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4.
빅토리안 공작령으로 가는 길은 그 어느 길보다 잘 정비되어 있었을 뿐더러 그 어느 길보다 안전했다.
‘대단하군.’
문수르는 감탄했다.
‘빅토리안 공작의 영향력이 이 정도였나?’
아직 빅토리안 공작령에는 도잘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문수르는 빅토리안 공작령으로 가는 길목에서 빅토리안 공작가 소속의 병사들과 레인저들을 다수 만났다.
다른 영주의 땅에서 그들은 빅토리안 공작가를 위해서 업무를 진행했던 것이다.
이건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제 아무리 작위의 차이가 난다고 해도 영주의 권한이란 고귀한 것이다. 공작이라고 해서 남작의 영지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영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지키는 이상, 영지의 절대적인 주인이니까.
그럼에도 빅토리안 공작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콩탄 왕국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빅토리안 공작가의 위세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는데, 하늘을 나는 새는 물론 와이번 정도도 떨어뜨릴 기세다.
‘단순히 친왕파 수준의 권세가 아니군.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어.’
콩탄 왕국의 권력 대부분은 필로스 왕이 쥐고 있다. 본래 대로라면 왕권을 견제해야 할 귀족들이 오히려 왕에게 잘보이기 위해 친왕파란 굴레 안에 모여드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기형적인 정치구조가 생긴 페스로 제국 때문이다.
‘제국이 좌지우지하는군.’
페스로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이상, 콩탄 왕국 내에서 페스로 제국에 반목하는 무리들은 이미 제거된 지 오래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경우처럼 말이다.
결구 살아남은 이들, 권력을 잡은 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무리들이다. 모두가 페스로 제국에 아부를 떠는 자들. 반대로 보면 페스로 제국이 나름 인정해주는 자들인 셈이다.
그렇기에 가능하다.
‘빅토리안 공작이 페스로 제국으로부터 좋은 확답만 얻어낸다면 차기 왕위에 자신이 원하는 자를 옹립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단 일이군.’
언뜻 보기에는 단단해보이는 필로스 왕의 왕권. 하지만 그 왕권은 어느 순간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마구르의 말처럼 흘러갈지도 모르겠어.’
문수르가 갑작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 그건 다름 아니라 마구르 때문이었다.
문수르는 본래 빅토리안 공작이 무리를 해서 왕권을 노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다.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던 제르둔, 제이머스 후작 동맹 중 한 축인 제르둔 후작이 몰락한 이상 대세는 이미 빅토리안 공작 쪽으로 기울었으니까. 더군다나 빅토리안 공작은 친왕파 귀족 아닌가? 그런 그가 굳이 필로스 왕의 자리를 노릴 이유가 있을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울 이유는 없다. 적어도 문수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구르는 그런 문수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은 다른 의견을 말해주었다.
“친왕파 내의 파벌 싸움이 끝난다면, 누가 됐건 그 승리자는 왕권의 대항마가 될 겁니다.”
“페스로 제국이 보장하는 필로스 전하의 왕위에 대항마라니? 그런 게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만.”
“콩탄 왕국은 원치 않겠지요. 하지만 페스로 제국은 원할 겁니다.”
“페스로 제국이 원한다?”
“콩탄 왕국에서 정치적으로 불안할 때 귀족들이 취하는 가장 우선적인 행동이 뭔지 아십니까?”
“최소한의 도피처를 구하는 거겠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콩탄 왕국에서 최소한의 도피처, 최후의 보루는 무엇일 것 같습니까?”
“페스로 제국?”
“매년 콩탄 왕국의 귀족들이 사적인 루트를 통해 페스로 제국에 보내는 뇌물의 양은 엄청납니다. 상식적으로 콩탄 왕국이 못 사는 나라도 아니고, 페스로 제국에 의해서 자의든, 타의든 병력 감소를 통해 가장 돈이 많이 드는 군사비를 대폭 절감했습니다. 그럼 곳간에 식량이든 돈이든 넘쳐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어디에서도 콩탄 왕국이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그렇다고 나라 사정이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전쟁을 치른 것도 아니고, 엄청난 흉년이 들어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닙니다. 군사비로 나갈 돈은 계속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콩탄 왕국에는 없습니다. 과연 어딜 갔겠습니까?”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에게 갔다는 의미군요.”
“페스로 제국 입장에서는 어쨌거나 콩탄 왕국의 정치가 안정되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마구르는 말끝에 붙였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살짝 무책임한 발언이군요.”
“하하, 그야 저 같은 경우는 아니면 말고∼ 이렇게 하고 넘어가면 되겠니까요. 페르코 아카데미의 낙제생이 이런 소리를 지껄인다고 해서 누가 귀를 기울이고,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하지만 문수르 경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구르의 말은 큰 도움이 됐다. 그의 말을 기점으로 문수르는 콩탄 왕국의 정세를 달리 봤다.
‘빅토리안 공작이 야심을 가질 배경은 충분하다.’
빅토리안 공작이 야심을 가졌을 경우, 그 야심을 펼칠 만한 환경은 충분히 조성되어 있다.
‘핵심은 빅토리안 공작인데.’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빅토리안 공작, 본인일 것이다.
‘제이머스 후작을 밀게 될 내 입장에서는 그가 야심을 가지는 타입이면 좋겠군.’
빅토리안 공작 입장에서 제이머스 후작 파벌은 더 이상 적수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빅토리안 공작이 정말 차기 왕위에 욕심이 있다면, 필로스 왕과 대립각을 세우면서까지 더 높은 권력을 욕심낸다면 벌써부터 그것을 위한 밑 준비를 하고 있을 터.
‘기회가 생기는 거지.’
전투 도중 한 눈을 팔고, 딴 생각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제이머스 후작 파벌에 들어갈 각오를 다진 문수르 입장에서는 빅토리안 공작이 그런 방심이라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뭐, 일단 빅토리안 공작이란 인간부터 봐야겠지.”
빅토리안 공작령으로 향하는 길. 그 길목에서 무언가 기괴한 낌새를 느끼게 된 건, 정확히 빅토리안 공작령이 시작되는 곳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였다.
‘뭐지?’
가장 먼저 이상한 낌새를 보여준 건 병사들이었다. 이제까지 빅토리안 공작가 소속의 병사들로부터 잦은 검문을 받았다. 검문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불스 백작이 신분을 증명해주는 건 물론 빅토리안 공작가에서 직접 보낸 파티 초대장까지 있었으니까.
적당한 수준의 검문이었다.
하지만 빅토리안 공작령에 발을 딛자마자 그 검문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졌다.
“창을 확인할 수 있겠소?”
“바지를 벗어보시오.”
“짐은 이게 전부요? 만약 숨기는 게 있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니, 미리 밝히시오.”
분위기를 보면 안다. 이게 단순히 상대방을 놀리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저 다른 곳보다 삼엄한 검문인 건지…….
그게 아니면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갑작스럽게 보안 수위를 높인 건지.
앞선 두 가지 경우라면 문수르가 기괴한 낌새라고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병사들의 표정, 행동, 분위기 등을 봤을 때 필시 갑작스런 문제가 생겼고, 그 때문에 갑작스레 검문 수위를 높인 게 분명하다.
‘빅토리안 공작령 내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고?’
철통같이 검문을 하고, 경비를 서는 빅토리안 공작령에서 무슨 일이 생기다니?
하물며 조만간 있을 파티를 위해서 이 잡듯 영지를 뒤져서 문제의 소지를 일찌감치 처리했을 텐데?
‘뭐든 간에…….’
문수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로이드, GPS파일럿 내 머리 위에 있지.’
- 있습니다.
‘주변 탐색 시작해봐.’
- 알겠습니다.
로이드는 문수르의 의중을 금방 꿰뚫었다.
‘뭐든 간에 빅토리안 공작에게는 매우 껄끄러운 일 일터. 적어도 뭔지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만약 지금 그 무언가가 빅토리안 공작의 약점이라면? 정말 원치도 않았던 대어를 낚는 셈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럼 어디 한 번 움직여볼까?’
여인은 추레한 몰골을 한 채 도망치고 있었다. 험하기 그지없는 산길을 맨발로 달리던 탓에 발은 끔찍할 정도로 망가진 상황이었고, 허리춤을 훌쩍 넘기던 머리칼은 곳곳이 뽑히고, 잘리고, 불에 타버리기까지 해서 병에 걸린 짐승의 털보다 더 흉측했다.
옷은 더 이상 옷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걸레 혹은 넝마. 간신히 몸의 중요한 부위만 가리는 게 전부였다.
당연히 전신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아직 출혈이 멈추지 않은 상처는 물론, 이미 곪아 터진 상처마저 있었다.
보통 여인이라면…… 아니, 나름 건장한 사내라고 이런 몰골을 한다면 아마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헉, 헉…….”
그러나 여인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참으며 계속해서 숲을 해치며,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모두 이 근처를 샅샅이 수색하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메아리 소리에 여인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여인은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인이 주저앉은 장소는 하필이면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곳이었다. 물이 썩고, 땅마저 썩어 진흙마냥 질퍽해진 그 위에 여인은 엎드렸다. 악취가 코를 찌르고, 알 수 없는 온갖 벌레들이 여인의 몸에 다가왔지만 여인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덜덜덜!
여인은 그저 어떠한 공포 앞에서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하필이면 중요한 날을 앞두고 놓치다니.”
그는 기사였다.
갈색 머리칼을 뒤로 넘겨 말 꼬랑지마냥 짧게 묶고, 턱수염을 정갈하게 기른 호쾌한 인상의 기사.
기사의 이름은 보루 헤인즈.
빅토리안 공작가 소속의 기사로 오러 나이트의 경지에 접어든 빼어난 실력자였다.
더불어 그는 실력만큼이나 대접을 원하는 자였다.
“내가 왜 그 넘쳐나는 레이디를 뒤로하고 여기서 그 빌어먹을 계집애 꽁무니를 쫓느라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그는 불만이었다.
“응? 롬, 자네가 한 번 말해보게. 내가 왜 그 넘치는 술과 여자들을 뒤로하고 여기서 이렇게 며칠 동안 노숙이나 하며 고생을 해야 하는 거지?”
“그야 제르둔 후작의 딸 때문 아닙니까?”
“그래, 몰락한 제르둔 후작가의 계집년 때문이지.”
“몰락한 제르둔 후작가의 생존자가 남았어?”
문수르는 갑작스레 알게 된 사실을 듣자마자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무언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가던 루트를 바꿔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때부터 탐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두 가지를 찾았다.
하나는 넓게 퍼진 채 산을 탐색하듯 움직이는 백여 명의 무리들.
다른 하나는 그 포위망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추레한 몰골의 도망자.
대충 감이 왔다. 그래도 보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 탐색자들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정보.
‘제르둔 후작가가 멸족을 당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제르둔 후작가의 생존자를 빅토리안 공작가가 데리고 있다?’
반역죄로 처리되어 가문의 모든 이들이 사형 당한 제르둔 후작가의 딸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제르둔 후작가의 생존자를 빅토리안 공작가가 데리고 있다가 최근 놓쳤다.
‘의심 가는 게 많다.’
이 모든 사실 이면에는 분명 음모가 있다. 빅토리안 공작이 만든 음모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가…… 페스로 제국에서 만든 음모일 수도 있다.
‘어떤 선택지를 고를까?’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문수르의 선택이다.
‘구해서 나쁠 건 없다.’
뭐든 간에 죽었어야 하는 제르둔 후작가의 생존자를 구해줘서 나쁠 건 없다. 무엇보다 문수르는 제이머스 후작가의 편에 설 입장. 제르둔 후작가와 제이머스 후작가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르둔 후작가의 생존자로부터 직접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구해줘서 나쁠 건 전혀 없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빅토리안 공작가와의 마찰. 이 마찰로 인한 파장이 문제다. 당연히 정체가 들켜선 안 된다.
그뿐인가?
구한 다음에도 추적은 계속될 터. 이 과정에서도 들키면 안 된다.
이익은 있되, 리스크는 훨씬 크다.
‘리스크.’
이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대상을 구출한 다음 다시 이곳에서 걸리지 않고 도망치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
문수르가 생각하기엔 정말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 포위망을 뚫는 건 생각보다 쉬울 것 같습니다. GPS시스템으로 확인 결과 도주 루트 확보가 쉽습니다.
‘뭐?’
문수르와 다르게 하늘 위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로이드는 너무나도 쉽게 도주루트를 파악했다.
애초에 하늘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것, 그것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는 건 엄청난 이점이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 지역은 넓은데 사람은 많지 않은 경우. 여기에 상대편은 최첨단도구는커녕, 인력에 의존해서 탐색을 벌이는 상황.
- 12시간 내 강수확률 90퍼센트입니다.
‘비까지 온다?’
여기에 비까지 온다면 도망자에게 훨씬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비가 어느 정도나 올 것 같은데?’
물론 작은 이슬비 정도 오는 거라면 의미가 없다. 적어도 아주 주변이 엉망이 될 정도의 폭우가 오는 게 좋다.
- 아마 쏟아질 것 같습니다.
‘단순히 쏟아진다고 하지 말고, 강수량 같은 거!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해줘.’
- GPS파일럿에 그 정도 기능까지는 없습니다.
문수르는 입을 다물었다.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도움이다.
‘그래, 로이드가 있다면 모르지.’
상황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문수르에게 유리한 쪽으로…… 더군다나 문수르는 한 가지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보를 얻은 후에 죽이는 것도 선택지가 될 수 있지.’
제르둔 후작가의 생존자로부터 전후사정을 알 수 있는 정보를 습득한 뒤에 생존자를 죽이는 선택지.
잔인한 이야기지만, 이거라면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까놓고 제르둔 후작가는 반역죄로 처형당한 가문이다. 그 생존자를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 얻을 것만 얻고 빠르게 처치하는 게 최선이다.
어차피 기록상으로는 죽은 자 아닌가?
문수르가 결단을 내렸다.
‘로이드, 도주 루트 실시간으로 확보해. 그리고 날씨 파악하고. 비가 오는 즉시 움직인다.’
- 알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설명문과 대화문이 구별이 잘 안간다고 해서 바꿔봤습니다.
이게 편하시다면 앞으로 글을 올리 때는 엔터키로 문단을 구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