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26화. 테블스 동맹.>
1.
이제르트 자작령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장 고구마부터가 좋은 사업 아이템이 됐다. 처음에는 불스 백작이 고구마를 구매하고 싶다고 제의를 해왔다. 겨울 동안도 수확이 가능한 고구마였기에 고구마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때문에 돈을 받고 고구마를 팔진 않았다.
행운은 그 다음이었다.
콩탄 왕국의 정계에서 불스 백작가의 위상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여러 귀족들이 불스 백작과의 친분 교류를 위해 그의 영지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실 그들의 관심은 불스 백작, 그보다는 잠정이긴 하지만 세 번째 오러 마스터로 취급받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 문수르에게 꽂혀 있었지만 이제르트 자작이 가지는 특성…… 필로스 왕이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르트 자작과 직접적인 만남을 꾀하는 귀족은 없었다. 은밀하게 편지 등을 통해 말을 걸어올 뿐.
결국 불스 백작은 이제르트 자작과 대신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소통창구였던 셈이다. 정치적으로 큰 결점이 없으며, 변방이긴 하지만 백작 위란 고위 작위를 가진 그를 만나는 일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불스 백작이 고구마를 내놓은 것이다. 문수르가 가르쳐준 몇 개의 요리법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게 귀족들의 입맛에 제대로 먹힌 것이다.
“팔긴 팔아야겠지만, 이런 식으로 팔게 될 줄은 몰랐군.”
문수르가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상등품의 고구마만 따로 감별한 다음 최대한 멋지게 포장을 해서 구매를 요청한 귀족들에게 판매를 시작했다. 엄청난 돈이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냥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귀족들과의 거래가 진행됐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케르빈 월드에서 거래를 주도하는 자들은 귀족이다. 영주이기도 한 그들은 공급자이며, 수요자다. 상인들은 그 중심에서 이런저런 이익을 챙기는 부류이다. 더불어 귀족들 중 일부는 아예 스스로가 상단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귀족들에게 찍힌 이가 제대로 된 상거래를 진행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판매든 구매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그 때문에 이제까지 입은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런 손해가 사라진 것이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필요한 게 있으면 합당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며, 팔 게 있으면 적당한 가격에 팔 수 있었다.
금전적인 이익도 큰 이익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이제르트 자작가에 준 영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드디어 이제르트 자작령도 사람 사는 곳이 됐군.”
“아무렴, 이제 이곳만큼 살기 좋은 곳도 없을 거야.”
“당연하지! 이제르트 자작님만큼 훌륭하신 영주님이 어디 있기나 하나?”
영지민들이 가지게 되는 심리적 안정감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이었다.
문수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 대한 차별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이제르트 자작령의 가장 큰 문제는 인구다. 땅도 있고, 기술도 있는데 사람이 없다.
하지만 영지민이 아닌 일반 평민이 이제르트 자작령에 올 이유는 없다. 테블스 산이란 몬스터들의 소굴이 있는 땅에 누가 오고 싶어 한단 말인가?
반대로 말하면 몬스터들의 소굴을 바라보고 있지만 살만한 곳이라면 오지 못할 것도 없다. 억지로, 강제로 사람을 데려와도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제르트 자작령이 인구수 증가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었다.
“말론을 찾아가야겠군.”
그림은 머릿속에 있다. 문제는 그 그림을 직접 그려줄 실력자다.
2.
말론은 바빴다. 그는 문수르가 부탁한 이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하지만 말론은 그런 자신의 처지에 굉장히 만족했다. 문수르가 요구하는 것들은 말론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론은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말론 님, 저번 그 문제 때문에 여쭤볼 게 있습니다.”
“제가 만든 건데 감정 좀 해주시겠습니까?”
“저번에 감사했습니다. 보답으로 먹을거리를 조금 가져 왔습니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사람들은 말론을 정말 극진이 대접했고 또한 존경했다. 모든 이들이 그랬다. 평범한 사람들부터 기술자 심지어 기사들까지! 그들 모두가 말론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언제나 인간들로부터 배척 받고 심지어 사냥까지 당하며 살기 위해 도망쳐야만 했던 말론의 삶에서 이렇게까지 인간에게 대접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배움이 있고, 좋은 작업 환경이 있으며, 존중을 받는다.
기술자에게 이 보다 좋은 환경이 있을까?
문수르가 찾아왔을 때 말론의 입가에 웃음이 넘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들떠 있고, 기분이 좋아보이는 말론의 모습에 문수르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잠시 삼켰다. 무언가 조짐을 느낀 것이다.
“별 거 아닐세. 그냥 기분이 좋을 뿐이네. 그보다 자네가 부탁한 작업은 끝내놨네.”
“벌써 끝내셨습니까? 몇 주는 거 걸릴 줄 알았는데…….”
“이제르트 자작령의 기술자들도 실력이 뛰어나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들로 충분하더군. 몇 가지 지도만 해주니 금방 끝나더군.”
“하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론의 들떠있는 분위기.
‘어쩌면…….’
기회다.
문수르는 지금이 이제까지 뜸을 들여왔던 것을 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넌지시 운을 땠다.
“그보다 부족에도 한 번 방문했다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그동안 부족에서 오래 나오셨는데, 호우투 부족에서 말론 님을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흥,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우리 부족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네. 내가 이삼십 년 사라진다고 해도 걱정 따윈 없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 또한 조만간 탈라트 부족과의 만남을 위해 테블스 산 안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때 같이 가시겠습니까?”
“엘프 부족을 만나? 무슨 이유로 말인가?”
“다름이 아니라 기가스 제조를 위해서 엘프 부족의 협의를 끌어내기 위해서…….”
잠시 뜸을 들이는 문수르. 일부러 들인 뜸이었다. 말론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말론의 표정이 들썩거렸다. 기분이 나쁜 건가? 아니다. 기세만으로도 알 수 있다. 지금 말론은 흥분한 상황이었다.
“기가스라니?”
“역시 영지 운영을 위해선 기가스가 필요하더군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제르트 자작령엔 기가스가 고작 한 대뿐 아닙니까? 그렇다고 어디서 기가스를 구할 처지도 아닌, 직접 만드는 방법 밖에 없더군요.”
말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계도가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지.’
그러나 이내 말론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자네가 보여준 그…… 그 기가스를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터인데? 당장 우리 부족이 달라붙어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걸 만드려고 하는 건가?”
“아닙니다. 좀 다른 기가스입니다.”
“좀 다른 기가스?”
미끼를 던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보통 기가스보다 출력은 약하지만, 대신에 생산단가가 훨씬 낮아서 양산이 가능한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하하, 설명하는 게 좀 어렵군요.”
문수르는 자신했다. 지금 자신이 던진 이 떡밥을 말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물 것이라고.
“그게 무엇인가?”
역시나 문수르의 예상은 맞았다. 말론은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수르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냥 문 정도가 아니라 미끼를 놓지 않으려고 달라붙었다.
“혹시 내가 설계도를 볼 수 있겠는가?”
“물론이지요. 잠시 기다려주시면 설계도를 가져오겠습니다.”
문수르는 잽싸게 아이언히트 설계도를 가져왔다.
아이언히트의 설계도를 본 말론은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지.”
세상은 추구한다.
보다 강력한 출력을 가지고, 그런 출력을 버틸 수 있는 보다 강력한 동체 그리고 그 출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보다 경량화 된 기가스.
그게 이상한 건 아니다. 애초에 보다 강력한 힘, 보다 강력한 병기를 추구하고, 개발하다보니 나온 것이 기가스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보다 강한 기가스를 추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무조건 강한 기가스만 추구하는 게 과연 정답일까?
“아니, 훌륭하군. 그래 이런 개념도 있었어.”
적재적소는 중요하다.
닭 잡는 데에는 닭 잡는 칼을 써야 한다. 반대로 소 잡는 데에는? 물론 어떤 칼은 닭도, 소도 제멋대로 잡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효율적으로 봤을 때 닭 잡을 때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다.
기가스도 다를 게 없다.
강력한 기가스가 있으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세상은 온갖 제약과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자원의 문제, 시간의 문제, 돈의 문제, 인력의 문제…… 보다 강력한 기가스를 만드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자. 보다 약하지만 보다 저렴한…… 적은 자원과 짧은 시간, 저렴한 비용과 적당한 인력으로 기가스를 만든다면 과연 어떨까?
그 결과물이 보통의 기가스보다 훨씬 약하다고 해도, 충분히 효용성이 있다.
언뜻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
“용케 이런 걸 생각해냈군.”
하지만 이제까지 그 누구도 이 생각을 구체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수르가 그걸 구체화한 것이다.
“이 정도면 지금 당장 만들 수 있겠군. 0.6배 급 출력이란 게 흠이기는 하지만…….”
“전 그게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배 급 기가스도 충분히 강력한 병기입니다. 오우거 같은 몬스터와도 어느 정도 대등한 전투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0.6배 급이면 트롤 수준의 몬스터는 충분히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2대 이상이 모인다면 오우거도 상대가 가능하지요.”
“그렇지.”
“더군다나 숫자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 위력은 달라질 겁니다. 이 세상에는 몸 하나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대로 몸이 백 개라면 할 수 있는 건 더 많아지지요. 무엇보다 정말 머릿수가 많아지면 보다 다양한 전술적 움직임이 가능해집니다.”
“음음!”
말론은 고개만 끄덕였다. 문수르의 말이 백번 맞았다.
“곧바로 제작에 들어갈 것인가?”
“엘프 부족의 도움을 얻는다면 당장이라도 제작에 들어가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그래, 그게 문제지. 엘프들은 너무 느긋해서 문제일세. 하물며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게 쉽진 않을 터.”
“그래서 탈라트 부족에 제안을 할 생각입니다.”
“제안? 그게 무언가?”
“아이언히트를 생산한 후에 그중 일부를 탈라트 부족에 양도하는 걸 의미합니다.”
“뭐, 뭐라고?”
순간 말론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문수르가 한 말이 정말 진심인 것일까?
“내, 내가 잘못 들은 것 같군.”
아니다.
아무리 문수르가 대범하고, 독특한 인간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이다. 말론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론을 보며 문수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탈라트 부족에 아이언히트를 일부 양도하는 걸 말하는 겁니까?”
“자네…… 진심이군.”
잘못들은 게 아니다.
“안 될 게 있습니까? 솔직히 그 정도 제안이 아니고서는 엘프 부족의 마음을 움직일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탈라트 부족 역시 전력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아이언히트를 소유할 수 있게 된다면, 아이언히트의 제조에 보다 협조적으로 나올 테니, 이제르트 자작령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습니다.”
“그들이 아이언히트란 기가스를 가지고 이제르트 자작령인 다른 영지를 공격할 경우는 생각하지 않은 건가?”
말론이 놀란 가장 큰 이유.
엘프와 인간의 사이는 좋지 못하다. 엘프 손에 그런 병기가 쥐어진다면, 필시 그 병기의 끝은 인간을 향할 터.
하지만 문수르의 생각은 달랐다.
“인간은 같은 인간으로부터 충분히 위협을 받는데, 엘프 족의 위협을 받는다고 해서 뭐 크게 달라지겠습니까? 오히려 공동으로 아이언히트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많은 협의와 합의를 진행한다면 적어도 서로 검을 겨누기 전에 대화를 먼저 할 수 있는 관계는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전쟁 따윈 일어나지도 않았을 걸세.”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어떤 경우가 됐건 전쟁이 일어난다는 의미지요.”
그 순간 말론은 결단을 내렸다.
“호우투 부족도 도움을 주겠네. 그러면 호우투 부족에도 아이언히트를 일부 양도해줄 수 있는가?”
말론의 숙원이었다.
호우투 부족이 기가스를 보유하는 것!
아주 강력한 기가스, 2배 급 이상의 기가스는 아니지만 아이언히트에게는 다른 장점이 있었다. 어쩌면 2배 급 기가스 한 대를 어설프게 보유하는 것보다 아이언히트를 다수 보유하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다.
‘오케이.’
그리고 말론의 그런 숙원이 담긴 말은 문수르가 가장 기다렸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수르는 기쁨을 숨긴 채 담담하게 말했다.
“안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호우투 부족이 전면적으로 도움을 준다면, 그리고 서로가 합의와 협의를 나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말론은 거기서 더 이상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필코 호우투 부족을 설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