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24화. 세 번째 오러 마스터.>
1.
불스 백작은 제이머스 후작으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편지는 장문이었다. 그리고 여러 장이었다. 대충 봐도 10장은 훌쩍 넘기는 듯했다. 제이머스 후작과 그다지 친분이 깊지 않은 불스 백작의 상황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괜찮군.”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이머스 후작 입장에서 불스 백작은 변방의 백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제이머스 후작이 보낸 장문의 편지, 그건 다름 아니라 불스 백작을 향한 열렬한 구애였다.
“후후.”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불스 백작은 미소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머스 후작의 편지를 내려놓은 불스 백작은 새로운 편지를 집었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니라 빅토리안 공작가에서 보낸 편지였다. 두툼한 것이 이 역시 장문의 편지였다.
불스 백작이 가장 기다리던 편지이기도 했다.
“역시 전부들 몸이 달아올랐군.”
빅토리안 공작가와 제이머스 후작가. 현재 콩탄 왕국의 정계를 양분하는 두 거대 파벌의 수장들이 불스 백작을 향해 열렬한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2.
이제르트 자작은 솔직히 놀랐다.
“문수르 경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이제르트 자작 앞으로 두 귀족가로부터 편지가 왔다. 보통 때라면 귀족가로부터 오는 편지들 대부분이 빚을 갚으러 독촉하는 내용의 것들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빅토리안 공작가와 제이머스 후작가라니.”
이제르트 자작 입장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과 권력을 쥐고 있는 두 가문에서 이제르트 자작에게 러브콜이나 다름없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러브콜은 아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상황은 다른 귀족가와 달랐으니까. 필로스 왕이 왕위에 오르는 걸 마지막까지 반대했던 귀족가 아니었던가? 친왕파 귀족들이 그런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러브콜을 보낸다는 것도 웃긴 소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빅토리안 공작가와 제이머스 후작가는 어느 정도의 타협점을 제시하며,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이제까지 무시만 당하고, 박해만 받았던 이제르트 자작가가 정치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대적 기회가 온 것이다.
“흠.”
물론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빅토리안 공작과 제이머스 후작, 이들이 지금 두 파벌로 양분된 채 정쟁을 벌인다는 건 콩탄 왕국의 귀족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 이제르트 자작도 알고 있다.
때문에 선택이 필요하다.
어느 쪽이든 택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은 빠를수록 좋다.
“문수르 경의 의중이 궁금하군.”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은 당장 선택하지 못했다. 문수르의 의중이 중요했으니까. 이 모든 판을 이룩한 건 문수르다. 그렇다면 다음 판을 준비하는 것도 문수르에게 맡겨야 한다.
단!
“준비는 해두어야겠지.”
문수르가 어느 선택을 하든, 이제르트 자작은 그 선택에 힘을 실어줄 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이제르트 자작이 해야 할 일이었다.
3.
문수르는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까닥까닥!
다행히도 손가락은 정상으로 움직였다. 팔뚝에 난 상처를 다시 살펴본 문수르는 한숨을 쉬었다.
- 치료는 완벽합니다.
로이드가 그런 문수르의 걱정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적당히 힐링 마법이나 한 번 받으면 되겠지.”
노믹스와의 전투에서 얻은 상처는 생각만큼 심각한 건 아니었다. 물론 아주 상처가 얕았단 의미는 아니었다. 상처는 깊었으나, 다행히도 중요한 부분까지 다치진 않았다. 문수르가 가져온 간단한 응급키트만으로 충분히 수술이 가능했다.
꽈악!
다시금 주먹을 쥐어본 문수르가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과 불스 백작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그 연락을 기점으로 더 이상 문수르가 페르코 아카데미에 있을 이유는 없어졌다.
문수르는 정리를 준비했다.
가장 먼저 해톤과 마구르를 만났다. 어떤 의미에서 문수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그 둘에게 문수르는 전후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만약 졸업 후에 정말 갈 곳이 없다면 이제르트 자작령에 와줬으면 좋겠습니다.”
해톤과 마구르는 문수르의 말에 눈빛을 빛냈다. 그 이상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그동안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니까.
“프리실라, 그 아가씨는 만날 필요가 없을 테고.”
이후 문수르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찾아갔다.
“이제르트 가문의 도련님을 만나면 되는 건가?”
페르코 아카데미에 온지 꽤 됐다. 그러나 이제까지 문수르는 단 한 번도 이제르트 자작가의 진짜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이제르트 자작의 아들, 롤로이 이제르트와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문수르가 바쁘긴 했지만 그에겐 자유시간이 있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걱정부터 드는군.’
그러나 만나지 못한 건 근심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문수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롤로이 이제르트의 능력과 인성이었다.
지금의 이제르트 자작은 훌륭하다. 그는 문수르가 원하는 이상의 자질과 능력과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에게도 그런 자질과 능력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물론 문수르가 단순히 이제르트 자작의 활동기간 동안 이제르트 자작가를 반석에 올리는 거라면, 그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어차피 문수르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문수르는 소망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자신이 이룩한 것이 남아있기를, 자신이 남긴 것들이 유지되기를 말이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계속해서 좋은 영지로, 좋은 세상으로 남아있기를 원했다.
그걸 위해 가장 중요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이제르트 자작가의 후계자, 롤로이의 존재였다.
만약 롤로이가 문수르의 기준 이하라면, 문수르는 크게 실망할 것이다. 그 실망감이 알게 모르게 문수르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만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그 고민이 이제까지 문수르의 행동을 막았다.
‘도련님이 날 찾지 않은 것도 의문이군.’
한편 문수르의 방문을 알고 있는 롤로이 역시 문수르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만나러 오지 않은 것일까? 일부러 그랬다면 대체 왜 그랬을까? 문수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떨리는군.’
문수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야 한다면, 피하기보다는 제대로 마주보는 게 낫겠지.
처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을 쏙 빼닮았군.’
이제르트 자작과 똑같다. 아들이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특히 눈빛은 정말 이제르트 자작과 똑같았다.
‘뚝심이 있어.’
느낌이 온다. 적어도 오늘 이 만남에서 실망감을 안고 갈 것 같진 않았다.
한편 문수르를 본 롤로이 역시 그가 문수르임을 알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롤로이 이제르트입니다. 문수르 경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영지의 보배라 불리시는 문수르 경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앳된 목소리지만 다부진 말투에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롤로이 도련님을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대면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수르와 롤로이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 역시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그 둘은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사실 둘 모두가 걱정했던 것이다.
문수르가 롤로이의 자질에 대해 걱정하는 것처럼, 롤로이 역시 혹여 문수르가 자신의 기대와 다른 사람이 아니면 어떡할지,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둘이 만나보니, 서로에 대한 인상은 서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에 부합됐다. 그러니 굳이 서로를 알기 위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짧은 대화가 끝났다.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군요.”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그 둘은 별 다른 미련 없이 대화를 마쳤다. 롤로이는 곧바로 수업을 받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롤로이와 기분 좋은 만남을 끝으로 페르코 아카데미를 떠날 준비를 했을 때, 손님 한 명이 문수르를 찾아왔다.
“쥴리언 경?”
“문수르 경이 아카데미를 떠난다고 들었소.”
쿠틀러 백작가의 쥴리언, 그가 문수르를 찾아온 것이다. 그를 보자마자 문수르는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일종의 견제로군.’
지금 문수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제이머스 후작 파벌 쪽만이 아니다. 빅토리안 공작 파벌도 아주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만약 문수르와 이제르트 자작가가 마음을 바꿔 빅토리안 공작 파벌 쪽에 선다면, 가뜩이나 세가 밀리는 제이머스 후작 파벌 입장에서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을 터.
그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쥴리언이 나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친분을 조금이라도 쌓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관심을 두고 있으니 딴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다.
물론 문수르는 제이머스 후작 파벌에 속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걸 대놓고 강조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그런 속마음을 당사자들 앞에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가의 처지는 보통의 귀족가와 다르다. 필로스 왕은 여전히 이제르트 자작을 탐탁지 않아 한다. 빅토리안 공작 파벌이나 제이머스 후작 파벌이 손을 내밀어준다고 해도, 이제르트 자작이 얻게 되는 정치적 이익은 생각보다 적을 터.
그런 만큼 이익을 보다 많이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뭐든 써야 한다. 두 파벌 사이에서 적당한 저울질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예, 볼일이 끝나서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좀 더 오래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곧장 떠나니 아쉽구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쿠틀러 백작님께서도 그대를 뵙고 싶어 한다 하셨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쿠틀러 백작가도 한 번 찾아와 주시구려.”
“꼭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소견이오만…… 노믹스 경을 조심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겠지만, 나나 다른 기사들이 대체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로 움직인다면, 노믹스 경은 사적인 이유만으로도 움직이는 자이외다.”
짧은 경고였다.
“그럼 이만…….”
갑작스레 등장했던 쥴리언은 그렇게 갑작스레 떠났다. 문수르는 그런 쥴리언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태풍의 눈에 들어온 느낌이군.’
무언가 조용한데 주변이 들썩거리는 느낌이다. 롤로이를 만난 이후 뿌듯했던 감정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대신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 태풍의 눈이지.’
문수르는 비공식적이지만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로 등장했다.
대체적으로 문수르를 포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겠지만, 반대로 문수르가 자신들의 무리에 포섭되지 않을 경우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오러 마스터.
분명 강한 존재다. 비슷한 오러 마스터의 존재가 아니라면 쉽게 어찌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오러 마스터를 그보다 약한 오러 나이트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기가스!
제 아무리 문수르가 대단하다고 해도 기가스와 전투를 벌이면 승부를 쉬이 점칠 수 없다.
때문에 이 순간 문수르는 진심으로 기가스의 필요성을 느꼈다.
‘영지에 돌아가면 무리를 해서라도 기가스 제조에 들어가야겠어.’
이제부터 문수르가 정말 활약하기 위해서는 문수르의 능력을 백분 발휘해줄 기가스가 필요하다.
동력원은 준비됐다.
필요한 건 그 동력원을 버텨줄 동체(動體)다.
‘슬슬 말론을 통해서 호우투 부족과 계약을 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