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3.
빅토리안 공작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귀족들을 불러 모았다. 빅토리안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은 많았지만, 빅토리안 공작이 마련한 그 자리에 참석한 자들의 수는 기껏해야 일곱 명에 불과했다.
빅토리안 공작가의 최측근들이다.
“불스 백작가와 이제르트 자작가.”
그렇기에 빅토리안 공작은 그들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이런저런 설명 따윌 하지 않았다.
짧게 말했다. 본론, 핵심만을 언급했다.
그러면 충분했다.
“불스 백작가, 제가 책임지도록 하지요.”
손을 듣고 미소를 짓는 자,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자다. 그러나 덥수룩한 수염에 비해 체격은 작고 왜소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말한다면 콩탄 왕국의 귀조들은 금방 한 명을 떠올릴 것이다.
베르베 백작!
콩탄 왕국 내의 백작들 중에서 그 위세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다. 가문의 세가 백작들 중 최고라는 쿠틀러 백작 다음으로 언급될 정도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길쭉한 얼굴에 뾰족한 턱선, 작지만 날카롭게 찢어진 눈. 허여멀건 얼굴색까지. 굉장히 인상적인 자였다콩탄 왕국 북부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보우런 남작이다. 빅토리안 공작의 최측근.
그러나 세상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저 빅토리안 공작이 곁에 둔다…… 그 정도의 평가만 있을 뿐. 애초에 남작이지 않은가? 귀족 계급 중 가장 말단이다.
제 아무리 측근이라고 해도 본인이 이름난 기사 또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대우가 좋지 못할 수밖에.
물론 이제르트 자작가도 최근까지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의 영주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문수르!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가 이제르트 자작가를 섬기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안다. 불스 백작의 호위를 맡은 건 임시라는 것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문수르의 존재가 있는 이상 이제르트 자작가는 결코 쉽지 않은 적이다. 확실히 영지전이 벌어지면 전장에서는 기가스의 존재가 절대적이지만 반대로 상대가 작정하고 전장을 포기하고 암살을 계획했을 경우, 과연 기가스로 오러 마스터를 막을 수 있을까?
그러나 빅토리안 공작은 그 부분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려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불스 백작가와 이제르트 자작가가 무너지면 테블스 산은 어찌 처리해야 합니까?”
“영지전을 통해 그들을 무너뜨린다면 그 영지에 대한 관리의무도 떠안게 되는 셈인데…….”
이곳에 모인 자들은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는 일.
하물며 상대는 제이머스 후작, 그 본인도 아니고 결국 촌구석의 귀족에 불과하다.
또한 오러 마스터가 전장을 평정하는 시대는 갔다.
시대는 기가스의 시대다.
막강한 기가스 전력을 가진 빅토리안 공작 파벌의 패배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4.
마구르는 이제르트 자작령에 오고 많은 부분에서 놀랐다.
‘소문과는 전혀 다르다.’
이제르트 자작령에 대한 소문은 많다. 그리고 그 소문 대부분이 좋지 못한 소문이다.
최악의 땅,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땅, 제국마저 혀를 내두르는 땅, 콩탄 왕국의 저주…….
문수르와의 만남 이후로 이제르트 자작령에 대해서 이미지가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마구르는 솔직히 겁이 났다.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정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령은 지옥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구르 입장에서 이곳은 그가 꿈꾸던 이상향이나 다름없었다.
‘실력 있는 자를 등용한다. 실력만 있다면 엘프와 드워프들을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 아니, 그 이상의 대우를 해준다. 기술이 있으면 전수한다. 지식이 있으면 전파한다. 모든 이들이 의무를 지고, 행동에는 대가를 지불한다.’
세상에 넘치는 부조리함, 그러나 세상은 당연하다고 말했던 부조리함, 때문에 부조리하다 말조차 못했던 그것을 이제르트 자작령은 틀렸다고 단언하듯 행동하고 있다.
그뿐인가?
이제르트 자작령이 돌아가는 모든 체계 그리고 그 체계의 근간 중 하나인 기술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처음 보는 작물이 재배되며, 수확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그것을 이용한 요리법까지 다양하다.
마치 다른 세상 같다.
꿀꺽!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했을 때 마구르는 침을 삼켰다.
‘여기라면 모른다.’
마구르, 그라고 어찌 꿈이 없을까?
평민으로 태어나 온갖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결국 마구르는 무릎을 꿇었다. 부조리함 앞에 그냥 고개를 숙이고 세상을 외면했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령은 다르다.
‘나의 사상은 위험하다.’
마구르는 알고 있다.
자신이 머릿속에,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이상향이란 놈이, 사상이란 놈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타인…… 특히 귀족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단칼에 마구르를 죽일 수도 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결코 용납하지 못할 사상이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령이라면 다를 것 같았다.
꿀꺽!
그래서 긴장했다.
그저 마음속으로 품고 있다면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그걸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 마구르는 위험해지니까.
‘문수르 경에게 한 번 말을 해야겠지.’
그러나 이미 각오는 다졌다.
문수르 경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볼 것이다. 그리고 문수르의 반응을 보고 대응할 것이다.
문수르가 고개를 젓는다면,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포기할 것이다.
반대로 문수르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내 목숨을 이 영지에 바치겠다.’
각오를 다질 것이다.
마구르가 늦은 밤 문수르를 찾아왔다.
긴 대화가 진행됐다.
마구르가 말을 뱉으면 문수르는 듣기만 했다. 대답을 주고 받는 건 없었다. 일방적인 대화였다.
모든 대화가 끝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수르는 마구르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의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짧게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주인은 이제르트 자작님입니다. 정말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제가 아닌 이제르트 자작님을 찾아가세요.”
문수르는 놀랐다.
마구르가 가진 이념과 이상은 핏줄만을 통해 계승되는 기득권을 타파하고, 대신에 능력을 고려하며, 반대로 부족한 이를 돕는 굉장히 합리적인 사회였다.
마치 어스 월드의 그것처럼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케르빈 월드에서는 결코 통용되지 않을 이상과 이념이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군.’
마구르가 보통 이들과 다르게 조금은 탈속적인 면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탈속적인 느낌의 배경이 이런 사상 때문인지는 잘 몰랐다.
‘위험하다.’
만약 다른 귀족 앞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면 마구르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마구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끌어줄 수 있는 건 세상에 문수르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문수르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나 문수르는 마구르에게 이제르트 자작을 찾아가라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을 믿기 때문에? 그가 문수르의 사상가 이념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서?
‘이제르트 자작님도 고민할 것이다.’
아니다.
단언하건데 어진 영주라 할 수 있는 이제르트 자작이라고 해도 마구르의 이야기를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칼부터 휘두르진 않을 것이다. 생각부터 할 것이다. 부정하기 보다는 고뇌부터 할 것이다.
종국에는 답을 내릴 것이다.
‘그 답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가 좇아야 하는 답은 그 답이다.’
문수르가 무엇을 하든 결국 이제르트 자작령의 주체는 이제르트 자작이 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런 문수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구르는 그 인사를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이틀 후, 이번에는 이제르트 자작이 문수르를 찾아왔다.
이제르트 자작은 말했다.
“마구르, 그의 생각은 위험하네. 하지만 동시에 합리적이지. 핏줄은 고귀한 것이지만, 핏줄만이 능력의 전부는 아니니까.”
이번에는 이제르트 자작이 밤을 세우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 역시 고민이 많았다. 문수르가 오고 난 이후 많은 충격을 받았다. 또한 그에게는 영지의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고민할 의무도 있었다. 영지가 변할 때마다, 긍정적으로 나아갈 때마다 미소가 지어졌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자신이 소외 받을까, 하는 무서움은 결코 아니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경우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하는 자였다.
문제는 결국 미래였다.
문수르는 영생하지 않는다. 그는 영원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선 자신의 목숨이라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사람의 삶이다.
당장 10년, 20년 혹은 반백 년 동안 많은 것이 이룩되더라도 그 다음은?
이제르트 자작은 오랜 세월 지켜온 자신의 가문이,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무가 되어버린 이제르트 자작령이란 땅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마구르와의 대화에서 이제르트 자작은 결국 자신이 결단을 내릴 때임을 알았다.
문수르를 찾아온 것도 문수르의 도움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문수르를 찾아온 건 이제르트 자작이 분명하게 결단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나는 내 능력이 부족하다면 이제르트 자작령의 영주 자리에서 언제든지 내려올 각오가 되어 있네. 내 자식 역시 마찬가지. 가문을 계승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내 자식이 무능력하다면 영주의 자리를 계승시킬 생각이 없네.”
파격선언이었다.
핏줄을 통한 계승이 당연하며, 그 과정에 그 어떤 대가도 세상에 지불하지 않는 것이 정론인 세상에서 이제르트 자작은 그것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능력 있는 자에게 모든 걸 줄 생각은 없네. 이것은 내 욕심이고, 이제르트 자작가의 욕심이겠지만 기회를 가지고 싶네. 내 능력을, 훗날 내 자식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 또한 격려와 배려 받고 싶네. 조금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격려를 받고, 발전의 여지가 있으면 용납해줄 수 있는 배려. 물론 이것은 이제르트 자작가만의…….”
잠시 말을 멈춘 이제르트 자작.
그는 그 단어를 짧게 속으로 되새김했다.
“……특권일 수도 있겠지만.”
특권.
세상 모두가 당연하다 여기는 권리를 이제르트 자작가는 특권이라 말했다.
“그래도 최소한 그 정도의 대우를 받고 싶네.”
이제르트 자작의 선언.
그 앞에서 문수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최대한 예의를 갖춘 문수르의 그 말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위한 가장 확실한 한 마디였다.
5.
이제르트 자작가가 빠르게 변화한다.
이제까지는 단순히 물질적 변화였지만,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을 통해 보았다.
‘정신적 변화가 시작된다.’
가장 위험한 변화, 세상을 가장 크게 흔들 수 있는 변화. 그건 바로 정신적 가치의 변화다.
‘이런 때일수록 능력 있는 자가 필요하다. 깨어있는 자 그리고 영리한 자가 필요하다.’
이상만을 말하는 자? 좋다. 진실만을 말하는 자? 훌륭하다. 곧 죽어도 직언을 내뱉는 자? 대단하다.
하지만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와 동시에 영리한 자가 필요하다. 자신의 가치와 이념은 지키되,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며, 자신을 부정하는 무리들 속에서도 미소를 짓고, 거짓 가면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자.
‘정치인이 필요해.’
문수르에게 필요한 건 자신과 이념을 같이하며, 정치를 할 수 있는 자였다.
“마구르를 제대로 가르쳐야겠군.”
지금 당장 그게 가능한 자는 그 누구도 아닌 마구르였다. 지금 마구르는 이제르트 자작령의 관리로 여러 잡무를 처리하는 중이지만, 앞으로 마구르는 정치로 일할 것이다.
문수르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일로 바쁜 마구르를 억지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그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데리고 다니면서 수시로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가르쳐줬다.
물론 충고도 곁들었다.
“내 지식은 파격입니다. 어디 가서 나한테 배웠다고 하지 마세요.”
뒷말은 우스갯소리였지만 마구르는 문수르가 진짜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마구르는 문수르의 지식을 빠르게 흡수했다. 페르코 아카데미에서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지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하며, 위대한 지식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식이었다.
때문에 문수르에게 가르침을 받는 마구르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문수르 역시 마구르를 가르치고, 영지 이곳저곳을 관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어느새 뒤를 돌아봤을 때는 겨울이 찾아왔고, 겨울이 찾아오자마자 얼마 안 돼, 곧바로 해가 넘어갔다.
새해가 왔다.
새해에 이제르트 자작령을 기다리고 있던 건 보우런 남작가로부터 날아온 경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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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분은 굉장히 길었는데, 너무 늘어져서 쳐내고 쳐내보니, 너무 가볍게 넘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