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4.
아무도 모를 공방이 시작됐다.
검을 쓰는 노믹스와 창을 쓰는 문수르. 검과 창이라는 두 병기의 전투는 이색적이기 그지없었다. 케르빈 월드 내에서 창을 주무기로 쓰는 자는 극히 소수니까.
하지만 그 둘의 전투는 단순히 병기의 차이라기보다는 그냥 근본부터가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이 새끼 봐라?’
무식하게, 그 어떤 초식도 두지 않은 채 무작정……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위력적인 검을 휘두르는 노믹스. 그는 자신한다. 어설픈 실력자들은 자신의 검을 두어 번 막아내지 조차 못할 거라고.
실제로도 그랬다. 제국에 있을 당시, 노믹스는 동급의 실력자들과 싸울 때도 언제나 우세를 점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그의 검이 가진 특성이었다.
한때 노믹스는 정통파 검사였다. 말 그대로다. 보통의 기사들처럼, 검사들처럼 기본을 중시하는 검사였다.
그래서 보통의 검사들처럼 한계에 봉착했다. 어느 순간 거대한 벽이 그의 머리를 가로 막았다. 그 벽을 넘기 위해 노믹스가 택한 것은 규칙을 버리는 것이었다.
규칙을 버린 후에 짐승처럼 검을 휘둘렀다.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두를 뿐이었다.
덕분에 노믹스는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가 얻은 선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정통파가 주류(主流)를 이루는 세상에서 그의 본능적인 검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노믹스는 정통파 검술이 가지는 이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 알지만 반대로 정통파 실력자들은 노믹스의 검이 가지는 이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 몰랐다.
작은 차이로도 생사를 가르는 결투에서 이 차이는 언제나 노믹스에게 득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이었다.
‘내 검을 다 파악하고 있잖아? 이 새끼 뭐야?’
눈앞의 상대.
창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쓰는 자는 마치 노믹스의 검로를 파악하고 있는 듯, 너무나도 절묘하게 노믹스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노믹스도 모르는 검의 검로를 파악한다?
빠득!
노믹스는 인정할 수 없었다.
‘어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놈이 감히!’
한편 문수르는 노믹스의 검 앞에서 내색하지만 않을 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미치겠군!’
실시간으로 로이드의 도움을 받음에도 노믹스의 검을 받아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검을 휘두르지?’
짐승 같다.
여러 마리의 짐승이,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동시에 공격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로이드 역시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노믹스의 검 앞에서 계산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 주인님, 상대방의 검술을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알아.’
그나마 로이드가 실시간으로 파악해주는 정보가 문수르의 목숨을 구해주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문수르는 패배까진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결판이 나지 않는다.’
로이드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거의 치트키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처음으로 로이드가 제 몫을 못하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임자를 만난 셈이다.
‘좋아.’
그러나 문수르는 바보가 아니다. 언제가 로이드의 도움에도 어찌할 수 없는 적을 만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무조건 로이드에게만 기댈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문수르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크게 한 방으로 처리한다.’
몇 가지 방법을 만들어 두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문수르가 가진 창, 신창이라 불리던 페르수스의 창술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었다.
페르수스의 창술은 잔기술보다는 강력한 한 방 공격이 장기인 창술이다.
‘일단 한 방.’
계속되던 지루한 공방. 그 공방에 마침표를 찍은 건 문수르였다. 문수르의 손바닥 안에서 빠르게 창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창이 머금은 오러가 그 회전에 따라 나선 형태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스파이럴 어택이다.
‘오냐!’
노믹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딱 봐도 상대가 강력한 한 방으로 전세를 뒤집으려 한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노림수를 쓰면 된다.
‘카운터다.’
노믹스가 짐승마냥 때를 노렸다. 문수르는 그런 노믹스의 노림수를 사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답하듯, 회전하는 창을 내찔렀다.
파앙!
문수르의 창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고, 노믹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수르와의 거리를 좁혔다.
뻗어가는 창, 다가오는 노믹스!
쉬익!
노믹스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스파이럴 어택을 피했다. 하지만 스파이럴 어택이 내뿜는 나선 형태의 오러 블레이드까지 확실하게 피하지는 못했다. 노믹스의 얼굴의 살점이 뭉텅 잘려나갔다.
서걱!
동시에 노믹스의 검이 문수르의 창을 잡고 있는 오른팔의 팔뚝을 베었다. 상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노믹스의 검은 깊게 들어갔다.
문수르의 표정이 굳었다.
‘힘이 빠진다.’
힘줄이 같이 잘려나간 건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장 창을 놓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엉망이 된 노믹스의 얼굴에 미소가 그어졌다.
짧게 검을 휘두른 노믹스에게는 여력이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검을 휘두를 여력이!
‘위험하다.’
이번에 노믹스가 재차 검을 휘두른다면, 팔이 아니라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노믹스는 이미 문수르의 품속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퍽!
그 순간 문수르의 무릎이 노믹스의 복부를 강타했다.
“컥!”
노믹스의 등이 새우마냥 굽어졌다. 문수르의 무릎공격은 생각보다 기습적이었고 덕분에 위력적이었다. 때문에 노믹스가 잠시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 잠시의 틈, 문수르에게는 구사일생의 틈이기도 했다.
파밧!
문수르가 잽싸게 뒤로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창을 잡았다. 왼손잡이는 아니지만, 창을 쓰면서 양손 모두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때가지 연습했다. 오른손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쓸 수 있다.
노믹스도 검을 들었다.
뚝뚝!
그런 노믹스의 얼굴에서는 핏물이 떨어졌다. 단순한 출혈이 아니었다. 단순 출혈로 보자면 오히려 문수르보다 더 심했다.
그럼에도 노믹스의 눈빛은 빛났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오히려 출혈이 야수의 본능을 흔든 모양이다. 노믹스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출혈은 심하지만…….’
문수르는 상황을 가늠했다.
‘당장 죽을 정도는 결코 아니군.’
만약 출혈이 정말 심했다면 시간을 끌어서라도 승부를 봤겠지만, 그 정도는 아닌 듯했다.
반면 문수르는 오른팔을 일시적으로 쓰지 못하는 상황.
‘손가락이 움직이긴 하는 걸 보면 힘줄이 완전 끊긴 것 같지는 않지만…… 전투에 도움은 안 되겠지.’
출혈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지혈하지 않는다면 결국 치명상이 될 터.
‘어떻게 해야 할까?’
문수르는 고민했다.
계속 싸워야 할까?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까?
노믹스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틈을 노리고 있었다. 문수르가 틈을 보이는 순간 그걸 물어뜯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문수르는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죽일 필요는 없지.’
문수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노믹스를 대리 결투에 참가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 지금 상황이라면 상처가 상처인 만큼 쉬이 대리 결투에 참가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만두는 게 낫다.
더 이상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필요는 없겠지.
문수르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쿵쿵!
어디선가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무장한 무리들이 문수르와 노믹스가 있는 곳으로 오기 시작한 것이다.
문수르가 준비한 일종의 장치였다. 여차하면 외부의 개입으로 결투를 유야무야 만드는 것! 쥴리언과 합의를 하고, 계획을 짠 것이다.
“지금 무슨 일입니까?”
모습을 드러낸 열 명의 중무장한 기사들. 그들은 마치 우연히 지금 상황을 발견했다는 듯이 반응했다.
“엇! 노믹스 경?”
“노믹스 경이 부상을 입었다! 힐링 마법사를 불러라!”
그들은 가장 먼저 노믹스를 알아보고 그를 챙겼다. 이 역시 문수르의 노림수였다. 이런 식으로 기사들이 노믹스를 먼저 챙긴다면, 노믹스가 강짜를 부리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
물론 노믹스의 성격은 문수르의 예상 이상이었다.
“꺼져라! 결투 중이다! 내게 접근하는 자들은 전부 베어버리겠다!”
노믹스는 독이 오를 때로 오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부의 개입으로 결투가 끝나는 건 감히 용납할 수 없었다.
노믹스의 호통에 기사들이 멈칫했다. 왕의 총애를 받는 노믹스가 이렇게 나오는데, 강제로 노믹스를 어찌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더군다나 지금 살벌한 노믹스의 기세를 보면 정말 자기를 방해하는 자를 단칼에 베어버릴 법도 했다.
그때 다시 문수르가 나섰다.
“제가 진 걸로 하겠습니다. 패배를 인정하지요.”
문수르가 바닥에 창을 꽂으며 패배를 인정했다. 노믹스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도 일그러졌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그 순간 노믹스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그래, 두 달 전!
그때도 무언가 위기감을 느낀 쥴리언이 갑작스레 항복을 선언했다. 때문에 쥴리언의 명줄을 끊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기회를 잡고 온 것인데 또 다시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질 줄이야!
두 번 연속 농간을 당한 느낌이다.
“네놈!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문수르라고 합니다.”
“문수르!”
빠득빠득!
노믹스는 문수르의 이름을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평생 잊지 못하도록 그것을 뱃속에 새겨두었다.
그 살의가 대단해서 문수르의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이게 진짜 오러 마스터인가?’
문수르의 눈앞에 짧았던 전투의 과정들이 스쳐가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정말 운이 좋아서 목숨을 부지했다.
‘노믹스란 자, 내 예상보다 뛰어났다.’
노믹스의 검술이 특이한 것도 특이한 거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노믹스는 문수르 이상의 실력자였다.
만약 로이드가 없었다면, 문수르의 필패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문수르의 현실이었다. 오러 마스터이긴 하지만, 문수르는 고작 오러 마스터의 초입에 불과할 뿐이다. 진짜 오러 마스터라고 부르기엔 아직 여전히 부족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났으니 오늘은 그 사실에 만족하자.’
하지만 세상은 결과만이 남는 법.
이렇게 결투가 끝났다.
콩탄 왕국 세 번째 오러 마스터의 탄생이기도 했다.
쥴리언의 검 앞에 기사 한 명이 무릎을 꿇었다.
“패배를 인정하는가?”
차가운 쥴리언의 물음에 기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보아스 백작가와 쿠틀러 백작가의 대리 결투는 쿠틀러 백작가의 대표로 출전한 쥴리언의 승리로 끝났다.
그 광경을 보던 로이언 보아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다. 마치 지금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분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표정을 본 체커리스는 이죽거리듯 중얼거렸다.
“로이언 놈, 네놈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그 수작을 쿠틀러 백작가가 몰랐을 것 같더냐?”
보아스 백작가의 낌새 정도는 체커리스도 눈치 채고 있었다.
로이언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모습은 담담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제까지 경거망동하며, 촐랑대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저게 로이언 보아스, 그의 진짜 모습이겠지. 이제까지의 촐랑대던 모습은 연기였을 테고.
대리 결투는 그렇게 끝났다.
승자가 된 쥴리언은 체커리스의 환호를 받았다.
“쥴리언 경, 고맙습니다. 쥴리언 경은 정말 쿠틀러 백작가의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군의 명령을 행하는 건 기사의 기쁨이자, 도리일 뿐입니다.”
“하하!”
짧은 대화.
쥴리언은 그 대화가 끝나자마자 기사 한 명을 불렀다.
“상황은 어찌 됐느냐?”
“문수르란 자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문수르란 자가 패배한 것이냐?”
“허울뿐인 항복이었습니다. 노믹스 경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문수르란 자는 팔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누가 이겼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렇군.”
쥴리언의 머릿속에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적당한 때에 문수르가 물러났을 것이다. 마치 쥴리언이 노믹스 앞에서 항복을 선언했을 때처럼 말이다.
겉으로야 패배겠지만, 오히려 세상은 조만간 문수르의 이름을 뚜렷하게 기억할 것이다.
왕국의 오러 마스터 루이 노믹스에 근접한 무명의 실력자로!
‘저쪽이 약속을 지켰으니…….’
문수르는 제 몫을 했다. 쥴리언, 그와 한 약속을 지켜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쥴리언이 약속을 지킬 때다.
‘불스 백작과 이제르트 자작.’
두 귀족의 이름을 되새김한 쥴리언.
“당장 쿠틀러 백작님과 연락이 가능한 통신 마법 마법사를 구해라.”
“알겠습니다.”
쥴리언이 움직였다.
콩탄 왕국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