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98화 (97/293)

98화

6.

에베레스트 산을 올랐다. 요즘은 돈만 내면 에베레스트 산에 오를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그런 잘 닦여진 길이 아니라 무작정 올랐다. 맨손으로 얼음을 부수고, 절벽을 올랐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없었다. 솔직히 문수의 육체는 이미 인간의 궤를 벗은 지 오래다. 오러를 쓰지 못한다고 해도, 그의 근육은 보통 인간의 그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손가락만으로 절벽을 오를 수 있었고,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맨몸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에베레스트 산이 가지는 혹독함은 혹독함이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힘들었다. 보통 육체가 힘들면 그 다음에 정신이 힘들어지는데, 문수는 달랐다. 육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지만, 에베레스트 산을 오를수록 정신이 지쳤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이 지치게 된 계기는 문수, 본인이 가지고 있는 근심걱정이었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차라리 힘들었다면 모르겠다. 이것도 훈련의 일종이라고, 시련의 일종이라고 받아 넘겼을 것 같다.

그러나 너무나 허무했다. 혹한의 산은 타인의 이야기였다. 문수에게 에베레스트는 더 이상 감흥조차 주지 못했다. 그 위험하다는 고산병조차 문수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나 계속 오를 때마다 문수는 볼 수 있었다.

“이걸로 스물두 번째군.”

그건 시체였다. 동물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 추위 속에 제대로 썩지 못한 시체였다. 때문에 시체는 살아생전의 모습을 상당부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밀랍 인형 같은 느낌이 났다. 그래서 더 섬뜩했다.

물론 문수는 시체를 봤다. 그뿐인가? 스스로 많은 시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직접 살아있는 인간도 죽여 봤다. 솔직히 죽음 앞에선 그 누구보다 담담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시체들을 보니 갑자기 두려워졌다.

단순히 시체, 그 자체만으로 두려워진 건 아니었다. 시체는 많이 봐다.

단지 그 시체의 의미가 조금 달랐다. 에베레스트 산에 너부러진 시체들은 도전자들의 시체였다.

도전을 포기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시체들. 도전을 했다는 명백한 증거들.

그리고 문수 역시 지금 도전자였다.

‘나도 언젠가 죽겠지.’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죽는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 사실에 대해 많이 고민해봤고, 고뇌해봤다. 그리고 그 고민과 고뇌를 극복했다. 아니, 극복했다 여겼다.

그러나 문수는 아직 그 죽음을 극복한 게 아니었다.

소중한 것이 생겨서, 원하는 것이, 열정이 생겨서 그런 걸까? 갑자기 죽음이 두려워졌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 몸이 떨려왔다. 혹한의 추위조차 하지 못했던 문수의 몸뚱이가 공포감에 떨기 시작했다.

케르빈 월드에서 꿈을 품었다. 목표를 품었다. 열정이 생겼다.

그러나 케르빈 월드에서는 죽음이 넘쳐난다. 문수는 당장 그곳에서 무조건적인 생존을 장담할 수 있나?

없다.

그는 강자지만, 그 세계에는 문수가 어찌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힘이 존재하고 있다.

원하는 것이 있지만 그만큼 위험한 세계. 그게 바로 케르빈 월드였다.

‘내가 조급했던 게 맞다.’

그제야 한석균이 했던 말을 조금은 이해했다. 너무 조급했다. 열정만 가지고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만약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면? 이미 문수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여러 차례 걸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여러 번 했다.

문제가 생기면 이제 단순히 훈계와 반성이 아닌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때부터 문수의 시선이 조금씩 바뀌었다. 에베레스트의 풍경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문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은 것도 이유겠지만, 문수 곁에 많은 사람이 붙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 돈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문수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문수에게 인사를 청해왔다. 문수는 그런 그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이코노미석을 탈 걸 그랬어.’

그래도 일단 한석균 후계자인데, 대뜸 접근하는 이들을 박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행실을 보면 나름 한 가닥 하는 기업인들로 보였는데. 물론 개중에는 어중이떠중이도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렇기 비행기에서 휴식을 취하지 조차 못한 채 파리에 도착했을 때 문수는 사실 조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가만 생각하니, 파리는 난생 처음이네?”

여행 좀 한다는 사람들은 한 번쯤 찾는다는 파리. 그러나 유럽 여행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한석균을 만나기 전에는 꿈도 꿔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억지로 유럽에 온 것이다.

“생각보다 별로군.”

그러나 파리가 주는 느낌은 그다지 대단치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새로운 무언가가 문수에게 느낌을 주기란 쉽지 않았다. 문수가 누구인가? 다른 차원으로 일하러 떠나는 자다. 그런 그에게 이국적인 느낌, 중세적인 느낌 따위는 아무런 감흥조차 주지 못했다.

파리 관광은 없었다. 문수는 곧장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문수는 솔직히 자신의 예술품 보는 눈이 일반인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좀 유명한 그림이라면 모를까, 추상적인 그림들…… 무슨 점 하나 찍어놓고 수백억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는 그림들은 솔직히 지금도 이해 못하겠다. 그걸 그린 작가의 실력이 대단하든 말든, 타인이 보기엔 그냥 점 하나 찍은 거고, 물감 좀 튀긴 건데 그게 무슨 수십, 수백억이 넘는 돈에 거래가 된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부자들이 탈세 목적으로 구매한다고 했을 때는 그게 진짜 이유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문수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아우라가 다르네.”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직접 두 눈으로 느껴보니 그림에서 어떠한 힘이 느껴졌다.

그 그림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우라였다. 직접 보지 못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아우라.

‘이게 명작이란 건가?’

이런 거라면 왠지 돈을 투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수중에 돈이 넘쳐난다면야, 이런 그림 하나쯤은 집에 걸어두면 왠지 무언가 느낌이 다를 것 같기도 하다.

문수는 그렇게 몇 개의 작품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똑같은 작가의 작품인데, 방금 전 작품에서 느껴지던 아우라가 없어.’

궁금했다.

왜 같은 작가의 작품인데 느껴지는 게 다른 걸까? 그 부분이 궁금해서 몇 가지 물어봤다.

“이 작품 같은 경우는 너무 훼손이 심해서 거의 새로 작품을 시작하는 수준의 복원 작업을 거쳤습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그래도 처음 작품에 가장 가까운 상태로 복원되었습니다.”

그림 자체는 처음과 다르지 않겠지.

그러나 그 복원 과정에서 아무래도 아우라라는 것, 느낌이란 것마저 복원하진 못한 모양이다.

여기서 문수는 깨달았다.

‘회장님은 이걸 말해주고 싶었나보군.’

보는 눈이 생겼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명작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도움은 되겠지.’

이거라면 모든 경우는 아니겠지만, 조건이 맞는다면 진품과 가품을, 명작인 것과 아닌 것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소더비 경매에 참가해서 그림을 사라는 거로군.’

한석균이 루브르 박물관 관람 이후에 소더미 경매에 참가하라는 일정을 세운 것이 이해가 됐다. 한석균은 시험하고 싶은 것이다. 문수가 자신이 원하는 걸 파악했는지, 원하는 걸 얻었는지 말이다.

“흠.”

한석균의 의중을 파악한 이상 더 이상 루브르 박물관이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한석균이 짜준 일정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지금 당장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특히 한석균이 짜준 일정에는 콘서트를 주최하라는 말도 있었다. 지금 문수가 가장 짜증을 내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만 나갑시다.”

문수는 아무런 여한 없이 박물관을 나섰다. 그리고는 곧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한석균이 사용하던 전세기가 도착한 상황이었다.

“눈 좀 붙일 수 있겠군.”

그러나 그 생각은 문수의 착각이었다. 전세기에 탑승하는 순간 문수를 기다리는 건 한석균이 보낸 설계도와 설명서였다.

문수의 요구에 따라 한석균은 기존에 설계했던 기가스에서 성능을 대폭 다운그레이드한 새로운 타입의 기가스를 내놓았다.

출력을 케르빈 월드를 기준으로 다지면 2.5배 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 케르빈 월드에서 최신으로 불리는 3배 급에는 미치지 못하는 출력이었다.

“개인적으로 3배 급 정도는 기대했는데…….”

- 출력이야 얼마든지 높일 수 있네. 당장 만들어준 동력 장치를 이용하면 6배 급 출력도 얻을 수 있지. 문제는 자네도 알다시피 동체지. 출력이 강하면 동체가 버티지 못하네.

“합금 등, 새로운 금속으로도 불가능합니까?”

- 케르빈 월드에서 나오는 특수한 금속들을 이용한 합금이라면 가능하네. 애초에 그걸 염두에 두고 설계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그걸 구할 형편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요. 그럼 이건 당장 만들 수 있는 겁니까?”

- 돈은 들겠지만, 아마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 내의 기술력과 자금력으로 충분히 제조가 가능할 걸세. 하지만 장점만 있는 건 아닐세.

“단점도 있습니까?”

- 없을 수가 없지.

출력은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동체다. 동체의 내구성이 문제였다.

- 억지로 출력을 올릴 경우 2.5배 급. 이 경우에 전투 가능시간은 2시간 남짓이지. 이후에는 동체에 무리가 오네.

“2시간이라…….”

전투 시간 2시간. 말이 2시간이지, 격렬한 전투가 아니라 단순한 이동에도 적지 않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 거대한 기체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엄청난 힘을 요구하는 행위니까.

“출력을 줄여도 되니, 대신에 장시간 이용이 가능한 방향으로 설계는 안 됩니까?”

- 그래서 밸런스 시스템을 탑재했지.

“밸런스 시스템?”

- 몇 가지 부품의 교체를 통해서 출력을 줄이는 대신 기동력과 가동시간을 늘리는 시스템이네. 출력을 최대 0.5배급으로 줄인다면, 19시간 이상 운행이 가능하지.

0.5배 급이란 말에 순간 문수의 눈이 번쩍였다.

“혹시 0.5배 급을 기준으로 기존의 기가스보다 좀 더 작은 크기의 기가스도 설계가 가능합니까?”

- 음?

한석균의 말이 잠시 멈췄다. 한석균은 잠시 고민하더니, 그 역시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 양산을 하려는 건가?

“가만 생각하니까 굳이 스펙이 좋은 게 정답은 아닌 듯합니다. 1배 급이 아니더라도, 0.5배급 수준이라고 해도 10대 이상이면 그 효용성은 훨씬 클 것 같은데? 더군다나 소형화를 하게 되면 기동력 확보도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 맞는 말이군.

이때부터 문수와 한석균의 논의가 시작됐다. 로이드의 실시간 계산을 통해 새로운 타입의 기가스 설계에 나선 것이다.

0.6배 급의 출력.

대신에 생산단가는 1배급 기사스의 25퍼센트, 1/4에 불과.

기동력을 중시하는 타입1과 전투력을 중시하는 타입2.

케르빈 월드의 기가스 역사를 바꾸게 될 아이언히트(Iron Hit)의 탄생이었다.

7.

- 주인님 도착했습니다.

로이드의 말에 문수는 무거운 눈꺼풀을 움직였다. 비행 내내 한석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후에 한석균이 건강을 이유로 휴식을 취하러 간 후에도 문수는 로이드와 함께 논의를 했다.

덕분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내내, 뜬 눈으로 지냈다.

‘20여 분 정도 눈만 붙였군.’

괜히 눈을 붙였다. 차라리 잠들지 않았으면 덜 피곤했을 것 같다.

“콘서트 주최하러 가야 하나…….”

한국에서의 일정. 그건 다름 아니라 콘서트 주최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문수의 주도 하에 콘서트를 주최하는 게 한석균 회장의 명령 아닌 명령이었다.

솔직히 문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감조차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예 모르는 분야니까. 따로 공부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던 분야다. 그런데 그걸 하라니?

-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응?”

- 콘서트 일정은 취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수의 마음을 알았는지, 한석균이 일정을 변경했다.

“그럼 다음 일정은 뭔데?”

-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습니다.

“뭐?”

심지어 앞으로 있던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단다. 한석균이 원하는 걸 문수가 이루었기 때문일까?

“그럼 이제부터 자유시간인가?”

문수는 살짝 기대했다. 자유시간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수련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케르빈 월드로 다시 넘어가기 전에, 예전부터 구상하던 창술 하나를 완성하고 싶었다.

- 아닙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놔줄 한석균이 아니다.

- 이제부터 마법수식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법 관련 공부는 저번에 다 했잖아?”

- 회장님이 말씀하기길, 설계도를 보여줘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니 속이 터지신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실무 위주의 교육을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문수의 표정이 구겨졌다.

마법은 정말 그랑 안 맞는다. 다른 건 공부하겠는데, 마법 공부는 정말 싫다.

- 표정 구기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젠장.”

- 어쩌겠습니까? 까라면 까셔야죠.

“너 맞을래?”

- 때리실 수나 있으십니까?

“젠장 내가 말을 말아야지.”

간만에 로이드가 제대로 깐죽거리는 날이었다.

============================ 작품 후기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