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3.
결투 날이 왔다.
적지 않은 이들이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일단 수준 높은 기사단의 결투는 재미있다. 언제나 공부만 하는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유흥거리다.
거기에 배경도 재미있다. 알 사람들은 안다. 이번 결투가 단순히 가문과 가문의 결투가 아니라 콩탄 왕국의 정계를 양분하는 두 파벌의 대리 싸움이 될 거란 사실을 말이다.
특히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쿠틀러 백작가 대표로 나오는 기사가 다름 아니라 쥴리언 경이라고 하는군.”
“그렇지, 쥴리언 경이 왕성에 왔었지!”
“쿠틀러 백작가가 작정을 한 모양이군.”
묘한 소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니라 쿠틀러 백작가가 자랑하는 강철 기사단의 기사단장 쥴리언 경!
그가 이번 대리 결투의 대표로 참석한다는 소문이 났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구르는 생각했다.
“쿠틀러 백작가도 바보고 아닌 이상 이제까지 보아스 백작가의 수작을 모를 리 만무합니다. 쿠틀러 백작 역시 뛰어난 무인임과 동시에 냉철한 지휘관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죠.”
“쿠틀러 백작이 오히려 보아스 백작가의 노림수를 역으로 이용했다는 의미인가?”
“그럴 가능성이 적진 않죠.”
문수르는 여기서 살짝 김이 빠졌다. 만약 정말 쿠틀러 백작이 대비를 했다면 문수르가 개입할 틈이 없어질 테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문수르는 느낄 수 있었다.
‘응?’
문수르의 감각, 오러 마스터의 감각 사이에 포착된 강력한 기세를!
‘이건?’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기세이기도 했다.
‘노믹스인가?’
루이 노믹스.
그 사납기 그지없는 오러 마스터가 페르코 아카데미에 들어온 것이다. 문수르가 감각을 넓혔다.
‘이것 봐라?’
노믹스는 정문을 통해 오지 않았다. 적당한 뒷길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나운 기세만큼은 조금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몰래 오는 주제에 기세를 감추지 않는다니? 자신감이 넘치는 인간이다.
문수르는 고민했다.
‘설마…….’
그 순간 떠오르는 한 가지 가설.
‘보아스 백작 쪽에서 노믹스를 대리 결투의 대표로 내세울 가능성은?’
노믹스가 왕성에 있는 건 이상할 게 없다. 괜히 왕의 사위 소리를 듣는 인간이겠는가?
반대로 왕의 편인 노믹스가 빅토리안 공작을 도울 가능성은?
높진 않다.
하지만 없진 않다.
‘이유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정치란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 이익만 보장된다면 어제의 적과도 동지가 될 수 있는 세계다.
‘상황을 보자.’
일단 문수르는 당장 파악이 불가능한 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썼다. 문수르가 초점을 맞춘 건 과연 노믹스가 이번 대리 결투에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바로 그것이다.
‘가만, 노믹스는 쥴리언을 죽이려고 했다.’
두 달 전 일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그때도 노믹스와 쥴리언은 한 판 붙었다. 그리고 그 전투는 노믹스가 의도한 전투였다. 노믹스의 목적은 쥴리언을 죽이는 것.
하지만 노믹스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그가 다 지은 밥에 재를 뿌린 건 다름 아니라 문수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노믹스는 쥴리언을 죽이고 싶어하고, 쥴리언이 쿠틀러 백작가의 대표로 나온다면…….’
이런저런 상황이 맞물린다.
노믹스가 대리 결투의 대표로 나올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 그럼 문수르가 나설 기회가 생긴다.
‘좋아.’
문수르가 움직였다.
쥴리언은 숨을 골랐다.
‘두 달이 흘렀군.’
두 달 전 루이 노믹스와의 결투에서 쥴리언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니었다. 정신적인 부분의 상처였다. 쥴리언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다. 그때부터 그 날의 전투를 되새김하며 자신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그때 그 살기는 무엇이었을까?’
만약 그때 그 살의가 없었다면, 노믹스의 검은 기어코 쥴리언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살기지만, 그건 구명줄이었다.
쥴리언은 확신한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다.’
그것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쥴리언, 자신을 살리기 위한 누군가의 배려였다는 것을.
더불어 그때 그 살기는 쥴리언 이상의 실력자…… 노믹스마저도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실력자란 사실을.
‘오러 마스터다.’
오러 마스터인 노믹스를 긴장하게 만드는 실력자라면 결국 오러 마스터가 될 수밖에 없다.
‘제이머스 후작께서는 영지에 계시니…….’
콩탄 왕국에는 둘 밖에 없는 오러 마스터. 하지만 개중 한 명인 제이머스 후작은 왕성에 없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는 건 세 번째 오러 마스터가 등장했다는 의미다.
‘세상엔 숨은 고수들이 많군.’
그때였다.
“여기가 쥴리언 경이 머무는 장소가 맞습니까?”
순식간이었다.
어느 조짐도 없는 상황에서 인기척이 피어올랐다. 그 신기루 같은 인기척의 등장에 쥴리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쉬익!
쥴리언의 검을 빛을 뿜으며 인기척이 느껴진 방향으로 움직였다.
카앙!
무언가가 쥴리언의 검을 쳐냈다. 쥴리언은 그 반동을 버티지 않고, 반대로 이용했다. 그 반동의 힘을 이용해 재빠르게 몸을 회전하며 재차 상대를 공격했다. 강력한 힘이 담긴 공격이었다. 어설픈 수법으로는 쉽게 쳐내지 못할 것이다.
카앙!
그러나 상대방은 이번에도 너무 쉽게 쥴리언의 공격을 튕겨냈다.
이 순간 쥴리언이 내린 결정.
‘수세를 취한다.’
그의 장기, 바로 방어를 택했다. 상대방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갑작스런 전투는 곧바로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상대방이 공격할 의사가 없고, 쥴리언이 수세를 취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야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됐군요.”
상대방은 무기 대신 혀를 휘둘렀다.
“정체가 무엇이냐?”
“문수르라 합니다. 현재 이제르트 자작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으며, 불스 백작가의 영애분을 호위하기 위해 이곳, 페르코 아카데미에 머무는 중입니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짧게 말하라.”
“보아스 백작가의 대리 결투 대표로는 루이 노믹스 경이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짧은 대화 한 번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쥴리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당황했다.
‘무슨 소리지?’
갑자기 왜 여기서 루이 노믹스가 등장한단 말인가? 그가 등장할 이유는 하등 없는데?
“두 달 전 일, 기억하십니까?”
“두 달 전?”
“모르실 것 같진 않은데…….”
“루이 노믹스, 그와 내가 싸웠던 걸 말하는 건가?”
“역시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때 우연찮게 그 결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루이 노믹스 경께서 쥴리언 경에게 적의와 살의를 품고 있었다는 것 역시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
촉이 왔다.
쥴리언은 지금 눈앞의 인물이 단순한 방청객이 아님을 직감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릴 악마인가 아니면 나를 도와줄 천사인가?’
짧은 고민.
솔직히 쥴리언은 어느 쪽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갑작스레 등장한 존재. 문수르라고? 이름도 처음 듣는다. 그런 자가 대뜸 루이 노믹스의 이름을 꺼내서 판을 뒤흔들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 대리 결투는 단순한 대리 결투,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지 않았던가?
정치적 이유가 짙게 깔린 결투다. 때문에 단순하게 생각해서도, 판단해서도 안 된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제가 묻겠습니다.”
이 순간 문수르는 오히려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쥴리언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내가 먼저 물었다.”
그 살벌함에 문수르는 겁먹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기도 했다.
파앗!
문수르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졌다. 그 기운은 쥴리언의 감각을 크게 뒤흔들었다.
‘설마!’
쥴리언을 깨달았다.
“두 달 전 나를 도운 자가 당신인가?”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쥴리언이 실력 없는 기사도 아니고, 문수르가 확실하게 정체를 드러냈는데 눈치 채지 못할 그가 아니다. 더군다나 당시 그때는 쥴리언에게 절체절명의 순간 아니었던가?
쥴리언은 살짝 긴장을 풀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당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온 셈이다. 어느 정도의 예의는 차려야 한다.
“그땐 고마웠소.”
하지만 이게 전부다. 이 이상 예의를 갖추기엔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의도도 모른다. 적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런 적에게 무작정 간과 쓸개를 빼주는 건 멍청한 짓이다.
문수르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꺼내들었다.
“딱히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래 저 역시 루이 노믹스 경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지라…….”
문수르는 쥴리언의 간지러운 속을 조금씩 긁어줬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쥴리언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대의 도움에는 감사한다. 그 은혜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갚겠다. 하지만 그뿐이다.”
쥴리언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호감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하니까. 지금 쥴리언은 매우 공적인 임무를 진행 중이다. 쿠틀러 백작가의 미래가 걸린 매우 중요한 일!
때문에 확실한 답이 필요하다.
쥴리언을 납득시킬 확실한 답이!
“노믹스 경은 쥴리언 경을 죽이려 합니다. 아마도 그 사실은 쥴리언 경께서 잘 알고 계실 터.”
“당연하다.”
“사실 노믹스 경이 쥴리언 경을 왜 죽이려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 때문에 노믹스 경이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것과…… 이렇게 다시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지요.”
문수르가 가장 먼저 쥴리언으로 하여금 납득시켜야 하는 것.
그건 바로 보아스 백작가의 대리 결투 대표로 노믹스가 나온다는 부분이다.
“노믹스 경이 페르코 아카데미에 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방금 몰래 들어왔습니다.”
“몰래 들어왔는데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문수르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쥴리언은 그 미소에 조금은 납득했다. 문수르는 오러 마스터다. 그렇다면 쥴리언이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느끼는 건 충분히 가능할 터.
“제가 노믹스 경과 싸우겠습니다.”
이윽고 문수르가 자신이 원하는 걸 말했다.
쥴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그쪽을 믿을 근거가 없다.”
노믹스가 오곤 안 오곤, 그건 둘째 치고 쥴리언 입장에서는 문수르가 아군이란 보장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백작가의 운명이 걸린 대리 결투에 대표로 문수르를 출전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융통성이 없지만, 반대로 보면 그 우직함이 쥴리언의 장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문수르도 굳이 대표로 싸우고 싶진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오러 마스터란 사실을 콩탄 왕국에 알리는 것.
두 번째는 이번 기회에 제이머스 후작가와 정치적인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
그건 굳이 쿠틀러 백작가를 대표해 대리 결투에 나가서 싸우지 않아도 얻을 수 있다.
“대리 결투의 대표로 나가려는 게 아닙니다.”
“음?”
“노믹스 경은 몰래 이곳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누가 그런 노믹스 경과 싸운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해프닝에 불과하겠지요. 또한 대리 결투에 노믹스 경이 출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누구도 의심하거나 의구심을 품진 않을 겁니다. 단 한 곳, 보아스 백작가만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문수르의 노림수.
그건 바로 대리 결투가 아닌 사석에서 루이 노믹스와 결투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루이 노믹스는 대리 결투에 참가가 불가능해진다. 동시에 문수르는 오러 마스터란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이익을 보게 된 쿠틀러 백작가, 더 나아가 제이머스 후작과는 정치적 연결고리를 만들 수도 있다.
쥴리언도 납득했다.
“원하는 건?”
“제이머스 후작 각하와의 정치적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자리를 마련해주겠다.”
“이제르트 자작님을 주군으로 섬기고 있으며, 불스 백작님의 의중에 따라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이제르트 자작과 불스 백작, 두 분의 이름은 기억해두겠다.”
“감사합니다.”
루이 노믹스는 검을 들었다.
“그때 그놈이군.”
루이 노믹스는 창을 들고 등장한 의문의 사내를 보자마자 상대가 두 달 전 자신의 행사를 방해한 인물임을 금방 파악했다.
문수르는 살짝 놀랐다.
‘짐승 같은 감이군.’
어느 정도 힘을 쓰면 루이 노믹스 정도 되는 실력자가 금방 자신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리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보자마자 파악할 정도로 감이 좋을 줄은 몰랐다.
‘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야 좋지.’
문수르는 창을 들었다.
노믹스는 그런 문수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캉캉!
단숨에 두 번의 공방이 이루어졌다. 노믹스는 검으로 문수르의 창을 잘라낼 기세였다.
하지만 쉽게 잘릴 문수르의 창이 아니다. 오히려 문수르는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취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문수르의 역할은 대리 결투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노믹스를 이 자리에 잡아두는 것이다.
노믹스 역시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을 터. 여차하면 노믹스가 몸을 뺄 수도 있다. 노믹스가 도망친다면 문수르가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건 치욕이지만 반대로 그런 적을 공격하는 것 역시 치욕이니까.
그렇다면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상대가 도망칠 시간, 틈을 티끌 만큼도 주면 안 된다.
‘나 혼자서는 힘들지.’
그러나 그 상대가 바로 콩탄 왕국의 둘밖에 없는 오러 마스터 중 한 명, 루이 노믹스다.
실력면에서는 문수르와 거의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로이드.’
결국 문수르는 꺼내들었다.
- 예, 주인님.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지?’
- 공격 루트 이미 계산 끝났습니다.
로이드의 존재, 그것이 바로 문수르가 믿는 최고의 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