을 것이다.

자기 자식이니까 오히려 이렇게 키운 거겠지.

문수르는 그게 가슴 아팠다. 아이어와의 인연은 길지 않지만, 문수르는 아이어의 재능을 인정했다.

‘나보다 낫다.’

아이어의 재능은 뛰어나다. 만약 정말 제대로 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자신이 노력을 가진 채 스스로를 연마했다면, 어쩌면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는 문수르가 아니라 아이어가 됐을 것이다.

그 재능이 신분, 그 보잘 것 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장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아이어가 가치 있는 것이지.’

때문에 문수르는 아이어를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세계는 결국 문(文)보다 무(武)가 우선인 세계다. 힘이 그 무엇보다 위에 있는 세계다.’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을 문수르가 등용한다고 해도, 사실 그다지 광고 효과는 없다.

그러나 아이어라면 다르다.

만약 문수르가 아이어를 오러 마스터로 만든다면? 그리고의 아이어가 살아온 배경이 밝혀진다면?

세상 모든 기사들 그리고 기사의 꿈을 품은 자들, 능력 있는 자들! 그러나 신분 혹은 출신이나 배경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한 자들이 이제르트 자작가로 모일 것이다.

아이어는 그걸 가능케 해줄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우걱우걱!

열심히 식사를 하던 아이어는 문수르의 물음에 행동을 갑작스레 멈췄다. 아이어의 표정이 굳었다.

“제, 제가 배운 게 없어서…… 혹시 무례를 저질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참 보기 좋게 드시는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저 입맛에 맞았는지, 그게 궁금해서 말입니다.”

“마, 맛있습니다. 이렇게 맛난 음식은 처음 먹어봅니다.”

“하하, 그렇습니다. 음식이 모자라면 좀 더 내오도록 하지요.”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이어가 손사래를 쳤다. 문수르는 그런 아이어의 모습에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참 순박하다.

‘이런 순박한 인간이 그런 특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아이어에게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대단한 카운터 공격 능력이 있다.

카운터란 게 사실 순박함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상대의 공격을 역으로 이용한다는 것, 상대보다 훨씬 약아 빠진 이들만이 해낼 수 있는 공격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그보다 제 제안은 어떻습니까?”

문수르는 계속해서 몰아 붙였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그렇게 대단한 세를 자랑하는 가문은 아니지만 아이어 경에게는 충분한 대우를 약속하겠습니다.”

“그게…….”

아이어 입장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따름이었다. 그런 아이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툭, 말이 나왔다.

“대체 문수르 경께서는 제게 이런 대접을 해주시는 겁니까?”

툭 던진 말이지만 핵심을 꿰뚫는 말이기도 했다. 아이어 입장에서 문수르의 호의는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이제까지 호의보다 적의를 받는 게 더 익숙한 아이어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문수르는 짧게 고민했다.

과연 무슨 대답을 해줘야 아이어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

“반대로 묻겠습니다. 아이어 경이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재물 또는 권력 혹은 여자라던가…….”

“저는…….”

아이어의 고민도 짧았다.

“제대로 검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아이어의 꿈은 조촐했다.

검을 제대로 배우는 것! 만약 정말 검이 싫었다면 아이어는 진즉에 보우런 남작가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검을 배울 기회가 있었기에 그 대우를 받으면서도 기꺼이 보우런 남작가에 남은 것이다.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아이어 경, 솔직히 말해서 제 꿈을 지금의 당신에게 말씀드리기는 조금 힘듭니다.”

“괘, 괜찮습니다. 제가 사실 많이 멍청합니다.”

“아이어 경, 상황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한 겁니다. 저는 아이어 경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아이어 경은 제대로 검을 배울 기회가 필요하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게 있습니다. 그럼 그걸 그냥 교환하면 되는 겁니다.”

마구르는 크나큰 이상을 가지고 있다. 남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이상이다.

그러나 아이어는 그게 아니다. 아이어는 아주 작은 것을 원할 뿐이다. 그에게 드높은 이상 따윈 없다. 단지 합리적인 현실이 중요할 뿐.

그런 아이어에게 이상이니 뭐니, 미래니 뭐니, 그런 말을 하면서 굳이 이해시키려는 건 멍청한 짓이다.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것.

지금 필요한 게 바로 그것이다.

문수르의 설명을 들은 아이어의 두 눈이 반짝였다.

“정말 그거면 되는 겁니까?”

“어떠한 선택을 하시든, 이제르트 자작가는 아이어 경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문수르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뱀 같은 미소였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토요일, 내일은 신나는 일요일, 모레는 지옥의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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