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28화. 축제의 시작.>
1.
늦은 밤이었다. 달이 중천에 떴음에도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슥슥.
노트 위를 가로지르는 볼펜 소리. 케르빈 월드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문수르는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 온 노트, 그리고 볼펜으로 말이다.
- 메모라도 하시는 겁니까?
“메모? 그럴 리가. 나보다 기억력이 좋은 네가 있는데.”
로이드가 그런 문수르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었다. 사실 문수르에게는 필기가 필요 없다. 생각만으로도 로이드는 문수르가 필기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인지하고, 저장할 수 있으니까. 필요할 때 로이드에게 물어보면 문수르가 몰랐던 것마저 알 수 있다.
“글을 쓰는 거야.”
- 글? 소설 말입니까?
“그래. 이래 뵈도 소설가잖아.”
- 그동안 안 쓰던 글을 왜 이제 와서 쓰시는 겁니까?
로이드는 다시 질문했다.
문수르가 소설가인 건 맞다. 그것도 판타지 소설가! 하지만 한석균 밑에서 들어간 이후로 문수르는 소설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런저런 일로 바빴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최근 문수르는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니까.”
- 불가능? 무엇이 말입니까?
“이제르트 자작가를 반석에 올리는 것. 콩탄 왕국에 후작이란 작위는 단 두 명에게만 허락되지. 그 자리 중 하나가 공석이지만 불스 백작과 합의를 위해선 불스 백작가를 올려야 하지. 그 다음에는? 제이머스 후작과 불스 백작, 둘 중 하나는 고꾸라뜨려야 돼. 정치적 아군인 자를 다시 적으로 돌려야 하는 거지.”
- 문제될 게 있습니까?
“문제될 건 없지. 단지 정말로 이 모든 게 성공하면 정말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될 테니까.”
- 그렇다면…….
“말이 소설이지, 그냥 계획을 짜는 거야. 나를 주인공으로 두고 한 번 써보는 거지. 이런 상황을 연출했을 때 어떻게 해야지 도망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 갑작스레 튀어나왔을 때 어떻게 모면할 수 있을까…….”
문수르가 가진 재능 중 하나.
그건 바로 소설가란 점이다. 한석균 역시 그 부분을 고려했기에 문수르를 적합자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을 이용해 먹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부터 소설을 써야 한다.’
이제 프롤로그가 끝났을 뿐이다.
‘목표는 해피엔딩.’
이제부터 엔딩을 맞이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려야 할 것이다.
“아, 그런데 해피엔딩을 쓰는 재주는 없는데…….”
- 대필하시죠?
“그게 말이 되냐?”
아마도 매우 힘든 달리기가 될 것 같다.
2.
빅토리안 공작의 파티는 사교 파티였다. 재미난 건 제이머스 후작 파벌 쪽 인사들도 대거 참가했다는 점이다.
불스 백작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쐐기를 박고 싶은 거지.”
“쐐기?”
“말 그대로다. 제이머스 후작 파벌이 쇠락하는 와중에 그 파벌 내의 귀족들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게 쐐기가 아니고 뭘 것 같나?”
“그럼 제이머스 후작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자기를 따르는 귀족들이 이번 빅토리안 공작가의 파티에 참가하는 걸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막는다고 별 수 있나? 제이머스 후작이라고 모든 귀족에 대한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진 것도 아니고. 상명하복의 관계도 아니지.”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이머스 후작 쪽이 마냥 손해 보는 일은 아니지.”
불스 백작은 핵심을 잘 알고 있었다.
“파벌 싸움이라고 해도 결국 친왕파 끼리의 파벌 싸움이지. 제르둔 후작의 경우에는 운이 없었지만, 제 아무리 정치적으로 제이머스 후작이 밀린다고 하더라도 빅토리안 공작이 마음 내키는 대로 제이머스 후작 파벌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 이런 상황에서 빅토리안 공작 파벌은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대세를 잡은 것 같은 빅토리안 공작 파벌의 최대 약점.
“빅토리안 공작 파벌 내에서는 제 아무리 충성을 바쳐도 얻는 이익은 조촐하지. 정치란 게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서 뛰어드는 건데, 대접이 섭섭하면 좀 그렇지. 이 사실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들이 적지 않아.”
결집력이 약하다는 부분이다.
반대로 위기의식을 느낀 제이머스 후작 파벌 쪽은 결집력이 강하다. 더불어 콩탄 왕국 귀족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페스로 제국에 대한 의존도!
아무리 정치적으로 불리하다고 해도 페스로 제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만 받는다면 전세 역전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럼 저는 앞으로 뭘 하면 됩니까?”
“제이머스 후작과 이야기가 끝났네.”
불스 백작은 제이머스 후작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빅토리안 공작 파벌 쪽은 비집고 들어갈 곳이 없었으니까. 아마 빅토리안 공작 쪽도 내 선택을 알고 있을 터. 자연스럽게 자네에 대한 견제가 들어올 걸세.”
“견제라 하면…….”
“싸움을 걸겠지. 자네가 정말 오러 마스터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결투는 피할 수 없지.”
“그뿐입니까?”
결투라는 말에 문수르는 솔직히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콩탄 왕국 내에서 문수르의 상대가 될 수 있는 건 둘 뿐이다.
제이머스 후작 그리고 루이 노믹스.
하지만 제이머스 후작 파벌에 속하게 될 문수르를 제이머스 후작이 어찌할 이유는 없을 터.
남은 건 루이 노믹스 정도인데…….
“설마 루이 노믹스 경이 나올까요?”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노믹스 경은 여전히 왕성에 머문다고 하더군.”
루이 노믹스가 아니라면 문수르의 적이 될 만한 실력자는 없다.
“그럼 별 걱정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글쎄…….”
하지만 불스 백작은 살짝 걱정을 하고 있었다. 걱정의 이유는 단 하나!
“빅토리안 공작이 그렇게 어수룩한 인물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터.”
빅토리안 공작의 능력, 그게 바로 걱정의 이유였다.
3.
빅토리안 공작가의 파티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빅토리안 공작의 성 내에 위치한 거대한 파티장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음식은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돈 지랄을 하는군.’
문수르는 그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특히 문수르가 가장 놀랐던 건, 음식을 맛만 보고 버리는 귀족들의 행실이었다.
‘콩탄 왕국이 못 사는 나라는 아니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큼지막한 음식,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귀족들은 그 음식을 한 입…… 아니, 한 입이라고 하기에도 뭐하다. 그냥 혀로 살짝 맛만 본 후에 버렸다. 일부에서는 먹고 뱉는 경우도 다수였다.
‘미친 나라군.’
이게 이 나라의 음식문화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먹을 것 허투루 여기는 나라의 미래가 밝을 것 같진 않다.
- 웃으세요.
‘로이드?’
- 이런 자리에서 인상 찌푸려서 좋을 건 없지 않습니까?
저도 모르게 구겨진 인상, 로이드가 그 부분을 지적해줬다. 문수르가 인상을 고쳤다.
첫 날 파티에서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문수르는 파티의 참석자라기보다는 불스 백작의 호위였다. 대부분 문수르에게 말을 걸기 보다는 불스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몇몇 이들이 문수르에게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그 관심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파티가 끝났을 때 불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내일 준비하도록.”
“결투가 잡혔습니까?”
“일단 그러네.”
“그런데 왜 당사자인 저한테는 아무런 언질도 없는 겁니까? 그리고…… 이 정도 결투라면 대대적으로 공개를 할 텐데?”
“아마도 깜짝 파티 비슷한 게 될 모양이야. 빅토리안 공작 측이 직접 몰래 내게 말을 전달해준 걸 보면 말이야.”
“깜짝 파티라고 하면?”
“뭐, 간단한 거네. 연극 비슷한 거지. 누군가 갑작스레 파티에 난입을 했는데, 그걸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가 막아낸다. 나쁘지 않은 쇼지.”
결투가 잡혔다. 문수르는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그 정도로 은밀하게 잡힌 결투였다.
그러나 문수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누가 오든 상대하면 된다.’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문수르는 숨을 골랐다. 정확히는 호흡을 통해 오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자신의 창술을 점검했다.
문수르가 사용할 수 있는 페르수스 창술의 비기는 현재 스파이럴 어택 정도다.
하지만 스파이럴 어택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확실히 위력적인 기본기이지만, 아직 비기는 몇 가지 더 남아있다.
하나는 스파이럴 어택의 업그레이드판인 슈팅 스타다. 스파이럴 어택을 한 번에 최대 다섯 번을 날리는 기술이다.
두 번째는 스파이럴 어택과는 정반대의 기술이라 할 수 있는 라이트 드라이브(Light Drive)란 기술이다. 스파이럴 어택이 회전력을 통해 위력을 극대화했다면, 라이트 드라이브는 일체의 회전을 주지 않은 채 창을 그대로 힘껏 내찌르는 기술이다. 핵심은 힘을 한 곳에 집중하는 기술이다.
세 번째 기술은 스파이럴 어택과 라이트 드라이브를 합친 기술이다. 스파이럴 어택의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기술, 빌그락스(Bilgraks)란 기술이다.
네 번째 기술은 스파이럴 어택의 특징을 극대화시킨 메가 타이푼이란 기술이다.
문수르가 가장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건 스파이럴 어택이다. 슈팅 스타의 경우도 쓸 수 있다. 최대 세 번의 공격이 전부지만.
반대로 라이트 드라이브는 감조차 잡지 못했다. 문수르 입장에서 라이트 드라이브는 그저 단순한 찌르기다. 그런데 이걸 특별한 기술로 규정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대신에 메가 타이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단지 메가 타이푼의 문제점은 막대한 오러를 요구한다는 것!
‘이게 지금 내 수준이군.’
호흡을 가다듬은 문수르의 입에서 이내 한숨이 나왔다.
“페르수스에게 가르침까지 받았는데…….”
처음 오러 마스터가 되기 전, 우연찮게 페르수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환상 속에서의 가르침이었지만, 그 어느 것보다 뜻 깊은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때 이후로 발전이 거의 없었다.
“가누스의 말이 맞았어.”
벽을 만난 느낌이다.
“좀 봐줘라, 난 소설가라고.”
짧게 푸념을 내뱉은 문수르. 이내 문수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소설 쓸 땐 이럴 때 기인이사를 만나서 쉽게 벽을 넘기고는 그랬는데.”
이런 상황에서 쓰는 단골멘트도 있었다.
준비하는 자가 언제나 기회를 잡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회를 잡은 자는 준비한 자다!
‘나도 참 속 편하게 글을 썼군.’
직접 겪어보니 웃기는 소리다.
‘그것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빅토리안 공작과 흑마법사의 관계일까?’
밤잠을 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이런 고민이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고민, 바로 빅토리안 공작과 흑마법 사이의 관계였다. 나탈라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게 전부 사실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녀가 아는 게 진실이란 보장이 없으니까.
‘내가 봤을 땐…….’
문수르는 빅토리안 공작을 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곱게 늙은 노귀족이었다. 온몸에서 귀족다운 기품이 넘치고, 카리스마도 넘치는 자였다.
‘흑마법사 같진 않았어.’
이미 흑마법사와 싸우기까지 했던 문수르다. 흑마법에 대한 교육도 진절머리 나게 배웠다. 적어도 흑마법사를 보는 눈은 남들보다 나은 편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그런 문수르도 그리고 로이드도 빅토리안 공작으로부터 흑마법의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대체 뭘까?’
어떤 일이 일어나고는 있다.
‘가만.’
여기서 문수르는 생각을 잠깐 달리했다.
‘내일 결투에서 빅토리안 공작은 날 어떻게든 해보려고 할 텐데?’
결투가 잡혔다고 한다. 문제점은 그 결투가 공식으로 잡힌 게 아니라 이벤트마냥 잡혔다는 거다. 불스 백작의 언질이 아니었으면 문수르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때문에 그 결투에 대한 정보가 아무 것도 없다. 달리 말하면 결투와 관련된 정보를 사전에 숨기기가 쉽다는 의미다.
빅토리안 공작이 어떠한 수작을 부리기엔 딱 좋은 방법이다. 문제가 생겼을 경우 불스 백작이나 문수르가 대처하기 힘드니까.
자, 그럼 빅토리안 공작은 어떤 준비를 했을까?
“로이드.”
- 예, 주인님.
“사람을 강화시키는 종류의 흑마법이 얼마나 되지?”
-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럼 예를 들어 오러 나이트 수준의 기사를 흑마법을 통해 오러 마스터에 근접하게 만드는 게 가능한가?”
- 조건만 충족한다면 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조심해야겠군.”
루이 노믹스가 아니더라도, 제이머스 후작이 아니더라도 문수르를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다. 정말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을 이용해 문수르를 어찌 하려고 한다면, 역으로 그걸 이용해서 빅토리안 공작의 입지를 줄일 수도 있다.
어떠한 이유로도 흑마법과 손을 잡는 건 용납되지 않는 행위니까!
“로이드, 상대가 흑마법을 썼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공개하는 방법이 있을까?”
-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주인님의 경우에는…… 방법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방법은 있지?”
- 예.
“좋아, 그거라도 알려줘.”
문수르가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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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분들의 조언 및 충고, 지적은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글이 될수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