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11화 (109/293)

111화

6.

“액땜부터 하는군.”

보우런 남작가에서 경고장이 왔다.

“나 때문에 일이 골치 아프게 됐어,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제르트 자작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경고장.

그건 다름 아니라 과거 이제르트 자작 휘하의 관리들이 이제르트 자작가의 명의를 도용해 빌린 돈에 관한 내용의 경고장이었다.

‘이래서 채권이 무서운 법이지.’

언젠가 터질 지뢰였다.

물론 본래 빌렸던 액수 자체는 크지 않았다. 문제는 보우런 남작가가 주장하는 이율이었다. 이율이 원금의 수십 배가 아니라, 수백 배가 넘어갔다. 어스 월드였다면 말도 안 나올 정도의 불법 고리(高利).

그러나 여긴 케르빈 월드다. 이자 제한법 같은 건 없다. 물론 그래도 돈을 빌려주는 행위에 도리는 있다. 보우런 남작가는 그 도리를 저버리고,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닙니다.”

마구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명백하게 시비를 거는 겁니다. 돈을 갚는다는 것도 우습지만, 갚는다고 해도 봐줄 리가 없습니다.”

마구르의 말이 정답이었다.

말이 통할 상대였다면 적당한 수준의 이자를 들먹였을 것이다. 심지어 돈을 갚지 못하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나온다. 이제르트 자작령을 담보로 잡은 적도 없는데 말이다.

사실상 이건 협박이고, 불법추심이다.

그러나 보우런 남작가의 뒤에 위치한 이가 그 누구도 아닌 빅토리안 공작 아닌가?

콩탄 왕국에서는 그가 곧 법이다.

“전쟁이군.”

문수르는 확실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전쟁, 그 단어에 마구르와 이제르트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까지 대비를 했고,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전쟁이란 게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가볍게 여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제 아무리 대단한 승리에도 희생을 필요로 한다. 전쟁이 나면 누구든 죽는다. 적이든 아군이든…… 죽은 이의 목숨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지.’

문수르 역시 더 이상 피할 생각이 없었다. 적이 작정을 하고 나왔는데 다른 방법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도 우스운 생각이다. 그러다 결국 나중에 간과 쓸개를 다 빼앗기는 거다.

“보우런 남작가는 아마도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을 포비어 경이 이끼는 1.3배 급 기가스 한 대와 오러 마스터인 저, 둘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다섯 대의 아이언히트가 대기 중입니다. 파일럿 역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르트 자작가에게도 나쁜 전쟁이 결코 아니었다.

기존 전력에 아이언히트 다섯 대가 추가됐다. 결코 적은 전력이 아니다. 여기에 기존의 병사들 역시 문수르가 만든 훈련을 통해 보통 병사,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됐다. 기사들 역시 포비어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실력이 일취월장 했다.

여기에 무엇보다 식량이 넉넉하다. 지금은 새해가 막 지난 겨울이다. 식량을 확보한 이제르트 자작가 입장에서는 꿇릴 게 없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보우런 남작가의 위치다.

보우런 남작가와 이제르트 자작가 사이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보우런 남작가가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경고장을 보낸 거겠지.

“영지전에서 승리하면 보우런 남작가의 영지 및 영지민들의 흡수가 가능합니다.”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에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결정을 떠넘겼다. 상황을 주도한 건 문수르지만 결국 모든 결정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통해서 나와야 한다.

“이 경고장의 내용은 부당하며, 당연히 불합리한 이자에 대해서는 변제할 의사가 없네.”

이제르트 자작가가 결정을 내렸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부당함 앞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걸세. 그 결과가 전쟁이라고 해도 말일세.”

이제르트 자작의 의지를 담은 대답이 보우런 남작의 손에 잡혔다.

“훗.”

보우런 남작은 이제르트 자작가의 대답에 놀라지 않았다. 당황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수순이군.”

이제르트 자작가가 정치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으면 애초에 빅토리안 공작가의 파티에 참석하지도 않았을 터.

분명 어떠한 준비를 했기에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오러 마스터를 믿는 건가?”

혹자는 그 믿음이 오러 마스터 문수르의 존재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리 생각하겠지. 이제르트 자작이 운 좋게 오러 마스터를 얻게 되어, 그걸 믿고 설치는 거라고.

보우런 남작의 생각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불스 백작이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 정도는 가소로울 뿐이지.”

더군다나 보우런 남작에게도 있었다.

오러 마스터는 아니지만, 오러 마스터를 충분히 대결로 죽일 수 있는 기사가 말이다.

“아이어.”

“부르셨습니까?”

아이어 보우런.

“이번 적은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 문수르란 자다. 목숨을 걸고 해치워라.”

보우런 남작의 사생아.

그가 바로 보우런 남작이 숨겨둔 비장의 한 수였다.

베르베 백작이 불스 백작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불스 백작이 숨겨둔 저력은 대단했지만 베르베 백작 역시 콩탄 왕국에서 손꼽히는 세력을 가진 귀족이었다.

이런 이유로 불스 백작은 이제르트 자작가의 상황에 조금의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애초에 베르베 백작가와 보우런 남작가가 동시에 불스 백작가와 이제르트 자작가를 견제한 것은 불스 백작가와 이제르트 자작가가 서로 힘을 합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문수르는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외부 전력을 끌어들이면 우리 쪽이 불리해.”

문수르의 우군이라고는 불스 백작 정도지만, 보우런 남작의 우군은 빅토리안 공작이다.

차라리 각자의 전력으로 싸우는 게 최선이다.

“영지전은 확정이 됐고.”

서로가 영지전을 원한다. 왕이 반대하지 않는다. 그럼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핵심은 누가 공성이고, 누가 수성이냐, 그것이다.

물론 꼭 성을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서로가 합의한다면 전장을 선택해 싸울 수도 있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의 성벽은 견고하지만, 어디까지나 테블스 산을 바라보는 쪽이 견고할 뿐이다. 그 반대되는 방향의 성벽은 그렇게까지 두텁지 못하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수성으로 물러난다고 해도 막상 메리트가 그렇게까지 크진 않다.

무엇보다 수성을 하게 되면, 이제르트 자작령이 전장이 된다. 성벽으로 두르고 있는 부분은 이제르트 자작령의 일부일 뿐이다. 나머지 땅…… 이제르트 자작령에 속한 마을 주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

이렇게 보면 차라리 합의하에 전장을 선정해 싸우는 게 이득일 수도 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넓은 평지에서 싸워도 지지 않을 만큼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끄응…… 그렇지만 모든 병력을 전투에 투입할 수도 없는데…….”

그러나 이쯤 되면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테블스 산의 존재다.

언제 어느 순간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곳을 놔두고 이제르트 자작령의 병력 전부를 이끌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솔직히 일반 사병들과 기사단 전력은 빼놓는다고 해도, 최소한 두 대 이상의 아이언히트는 상주시켜야 한다.

“결국 보우런 남작가의 전력을 파악해야 해.”

핵심은 보우런 남작가의 전력을 충분히 무너뜨릴 만한 전력만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다.

씨익!

이 대목에서 문수르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로이드.”

- 예, 주인님.

적진의 탐색 및 파악.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 문수르에게는 그 행위를 너무나도 쉽게 할 수 있는 도우미가 있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지?”

- 이미 GPS파일럿 중 일부는 보우런 남작령으로 보냈습니다. 조만간 원하시는 정보를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7.

전쟁이 준비됐다.

이제르트 자작과 보우런 남작의 합의 하에 그 두 영지 사이에 위치한 호린 평원이 전장이 되었다.

그 외에 몇 가지 합의가 더 추가됐다. 전쟁의 승자가 누릴 권리와 패자가 누릴 권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빌어먹을, 아주 이쪽을 얕보고 있군.”

그 합의를 내는 과정에서 보우런 남작은 정말 짜증이 날 정도로 이제르트 자작을 얕잡아봤다. 마치 이제르트 자작가 정도는 언제든지 몰락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콩탄 왕국의 귀족이 아니라, 그냥 아랫사람을 다루는 듯했다. 실제로는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이 작위도 더 높은데 말이다.

문수르가 화를 낼 정도니, 이제르트 자작의 마음이 어땠을까?

“진정하게.”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은 오히려 문수르보다 더 침착했다.

“이 정도 굴욕은 내 인생에 굴욕도 아니네.”

“죄송합니다.”

“문수르 경이 내게 죄송할 일은 단 하나도 존재치 않네.”

카스트로 왕세자를 섬겼다는 이유로 이제르트 자작이 받았어야 할 고통과 굴욕, 그에 비하면 보우런 남작의 행동은 어린 아이가 돌을 던지는 것에 불과헀다.

“단지 앞으로 이 굴욕을 참고 싶은 생각은 없네.”

하지만 어린 아이가 던진 돌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을 리 만무하다.

“문수르 경, 기사와 병사들을…… 그리고 성내에 거주하는 영지민들을 한 자리에 모여주게.”

이제르트 자작.

이제까지 세상이 용납하지 않았기에 굴욕을 참아왔지만, 그는 결코 비굴한 성정이 아니다.

만약 정말 비굴했다면 진즉에 카스트로 왕세자를 버리고, 필로스 왕을 택하여 충분히 호사를 누렸을 것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굳은 심지와 굳은 의지를 가진 자, 그 어떤 굴욕 앞에서도 자신의 뚝심을 내보일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이제르트 자작이다.

그런 이제르트 자작이 날개를 펼치려고 했다.

“연설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전장에서 검을 휘두른다고 얼마나 죽일 수 있을까? 반대로 내 손짓 한 번, 내 결정 한 번에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이 사그라질 지도 모르네. 최소한 그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야지.”

이 순간 문수르는 놀랐다.

‘이게 이제르트 자작님의 진면목인가?’

처음이었다.

이제르트 자작의 기세에 문수르가 압도당한 적은 말이다. 그 정도로 지금 이제르트 자작의 몸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우라 비슷한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리스마!

적어도 군중을 휘어잡을 무언의 능력이 이제르트 자작에게 있었다.

‘내가 크게 착각했구나.’

문수르는 반성했다.

‘이런 자작님의 진면목도 모르고 내 멋대로 이제르트 자작님을 평가했으니.’

이제르트 자작을 우습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어렴풋이 그의 능력에 선을 그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멍청한 짓이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의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자였는데.

‘그래, 정신 차리자.’

이 순간 문수르는 반성과 함께 경각심을 가졌다.

‘내가 무슨 대단한 놈이라고.’

문수르는 스스로를 자책했고, 평가했다.

‘나도 인간이다. 그것도 많이 부족한 인간. 이런 내 능력을 과신하지 말자.’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말자.

문수르는 그렇게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이제르트 자작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이제르트 자작의 연설은 길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전쟁을 치렀다. 이제까지 살아남은 그대들이 나는 자랑스럽고 또한 감사한다. 때문에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겠다. 나는 그대들이 머무는 이 땅의 주인이다. 이런 내가 그대들의 희생에 대한 대가로 고작 미안하단 값싼 말 한 마디로 치른다는 건 파렴치한 짓이다.”

잠시 말을 멈춘 이제르트 자작이 영지민들을, 병사들을, 기사들을 쭉 바라보았다.

하나하나 눈빛을 마주보았다.

“그대들의 값비싼 희생에 내가 줄 것은 따뜻한 보금자리와 풍족한 식량이며, 희망한 미래다. 나는 이 자리에서 말한다. 나의 영지를 대표해 싸운 자들에게 권리를 주겠다. 나의 영지를 대표해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내 영지의 주민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당연히 그들에게 경작한 땅을 줄 것이다. 또한 하늘이 노하고, 태풍이 풀고, 세상이 무너질 때 나만은 그대들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나누어줄 것이다. 명심하라. 그대들의 희생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그대들의 죽음은 결코 개죽음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런 존재다. 충분히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

꿈틀!

이 순간 이제르트 자작의 뒤에 서있던 문수르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출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문수르의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출렁거림이었다.

“이상으로 말을 마치겠다.”

이윽고 이제르트 자작의 말이 끝났을 때.

우아아아!

거대한 외침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뒤덮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월요일이 시작됐습니다.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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