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00화 (99/293)

100화

3.

말론과 문수르가 짐을 챙겼다. 이제르트 자작에게 짧은 언질만 해둔 후에 그 둘은 곧바로 테블스 산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말론과 문수르는 테블스 산 안에서 헤어졌다.

“부족을 꼭 설득하고 오겠네.”

“좋은 결과가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물론일세.”

말론이 호우투 부족의 설득을 위해 부족으로 돌아갔다. 문수르는 탈라트 부족으로 향했다.

‘과연 설득이 될지 모르겠군.’

탈라트 부족으로 향하는 목적은 당연히 탈라트 부족과의 합의를 위해서였다. 당장 인간 마법사를 영입하기 힘든 이제르트 자작가의 입장에서 마법사를 구할 수 있는 건 탈라트 부족 내의 엘프 마법사들이 유일했다.

‘보통 엘프 부족이라면 설득이 힘들겠지.’

엘프를, 그것도 인간이 설득하기란 힘들다. 한다고 해도 문제다. 엘프의 느긋한 성격은 그들의 본질이나 마찬가지다. 그 본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바꾼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기준으로 1세대 이상은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탈라트 부족은 다르다. 일단 그들은 힘을 필요로 한다. 테블스 산에서 살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저항하기 위해서다.

또한 가장 중요한 부족장 폐욤은 어느 정도 깨어있는 인물이다. 사실 그 깨어있다는 것도 문수르의 기준에서 깨어있다는 거지, 엘프 치고 그 정도면 엄청난 거다.

이런 점 때문에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것도 그렇고.’

여기에 이미 문수르가 그들에게 쌓아둔 호감, 인지도.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한 건 문수르만의 착각이었을까?

“이게 무슨 대접입니까?”

문수르는 제 코 끝을 당장이라도 찌를 듯한 검 끝을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검의 주인은 다름 아니라 가누스였다. 그는 문수르가 탈라트 부족의 마을에 어느 정도 도달했을 때, 다짜고짜 문수르 앞에 등장했다. 오러 마스터, 여기에 엘프인 가누스가 기척을 감추자, 문수르는 정말 가누스의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안면이 없었으면 팔다리 하나쯤은 날아갔겠군.’

가누스.

처음 오러 마스터가 되었을 때 그와 싸우면 적어도 지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는 상황,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싸울 경우다. 그렇다면 로이드의 도움을 받아서 최소한 동수를 이룰 자신이 있다.

그러나 만약 가누스가 모습을 감춘 후에 기습을 한다면? 죽음은 면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 기습 한 번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다.

‘하늘 위의 하늘.’

오러 마스터가 된 이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지만, 어떻게 된 게 날이 갈수록 자신감이 곤두박질치는 느낌이다.

‘내가 부족한 건지.’

문수르는 마음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가누스가 입을 열었다. 검은 여전히 문수르의 코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수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폐욤 족장님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인간 따위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할 만큼 엘프 족의 족장이 우습게 보이나?”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매우 중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만남을 원하는 겁니다.”

가누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짧게 생각했다. 이윽고 문수르의 코끝에서 검이 사라졌다.

“처음보다 약해졌군.”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가누스. 그 말이 가누스가 겨누었던 검 끝보다 더 뾰족한 비수가 되어 문수르의 마음에 꽂혔다. 문수르가 가누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처음보다 약해졌다고?’

그 처음이란 문수르가 처음으로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었을 때를 말함이다. 그때로부터 꽤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문수르는 오히려 그때보다 퇴보한 것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문수르는 그때보다 조금은 강해졌다. 오러의 양도 좀 더 늘었고, 오러의 운영능력도 발전했다. 적어도 퇴보한 건 아니다.

그러나 무(武)의 세계에서 뚜렷한 진일보(進一步)가 없다면 그건 곧 퇴보나 마찬가지다.

하수는 계속해서 강해지고, 고수는 그보다 더 빠르게 강해진다. 이 와중에 정체란 건 결국 퇴보나 마찬가지다.

‘수련이 없었던 건 사실이지.’

최소한의 수행을, 수련을, 연마를 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문수르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문수르는 바빴다. 온갖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제대로 된 수행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무의 세계에서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적이 그런 변명을 듣고 상대를 봐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 변명을 들으면 기뻐하겠지.

‘어떻게든 사람을 구해다가…….’

이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선 문수르 스스로의 업무량을 줄여야 한다.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람을 고용해야 하고. 그런데 인재를 데려오려면 또 다시 이곳저곳을 들쑤셔야 하니…….

‘빌어먹을.’

속만 쓰리다.

탈라트 부족은 분주했다. 문수르는 그 분주함을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마을을 옮기는구나.’

드디어 신목을 옮겨 심으려는 모양이다.

폐욤과의 만남은 금방 이루어졌다. 이러다할 제지나, 검문 없이 문수르는 곧장 폐욤과 자리를 가졌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네.”

인사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폐욤도, 문수르도 말을 질질 끄는 걸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문수르는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폐욤은 그 설명을 듣기만 했다. 그 과정에서 궁금한 부분이 있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자 한 것이다. 질문은 그 다음으로 미뤄뒀다.

문수르의 설명이 끝났을 때, 폐욤은 곧장 질문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을 했다.

이후 폐욤이 한 행동은 가누스를 자리에 동참시키는 것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가누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누스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는 이미 문수르의 모든 설명을 몰래 듣고 있었으니까.

가누스는 문수르에게 질문하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사견이긴 하지만, 부족에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기가스의 필요성은 예전부터 제가 주장했던 부분이입니다. 저로서는 이번 일에 대해서 찬성밖에 할 게 없습니다.”

여기서 문수르는 살짝 놀랐다.

‘가누스가 예전부터 기가스의 필요성에 대해서 주장을 했다고?’

가누스는 오러 마스터임과 동시에 탈라트 부족의 무력(武力)을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인간들이 다루는 절대병기 기가스의 효용성과 필요성을 모를 리 만무하다. 그것만 있으면 보통의 오러 나이트도 오러 마스터 수준의 능력을 보여준다. 기가스 다섯 대만 있으면 테블스 산을 정복하진 못하겠지만, 충분히 부족의 안위를 보장 받을 수 있다.

사실 탈라트 부족 내의 엘프들의 사망률은 생각보다 높았다. 때문에 탈라트 부족은 도무지 커지질 못했다. 언제나 비슷한 규모만 유지했다. 사망률만 어찌하면 수명이 긴 엘프들 입장에서 부족의 규모가 커지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데 말이다.

하지만 폐욤은 그런 가누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못했다.

기가스 제작을 위해서는 인간과 드워프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엘프 부족이 그런 게 가능했으면 이제까지 이렇게 인간들에 쫓겨 테블스 산이라는 극한의 땅에 머물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던 차에 문수르가 온 것이다.

사실 문수르의 제안은 나쁠 게 없었다. 기가스에 대한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고, 드워프가 참여한다면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이루 말할 게 없다. 그리고 드워프 부족은 충분히 믿을만하다.

문제는 인간이다.

과연 인간을 믿을 만한가, 아닌가.

그게 이번 일의 핵심이었다. 가누스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문수르라는 자, 개인은 믿을 수 있습니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의외의 말. 자신을 믿어준다니?

‘믿으면서 코앞까지 검을 꺼내나?’

참 대단한 믿음이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령, 전체를 믿을 순 없습니다. 그것이 제 의견입니다.”

가누스는 안다. 인간들 중에서도 좋은 인간이 분명 있다. 개개인으로 봤을 때 혹은 소수의 무리로 봤을 때 오히려 엘프들을 위해 인간들과 싸우는 자들까지 있다.

하지만 그 무리가 커질수록, 믿음은 떨어진다. 특히 영지, 국가 단위로 가면 필연적으로 엘프를 박해하게 된다.

대세를 따라야 무리가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수르도 인정한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인간인 문수르조차 인간을 믿을 수 없는데 누가 인간을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걸 그냥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 최소한의 신뢰를 줘야 한다. 그리고 그 신뢰란 명확한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문수르가 준비한 것이 바로 그 명확한 계약이다.

“저는…… 테블스 동맹이란 걸 계획 중입니다.”

“테블스 동맹?”

문수르가 기획하는 건 다름 아니라 삼각 동맹이었다.

테블스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세 종족이 동맹을 맺는다. 인간 쪽은 당연히 이제르트 자작가, 엘프는 탈라트 부족, 드워프는 호우투 부족.

이 동맹의 결성 목적은 테블스 산에서의 생존이다. 그 생존을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양산이 가능한 0.6배 급 기가스 아이언히트의 제조다.

아이언히트는 각 부족에게 양도된다. 12대가 생산될 경우 이제르트 자작가가 6대를, 나머지 6대를 탈라트 부족과 호우투 부족이 각각 3대씩 양도 받는 것이다.

“만약 이제르트 자작가가 동맹의 규칙을 어기고, 그 정도가 심할 경우 호우투 부족과 탈라트 부족이 연합하여 이제르트 자작가를 공격해도 무방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것 역시 명시할 겁니다.”

이 삼각동맹의 핵심은 균형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호우투 부족과 탈라트 부족이 서로 힘을 합치면 이제르트 자작가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나쁘지 않은 수치다.

물론 이제르트 자작가는 다른 외부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외부적인 힘이 추가되면, 탈라트 부족과 호우투 부족이 연맹을 해도 이제르트 자작가를 어찌할 순 없다.

때문에 결국 다시 본점으로 들어온다.

과연 이제르트 자작가를 믿을 만한가? 그리고 문수르를 믿을 만한가?

폐욤은 고민에 빠졌다. 그 역시 기가스의 필요성은 분명하다. 문수르가 제시한 테블스 동맹이란 것도 매력적이다. 정말 문수르의 말대로 일이 진행될 경우, 극한의 땅이라던 테블스 산에서 생존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잘 선택해야 한다. 결국 인간들은 엘프 부족을 노리고 있다. 그들을 사냥하고자 한다. 사냥감을 유혹하는 사냥꾼은 있어도, 사냥꾼과 타협하는 사냥꾼은 없다.

과연 이제르트 자작가는 사냥꾼인가, 아닌가?

폐욤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의 결정이 곧 부족의 결정이 될 테고, 부족의 미래를 판가름할 테니까.

“확답을 내리긴 힘들군.”

때문에 폐욤은 당장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 중요한 이야기를 고작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내리기엔 문제가 있다.

달콤하다고 독이 든 사과를 삼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무작정 반대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호우투 부족의 족장이 참가한 상황인 만큼, 호우투 부족의 대표들도 참석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문수르의 눈빛이 빛났다.

‘좋다.’

이 흐름, 충분히 문수르에게는 좋은 흐름이다. 더군다나 세 종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테블스 동맹에 대해서 보다 깊은 논의가 가능하다.

애초에 문수르는 단순히 테블스 산에서 생존 따위만을 추구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이언히트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 수가 전술적인 운용이 가능할 정도가 된다면…… 여기에 로이드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테블스 산을 정복하는 것도 가능하다.’

테블스 산의 정복.

그것만 가능하다면 이제르트 자작령은 엄청난 땅을 얻게 된다. 무엇보다 엘프 부족의 마법과 드워프 부족의 기술력을 동맹이란 이름하에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게 된다.

솔직히 문수르가 인구수 문제에 봉착했을 때, 인구수 증가보다 더 현실성이 높다고 생각한 건 다름 아니라 인구 대비 노동력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어스 월드만 해도 그렇다. 첨단화된 농업 덕분에 개인이 재배할 수 있는 경작지는 케르빈 월드의 수백, 수천 배에 이른다. 마법과 기술력이 있으면 그와 비슷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러 부분에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특히 문수르가 원하는 건 드워프 부족과 엘프 부족의 수명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또한 그들이 이제르트 자작령 내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면 종국에 그들은 문수르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최대한 오래 동안 보존해줄 것이다.

“제가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기회가 왔다.

어떻게 해서든 그 기회를 살려야 한다.

“자리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이제르트 자작의 성에서 가능하겠는가?”

폐욤이 물었다. 문수르는 살짝 놀랐다.

‘성에서?’

이제르트 자작의 성은 인간의 본진, 그곳에서 회담을 가진다?

“테블스 산보다는 그곳이 안전할 듯 싶으니. 무엇보다 자네도 중요하지만, 이번 일에서 이제르트 자작 역시 중요할 터. 그를 보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건 문제가 있지.”

이 순간 문수르는 정말 짧게 고민했다.

‘가누스와 폐욤, 이 둘이 이제르트 자작을 노릴 경우 난 그들로부터 이제르트 자작을 지킬 수 있을까?’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경우……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이제르트 자작의 목숨은 중요하다. 그 어떤 것보다 말이다.

그러나 그 고민은 짧았다.

“가능합니다.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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