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5.
꽈릉!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빗줄기는 굵고 거셌다. 빗물은 단숨에 산을 뒤덮었다. 시야는 빗물에 가릴 정도였고, 땅은 질퍽해져 걷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하늘마저 어두컴컴해지고, 횃불조차 켜기 힘드니, 탐색자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
‘때가 왔군.’
반대로 도망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문수르는 준비해온 복면을 착용했다. 정체를 숨긴 채 활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때를 대비해 준비한 복면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얼굴만 가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석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복면이었다.
복면을 착용하면 목소리가 변조될 뿐더러, 독특한 향기를 내뿜는데 이 향기는 개와 같이 후각이 예민한 동물들의 후각을 교란시키는 역할까지 한다.
도망자 입장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아이템이다. 물론 도망자 입장에서 최고의 아이템은 그 무엇도 아닌 로이드일 것이다.
- 진입루트 확보.
‘도주루트는?’
- 상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수정 중입니다. 하지만 빗줄기가 너무 거센 탓에 GPS시스템을 통한 루트 확보에 딜레이가 있으니 염두에 두십시오.
‘오케이.’
로이드가 알려주는 루트를 따라 문수르는 잽싸게 이동했다. 오러 마스터의 능력을 가진 문수르에게 빗물에 젖어 질퍽거리는 땅은 장해물조차 되지 못했다.
파밧!
몇 번의 도약, 몇 번의 몸놀림만으로 숲을 움직이던 문수르는 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 곧바로 원하는 표적과 만날 수 있었다.
표적은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누가 보면 그냥 죽은 줄 알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제르둔 후작의 딸, 나탈라 제르둔.
고작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콩탄 왕국의 꽃이라 불리며 최고의 미인으로 찬사를 받던 여인이다.
그녀는 문수르가 지척까지 왔음에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마치 시체처럼 말이다.
문수르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한 건가? 분명 문수르가 기척을 없앤 건 사실이다. 최대한 은밀히 이동하기 위해서 기척을 죽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일 테니까.
그러나 문수르는 나탈라 앞에 도달했을 때 살짝 기척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나탈라는 반응하지 않은 것이다.
못한 게 아니다.
‘도망치는데 이골이 났군.’
그건 나탈라,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 마치 야생의 세계에서 약한 것이 살아남기 위해 죽은 척을 연기하는 것처럼, 나탈라는 지금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게 통할 것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지금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 없으니까. 그녀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렇게 비루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문수르는 그런 나탈라를 잡아 올렸다.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문수르가 필요로 하는 건 나탈라가 가지고 있는 정보다. 빅토리안 공작이 진행한 어떠한 계획! 그걸 알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자리에 있는 거다.
문수르가 나탈라를 고양이마냥 잡아들어 올렸을 때, 나탈라는 비명소리 따윈 내뱉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뭐든 할게요. 뭐든 할 수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힘이 남아있었다.
‘제법인데?’
강단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문수르에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문수르가 필요로 하는 건 적당한 연출이었다.
“네가 빅토리안 공작의 약점을 쥐고 있다고 들었다.”
묵직한 음성…… 하지만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그 특색을 찾기 힘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탈라는 말했다.
“살려주시면 뭐든 말하겠어요!”
그녀는 마치 구세주를 본 것처럼 눈빛을 빛냈다. 어쩌면 그녀는 이런 상황을 기다리며 이제까지 도망쳤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러니까 빅토리안 공작의 파멸 또는 몰락을 바라는 누군가가 빅토리안 공작의 뒤를 캐내기 위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경우.
까놓고 말해서 이미 그녀의 가문이 몰락한 상황에서 그녀가 안쓰럽단 이유로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빅토리안 공작가와 싸우고자 하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살려주지. 대신에 모든 걸 말해야 한다.”
“반대로 모든 걸 말한다면 살려주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래서일까?
이제까지 비 맞은 강아지마냥 떨고 있던 그녀는 미리 말을 준비해둔 것마냥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문수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수르는 그 자리에서 나탈라를 짐짝마냥 어깨에 짊어졌다.
‘도주 루트 확보해.’
- 확보했습니다.
뒤를 돌아볼 필요는 없다. 애초에 나탈라가 원하든, 원치 않던 일단 그녀를 데리고 빠져나올 작정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오면 일거리나 하나 줄어든 셈이다.
파앗!
문수르가 곧바로 빗속을, 숲속을 뚫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빅토리안 공작가의 병사들은 그런 문수르의 존재를, 도주를 파악하지 못했다. 문수르의 발소리는 고요했고.
쿠구구!
반대로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는 시끄러웠다. 가뜩이나 숲속이라 그런지 잎사귀를 두드리는 빗물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꽈릉!
그러다 한 번씩 천둥이라도 치면, 고막이 얼얼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의 움직임을, 소리를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물며 문수르는 병사들의 포위망의 허점만을 노리고 움직였다.
잡힐 가능성은 없었다.
문수르는 요리를 하고 있었다. 문수르가 준비한 요리는 스테이크 요리였다. 그것도 보통 스테이크 요리가 아니었다. 육즙을 최대한 고기 안에 가둔 상태에서 특제 소스를 부었다. 소스가 고기와 함께 익으며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겼다. 그저 고기를 구워 향신료를 뿌리는 게 스테이크의 전부인 케르빈 월드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맛과 향 그리고 모습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만한 음식이다.
꿀꺽!
그 음식 앞에서 나탈라는 침을 삼켰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더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싶었다.
꼬르륵!
배는 간만에 본 음식 앞에서 체면을 버렸다. 아니, 체면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다.
‘얼마만이지?’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건 기대도 안 한다. 나탈라는 과연 제대로 된 음식을 보기만이라도 했던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몇 달 전인 것 같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제르둔 후작가가 반역죄에 몰려 몰락하기 전! 그 이후로는 제대로 된 음식을 본 적조차 없었다.
“배가 고픈가 보군.”
“며칠 동안 굶었어요.”
“그래? 난 며칠 동안 정말 진절머리 날 정도로 포식을 했는데 말이야. 먹는 걸 좋아하거든.”
대화가 시작됐다.
문수르는 준비된 요리를 먹을 준비를 했다. 나탈라는 그 과정을 그저 지켜만 봐야 했다.
문수르가 무서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 나탈라는 손발이 결박된 상황이었다.
문수르는 나탈라를 위해서 그녀를 구해준 게 아니었다. 문수르가 원하는 건 나탈라가 가진 정보. 하지만 문수르 입장에서 당장 나탈라가 하는 말의 진실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진실을 뱉게 만들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좋은 건 고문이다. 극도의 고통 앞에서는 진실을 뱉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수르는 고문을 하는 법도 배우긴 배웠다.
지금도 그런 고문의 일종이었다.
상대는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 상황. 이 세상에서 허기만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도 많지 않다. 허기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정말 의미 없을 정도로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나탈라는 극도의 허기를 느끼는 상황. 문수르는 그녀를 구해준 이후로 물 한 모금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빅토리안 공작가의 삼엄한 포위망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을 느끼고, 그 안도감에 긴장이 풀리게 된다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미안하지만 내가 먹을 것 밖에 없군.”
“무,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나탈라는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지금 문수르가 원하는 걸 줘야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글쎄?”
그러나 문수르는 질문하지 않았다. 궁금한 거야 많다. 그러나 지금은 주도권이 먼저다.
“과연 내가 무엇을 원할까?”
말과 함께 문수르가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나이프에 썰린 고기가 탐스러운 육즙을 토해냈다. 정말 제대로 만들어진 스테이크다. 아마 일류 요리사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을 것이다.
나탈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삼킬 침조차 없었기에 침을 삼키려고 할 때마다 목이 아팠다.
“빅토리안 공작은 흑마법사에요!”
이윽고 나탈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순간 아주 잠시 동안 문수르의 머릿속이 크게 흔들렸다.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사라니? 아무도 믿지 못할 소리다.
피식!
그렇기에 문수르는 놀란 가슴을 뒤로한 채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이 세상에 흑마법사가 적은 건 아니지만 빅토리안 공작은 아니지.”
“제가 봤어요! 그자가 우리…… 우리 가문의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는 광경을 봤어요!”
“제물로 바치는 것과 흑마법사인 것. 이 두 가지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지. 제물로 바치는 건 그 어떤 인간도 할 수 있는 짓이지만, 흑마법사는 제물을 바치는 것 외에 흑마법도 쓸 줄 알아야 하니까. 마법을 쓰고자 하면 마나 서클이 생긴다. 이건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지. 그러나 빅토리안 공작이 마나 서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군.”
이 설명.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길게 중얼거리는 게 아니다. 문수르는 지금 나탈라의 말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부정했다.
나탈라가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붙이기 위해서 말이다.
정말 나탈라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나탈라는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반대로 나탈라가 정말 진실을 말하는 거라면 그녀는 어떻게든 문수르를 설득하기 위해 계속 같은 주장을 하겠지.
뭐든 간에 문수르가 원하는 반응이다.
“정말이에요!”
나탈라는 후자를 택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말을 설득시키기 위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걸을 말해줬다. 그녀의 화술은 제법 뛰어났다. 덕분에 문수르는 그녀가 겪은 일을 마치 영화를 본 것마냥 이해할 수 있었다.
나탈라는 있는 힘을 전부 쥐어 짜내며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문수르는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탈라 앞에 접시를 가져갔다.
꿀꺽!
나칼라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는 기대했다. 자신이 정보를 말한 대가로 누리게 될 포만감을.
그때였다.
후드득!
문수르가 접시를 뒤집었다. 잘게 썰린 스테이크 조각들이 지저분한 땅 위에 떨어졌다.
“아아……!”
나탈라는 그것이 마치 제 목이 떨어진 것마냥 절망감이 넘치는 울음소리 비슷한 걸 토해냈다.
그러나 이 순간 나탈라는 땅에 떨어진 스테이크 조각이라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허기는 이미 나탈라의 이성을 망가뜨린지 오래였다. 당장 흙이라도 퍼먹어서 배를 채우고 싶을 정도였다.
콰직!
하지만 문수르의 행동이 더 빨랐다.
퍽퍽!
문수르는 발로 스테이크 조각들을 사정없이 밟았다. 오러 마스터의 힘이 실린 밟기였다. 스테이크 조각은 금방 흙 무리들과 한 몸이 되었다. 흙인지, 고기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그나마 남은 작은 스테이크 살점들, 문수르는 그 스테이크 살점들을 발로 찼다.
먹음직스러웠던 스테이크가 사라졌다.
나탈라는 독기 어린 눈으로 문수르를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문수르의 눈빛은 나탈라의 눈빛보다 더 살벌했다.
“거짓말을 내게 통하지 않는다.”
문수르는 나탈라를 한계까지 밀어 넣었다.
그 정도로 문수르에게도 지금의 상황은 중요했다. 더군다나 문수르는 개인이 아니다. 그의 양쪽 어깨 위에는 이제르트 자작령이라는 거대한 책임감이 존재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나탈라의 사정 따위는 문수르가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제가 두 눈으로 두 귀로 똑똑히 봤어요!”
나탈라는 미칠 지경이었다. 진실을 말했는데, 온몸의 힘을 짜내서 말했는데 왜 눈앞의 사내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문수르는 나탈라의 말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문수르는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두 번째 요리를 시작하지.”
이번에도 스테이크 요리였다. 하지만 첫 번째 요리와는 다르게, 요리를 시작하기 전 문수르는 짧은 설명을 깃들었다.
“경고하지. 만약 내가 세 번째 요리를 하게 된다면, 사람을 가지고 요리를 하게 될 거야.”
고문을 하겠다는 의미의 경고.
나탈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