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31화. 보우런 남작령.>
1.
짝!
보우런 남작의 손바닥이 아이어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아이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네놈이!”
보우런 남작은 분노했다. 전쟁에서의 패배, 그에 대한 분노도 분노였지만 보우런 남작으로 더욱 분노케 한 건 문수르의 그 말이었다.
“네놈이 날 배신하려 했단 말이냐?”
배신!
“아닙니다.”
아이어는 부정했지만 보우런 남작은 아이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문수르의 말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 문수르란 자가 네게 그런 제안을 한단 말이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몰라?”
문수르는 갑작스레 말했다 아이어 보우런, 그를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많은 이들이 놀랐다. 놀라지 않은 건 둘이었다. 말을 뱉은 문수르 본인과 이제르트 자작, 그 둘 말이다.
이제르트 자작이 놀라지 않은 건 연기였다. 그라고 이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문수르로부터 사전에 언질을 듣지도 못했으니까. 그러나 문수르를 믿었기에, 이제르트 자작은 표정 변화 없이 대응했다.
이 사실을 보우런 남작이 알 리 만무하다. 보우런 남작은 이 모든 게 이제르트 자작의 의중이라고 여겼다.
‘그래, 생각해보면 너무 허무하게 당했다.’
의심은 밑도 끝도 없이 퍼졌다.
보우런 남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한 대의 기가스만 보유했어야 하는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무려 4대의 기가스가 나왔다.
하지만 이건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보우런 남작의 실수니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문제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태도였다. 전쟁이 너무 허무하게 끝났다. 서로의 전력을 놓고 보면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게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우리쪽 전력에 대한 정보가 전부 유출됐다.’
비슷비슷한 전력 그러나 압도적인 패배.
그렇다면 패배의 이유는 전력 외적인 부분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전쟁을 할 때 정보전이 중요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상대의 병력이 어떠한지, 그것만 제대로 알아도 전쟁에서는 절반을 이기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제르트 자작 측은 보우런 남작이 숨겨든 전력, 아이어의 존재까지 파악해 대응했다.
보우런 남작의 상식으로는 내부의 배신자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네놈이 배신을 한 거야.”
그리고 일반 병사 따위가 배신을 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기사 급 이상의 인물이 배신을 한 게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우런 남작에게 가장 먼저 의심을 받는 건 아이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어는 미칠 노릇이었다.
“절대…… 절대 제가 배신을 한 게 아닙니다. 단 한 번도 남작님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어는 절규하듯 항변했다.
그러나 보우런 남작은 더 이상 아이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작은 소용돌이가 생겼다.
훗날 거대한 폭풍이 될 소용돌이였다.
2.
이제르트 자작이 문수르를 찾았다. 처음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승을 거둔 것부터 해서,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와 피해의 정도, 앞으로의 이야기들…….
그러다 결국 한 명의 이름이 언급됐다.
“아이어 보우런이란 자. 보우런 남작가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보우런 남작가의 슬하에 있는 두 아들 중에 아이어란 이름을 가진 아들은 없던 걸로 알고 있네.”
“맞습니다.”
“그럼 사생아란 소리로군.”
귀족가의 이야기를 귀족인 이제르트 자작이 모를 리 만무하다.
“살려둔 게 신기하군.”
이제르트 자작이 봤을 때 보우런 남작은 뼛속까지 귀족인 자다. 자신의 핏줄이 절대적으로 고귀하다 생각하는 자다. 자신의 정통을 잇은 자가 아니면 결코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 또한 자신의 후계자에게 위협이 될 존재라면 가차없이 죽이는 자.
보우런 남작 같은 귀족은 사생아를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 자식으로 인정한다? 그런 경우가 가끔 있다. 정실 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했을 경우 혹은 남아(男兒)가 필요할 경우.그러나 보우런 남작은 두 경우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다.
“재능이 상당합니다.”
“체격은 보통 수준이던데.”
“제가 키우면 1년 안에 오러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이제르트 자작의 눈이 커졌다. 문수르가 이 정도까지 칭찬을 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문수르가 놀랄 만도 했다.
‘아무리 아이언히트가 근본은 0.6배 급 기가스라고 해도 MX시스템을 이용해 최대한 출력을 높였다. 그런 아이언히트를 상대로 카운터를 날렸다. 기본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오러 나이트가.’
기본기를 제대로 갈고 닦은 재능 있는 자도 문수르를 상대로 그런 결과물을 만들진 못할 것이다.
재능 이외의 것,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유니크한 무언가를 아이어는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사생아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보우런 남작가의 핏줄을 이었습니다. 충분히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수르가 그런 말을 한 이유, 그건 다름 아니라 보우런 남작가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건 전쟁이며 동시에 정쟁입니다.”
정치적 이유의 전쟁이다.
지금 보우런 남작이 순순히 물러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싸움에선 목숨만 붙어있으면 얼마든지 역전이 가능하다. 보우런 남작은 조만간 빅토리안 공작 파벌의 도움을 받고 다시금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시비를 걸 수도 있다. 명분은 충분하다. 영지전에서 패배한 자가 와신상담한 뒤 복수를 신청했을 경우,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 복수전을 승낙해야 한다. 그게 귀족의 도리라고 여겨지니까.
빅토리안 공작가의 힘을 뒤에 업은 보우런 남작과 다시 싸우는 건 매우 껄끄러운 일이다.
때문에 문수르는 그 중심에 아이어를 놓을 생각이었다.
“아이어를 포섭한 다음 그에게 보우런 남작령을 맡길 생각입니다.”
이제르트 자작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생각이네.”
위험한 생각 정도가 아니다. 지금 아이어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람이 된 것도 아닐 뿐더러, 결국 그의 본질은 보우런 남작가 아닌가?
문수르가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문이다.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의 상황은 충분히 위험합니다."
"문수르 경은 언제나 내게 고뇌를 안겨주는군."
고민하는 이제르트 자작.
그러나 문수르는 분명하게 자신할 수 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영주라고 해도 다수의 영지를 혼자서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전쟁은 계속될 것이고, 개중에서 영지전도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영지전을 할 때마다 이기는 건 좋다. 하지만 그 영지를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명분을 가진 자를 영지의 자리에 앉히는 거다. 이런 식으로 여러 귀족 세력들을 아군으로 두면서, 이제르트 자작령을 중심으로 새로운 파벌을 만들어야 한다.’
빅토리안 공작가도, 제이머스 후작가도 솔직히 근본적으로는 똑같다. 그들은 이제르트 자작가가 몰락할 때 눈길조차 안 준 이들이다.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가를 박해했지.
누가 이기든 필로스 왕이 물러나지 않는 이상 이제르트 자작가의 처지는 변하지 않는다.
불스 백작?
그 인간 역시 이제르트 자작가를 물어 뜯으려 마음 먹으면 당장이라도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 같은 자다.
결국 이제르트 자작 본인이 힘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 싸움에서 이기려면 여러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아이어를 아군으로 만들고, 그를 보우런 남작령의 영주로 앉힌다면 보우런 남작가의 발언권은 아이어가 가지게 된다.’
보우런 남작가가 아이어를 정식 후계자로 인정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꼭 그렇게 정통 있게 돌아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힘 있는 자가 진리를 만드는 경우도 분명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보우런 남작가 내부적으로 정치적 분쟁을 일으켜서 나쁠 건 없다.
‘다른 귀족도 아닌 보우런 남작이 대표해서 이제르트 자작가를 공격한 건 그가 빅토리안 공작가의 최측근이란 소리. 더군다나 가진 전력도 남작가가 보유한 전력 이상이었다. 그를 이대로 그냥 놔두면 나중에 더 큰 역풍이 될 것이다.’
이런저런 준비를 해도 나쁠 건 없다.
하다 못해 아이어가 자기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번 일을 통해 뼛속까지 귀족인 보우런 남작은 아이어를 내칠 것이다.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보우런 남작가는 유능한 기가스 파일럿 한 명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뭐든 간에 말 한 마디뿐이지만, 문수르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3.
출신, 신분, 배경.
그로 인해 무자비할 정도로 차별을 받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 사실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그 불만을 표현하지 않는 걸 그걸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어도 그랬다.
그는 자신을 향한 보우런 남작의 대우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생아들은 아이어와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아이어 정도로 대우를 받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다.
보잘 것 없는 대우, 이루 말할 수 없는 차별도 고맙게 여겼다.
무엇보다 보우런 남작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아이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세상은 보우런 남작가가 전부였고, 보우런 남작가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오직 한 명, 보우런 남작가만이 필요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 아이어에게 문수르의 그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날 필요로 한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적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기사로 맞이하고 싶다니?
기사가 된다는 것조차 꿈꾸지 못했다. 보우런 남작은 결코 아이어에게 지위란 걸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뭐지?’
사실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다. 문수르가 정말 진실을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강하다.’
문수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라고 했다. 아무리 기가스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오러 마스터의 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전투도 그랬다. 문수르는 정말 강했다. 그의 창에서 뿜어지는 오러를 봤을 때 기겁을 했다. 기가스를 탄 채로 오러를 쓰는 광경을 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런 문수르와 동수를 이뤘다.
물론 양패구상이다. 양패구상을 동수라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래도 아이어의 기량은 문수르에게 위협을 줄 정도였다.
오러 마스터에 위협을 줄 정도라는 것.
세상 물정 모르고 보우런 남작가에 갇혀 살다시피 했던 아이어도 알 건 안다.
‘나는 정말 이 정도 대우만 받는 사람인가?’
처음으로 던지는 자신에 대한 의문. 과연 정말 자신의 가치는 이 정도가 전부일 것인가?
제 아무리 능력을 보여줘도 사생아란 벽을 넘지 못하고 종국에는 쓸쓸하게 죽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며, 자신의 가치인 것인가?
며칠 전이면 이런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을 터.
하지만 문수르의 말은 기어코 아이어의 가슴 속에 거대한 파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이었다.
“역시 아이어, 그 녀석은 너무 위험해. 그동안 능력이 아까워 곁에 두었을 뿐인데 결국 가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군.”
보우런 남작이 조심스럽게 결심을 했다.
본래는 오래 전에 했어야 하는 일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실행하기로.
아이어의 제거.
‘지금 녀석이 반기를 들면 막을 방법이 없다.’
영지를 잃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본신의 힘이다. 지금 당장 아이어가 반기를 든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그 전에 먼저 쳐야 한다.
물론 아이어란 전력을 잃는 건 뼈아프다. 그러나 보우런 남작은 나름 냉철한 자였다.
힘이 아까워 그냥 살려뒀다가 더 큰 피해를 입을 바에는 미리 자르는 게 낫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보우런 남작이 기사들을 불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보우런 남작령에서는 작은 소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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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하면 문수르도 약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