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92화 (91/293)

92화

4.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해톤은 멀쩡한 듯 보였지만,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아, 그게…….”

바짝 긴장했을 때는 몰랐는데 긴장감이 살짝 풀리니까 막혔던 떨림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문수르는 그런 해톤의 모습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해톤에게 말 그대로 최악의 날이 되겠지만, 문수르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이번에 해톤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동안 해톤에 대한 조사만 했지, 이러다할 접촉은 없었다. 가끔 스쳐가듯 얼굴만 본 게 전부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누구보다 친해질 기회가 말이다.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문수르가 아니다.

“입 안에 넣고 가볍게 굴려보십시오.”

“예?”

“뭐, 약 비슷한 겁니다.”

문수르는 떨고 있는 해톤에게 무언가를 건네줬다. 건네준 건 다름 아니라 사탕이었다. 원래는 문수르가 심심할 때 먹으려고 가져온 사탕이었다.

‘긴장할 때는 단 게 땡기는 법이지.’

몸이든 정신이든 힘들 때는 당장 달달한 게 끌리기 마련이다.

해톤은 약이란 말에 일단 문수르가 준 것을 입에 넣었다.

“천천히 입 안에서 굴리시면 됩니다. 녹인다는 느낌으로, 삼키거나 깨물진 마시고요.”

그리고는 문수르의 말대로 사탕을 입에서 굴리기 시작했다. 순간 해톤의 눈이 화등잔 마냥 커졌다. 해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강한 단맛은 처음이었다.

‘뭐지 이게?’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올 정도. 심지어 너무 놀란 나머지 떨림조차 잊어버렸다.

“마, 맛있군요.”

“입맛에 맞아서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좀 진정이 되십니까?”

“아.”

그제야 해톤은 자신의 떨림이 멈췄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떨림이 멈추고, 안정을 조금씩 되찾아 해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뛰어난 머리를 가진 해톤이 상황을 빠르게 추리했고, 분석했다.

“아마도 절 노린 건…… 라울 백작가의 나르사빈일 겁니다.”

곧바로 상황의 추리를 끝낸 해톤의 모습에 문수르가 속으로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오호, 곧바로 결론을 내린다?’

생각이 빠르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빨리 생각하고 빨리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장단점이 있는 능력이겠지만 문수르에게는 해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됐다. 해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문수르 앞에서 털어놓았고, 문수르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들어줬다.

사실 해톤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이번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페르코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로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귀족들에게는 이미 찍혔고, 그런 해톤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평민 출신의 학생은 없었으니까. 문수르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역시 문수르가 구해준 덕분이겠지.

문수르 입장에서 오늘 해톤의 봉변은 호재였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치 봇물 터지듯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후에 해톤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무슨 짓을…….’

문수르에게서 도움을 받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푸념을 줄줄이 늘어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다.

더군다나 상대는 귀족을 모시는 기사다. 혹여 자신이 내뱉은 푸념이 귀족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솔직히 좋은 꼴을 볼 것 같진 않다.

“감사했습니다.”

해톤이 말을 마쳤다.

‘이런, 이렇게 끝나면 내가 섭섭하지.’

그런 해톤의 심중을 읽은 문수르가 화두를 돌렸다.

“그보다 꽤나 공부를 잘하더군요. 보통 귀족가 출신의 학생들은 교수와 긴밀한 관계로 여러 메리트를 받는다는데 그럼에도 1등을 한다는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담력이 대단합니다.”

“별로 그렇진 않습니다.”

“솔직히 귀족들에게 얻어맞으면서까지 성적을 내는 그 굳은 심지는 충분히 평가 받을 만하지요.”

“그건……?”

해톤은 살짝 당황했다. 귀족을 모시는 기사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문수르는 살짝 웃었다.

“제가 모시는 주군은 이제르트 자작입니다. 콩탄 왕국의 역사를 조금만 안다면…… 제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게 될 겁니다.”

“이제르트 자작가…….”

해톤은 그 이름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것보다 암살자가 해톤, 당신을 노리는 이상 아마도 며칠 동안은 몸조심을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문수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밤이 끝나간다. 페르코 아카데미의 아침은 일찍 찾아온다. 많은 일꾼들이 귀족들의 아침을 새벽부터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저를 찾아오십시오.”

문수르가 적당한 떡밥을 던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해톤은 그런 문수르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문수르 경…….”

아직 새벽이 찾아오기 전, 칠흑 같은 밤 아래로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의뢰는?”

“실패다.”

“실패?”

놀라는 목소리가 밤공기를 파르르, 떨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다. 의뢰는 실패했다.”

순식간이었다. 무덤덤하던 그들 대화 사이로 섬뜩한 살기가 치솟기 시작한 건 말이다.

그러나 살기는 금방 잦아들었다. 이곳은 적지 않은 기사들이 귀족가의 자제들을 호위하기 위해 머무는 곳. 용담호혈과 같은 땅에서 어설프게 살기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실패 이유는?”

“의뢰 이유부터 묻고 싶군.”

“무슨 소리지?”

“평민 출신의 학생 손목을 베어서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하고, 라울 백작가와 연결된 흔적을 남게 하는 것, 그게 내가 받은 의뢰다.”

“그래서?”

“적어도 이 의뢰 과정에 방해자는 없다고 들었는데?”

“당연하지, 평민 놈이 기사를 고용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어째서 오러 마스터가 내 앞을 막은 거지?”

“그게 무슨 헛소리냐? 오러 마스터라니! 제이머스 후작이나 루이 노믹스라도 등장했다는 건가?”

“누구든 등장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오러 마스터가 동네 떠돌이 개도 아니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등장할 리가 없잖아!”

“갑작스럽게 등장한 게 아닌 모양이지.”

“그건…….”

잠시 대화가 멈추었다. 침묵이 깔렸다.

“의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의뢰인의 정보에 하자가 있었다. 받은 돈은 반환한다. 그걸로 이번 의뢰를 종료하겠다.”

그 침묵 사이로 제 할 말만 내뱉은 이가 어둠 속에 사라졌다.

이윽고 새벽이 찾아왔을 때…….

“설마 제이머스 후작 쪽에서 눈치를 채고 먼저 나선 것일까? 라울 백작가를 구하려고?”

음모가 꽃을 피웠다.

문수르는 잠을 자지 못했다. 해톤과 헤어진 이후에도 문수르의 감각은 해톤을 향해 있었다.

‘그 정도 암살자가 그냥 왔을 리는 없다.’

해톤을 경호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고작 평민 출신을 노리고 고용했다고 보기에는 암살자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다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해톤을 해치우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다면 굳이 해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을 필요도 없었을 터.’

암살자에게는 다른 노림수가 있었다.

해톤의 죽음을 이용한 다른 노림수가 말이다.

‘그게 뭘까?’

왕립 페르코 아카데미, 콩탄 왕국의 권력과 긴밀하게 연결된 장소에서 수작을 부린다는 건 필시 정치적인 노림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얼굴을 감출 걸 그랬나?’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려 든 것 같다.

“흠.”

문수르는 살짝 고민했으나, 그뿐이었다. 문수르의 고민은 깊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정치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으면 애초에 여기에 오지도 않았겠지.’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을 뿐더러, 이제부터 문수르 역시 정치, 정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불스 백작이 시키지 않았어도 이제르트 자작가를 위해서 했었어야 하는 일이다.

‘로이드.’

- 예, 주인님.

‘GPS파일럿 중 몇 개 더 왕성 쪽으로 가져와. 아무래도 왕도에서 일이 하나 터질 것 같으니까.’

- 알겠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대비를 하면 된다.

해가 중천에 떴다. 문수르는 살짝 피곤함을 느꼈다. 하룻밤 정도 뜬 눈으로 보냈다고 지칠 문수르가 아니지만, 문수르는 그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몸이야 왕도에 있지만 문수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보며, 여러 가지 것들을 해야 했다.

‘드워프가 있으니까 정말 막혀있던 곳이 뚫리긴 하군.’

그래도 나름 보람 찬 일이었다. 말론이 영지에 가세한 이후로 그동안 기술적인 부분에서 막혔던 일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막 봇물이 터지듯 터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물꼬가 트인다고 해야 할까? 덕분에 이제르트 자작령은 변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사람들을 더 데려다가 수로도 만들고, 새로운 양식의 건축물도 시도해봐야지. 처음에는 어색해도 친숙해지다보면 점차 그게 당연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질 테고…… 조만간 염두에 두었던 푸흐르 교단과도 접촉을 해야겠어. 의사 양성 쪽은 푸흐르 교단을 통해서 진행하면 될 테고…… 사실 마법사도 영입해야 하는데, 왜 페르코 아카데미에는 마법사 양성 코스가 없는 거지? 여기서 쓸만한 마법사들은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한 회장님 마법 실력의 반의 반만 되도, 정말 영지 입장에서는 보배나 다름없는데 말이야.’

생각만으로도 벌써 숨이 찬다.

그때였다.

‘응?’

누군가 문수르에게 접근했다. 문수르는 멀티 글라스를 벗었다.

‘마구르?’

그러자 상대방의 얼굴이 보였다.

“당신이 문수르 경입니까?”

상대는 다름 아니라 문수르의 영입 리스트 2순위에 해당하는 숨겨진 인재, 마구르였다.

“맞습니다만.”

“마구르라고 합니다.”

갑작스레 문수르에게 인사를 하는 마구르. 그는 자신의 소개를 덧붙였다.

“그리고 해톤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아, 해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일단 친구를 구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보통은 사례를 해야겠지만…….”

“괜찮습니다. 사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모시는 이제르트 자작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이제르트 자작을 한 번 띄어주는 문수르. 이런 자잘한 게 모여서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법이다.

“이제르트 자작님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군요.”

“아닙니다. 충분히 좋은 이야기지요. 자신이 섬기는 자를 위해 충성을 바친 이야기야말로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될 테니까요.”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됐을 때 문수르는 직감했다.

‘날 시험하고 있군.’

마구르는 지금 문수르를 간보고 있었다. 물론 문수르를 얕잡아 보고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었다.

마구르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속마음을 과연 문수르에게 말해줘도 좋을지, 아닐지 그 사실에 대한 확신 말이다.

문수르는 환호했다.

‘내가 그 정도까지 신뢰 받는 사람이 됐다, 이건가?’

마구르에 대한 뒷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건 그는 마치 세상과 담을 쌓은 듯,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히 꺼린다는 것이었다. 가끔 해톤이 마구르에게 말을 걸어주는 걸 제외하면, 사적인 일로 마구르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마구르는 아예 다른 누군가에게 접근하는 법이 없었고.

처음에는 성격이 독특한 건가, 그리 생각했지만 마구르의 과거를 조사하면서 그게 아님을 파악했다.

마구르는 자라가 목을 감추듯,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하나다.

대체 왜 마구르는 무엇으로부터 몸을 감추려는 걸까?

‘귀족들이겠지.’

답은 금방 나온다. 평민이 자기 머리 위에 서는 꼴을 보기 싫어하는 귀족가 출신의 학생들, 마구르가 두려워하는 건 그들이었다.

그럼 확신을 심어주면 된다.

“귀감이라고는 하나, 이미 콩탄 왕국의 정계에서는 버림받았지요. 하하, 뭐 그게 나름 편한 점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 귀족들과는 다르다는 확신!

그런 문수르의 노림수가 적당히 통한 것일까? 마구르는 문수르 근처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불스 백작가의 영애 분을 호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호위라…… 백작가가 영애의 호위를 부탁할 정도면 실력이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적당히 몸을 지킬 정도는 됩니다.”

“그렇군요.”

“그보다 마구르 군…… 군이란 표현 괜찮습니까?”

“예, 마음대로 부르시지요. 말을 낮추셔도 괜찮습니다.”

“아, 그건 그냥 제가 편해서 그러는 겁니다. 마구르 군은 올해로 6학년인 겁니까?”

“뭐, 그렇지요.”

“하하, 그럼 졸업만 남았군요. 졸업한 뒤에는 따로 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성적이 나빠서 과연 절 고용할 자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작은 상단에 가서 잡무라도 하게 되겠지요.”

“그렇습니까? 만약 기회가 되면 제가 모시는 이제르트 자작님께 소개장이라도 써드리겠습니다. 뭐, 그 누구도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일하고 싶어 하진 않지만, 이제르트 자작님은 인재를 볼 줄 알고, 아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가 사람이 없긴 합니다. 아마 성적이 나빠도 얼마든지 고용해주실 겁니다. 기뻐하면서 말이지요.”

“그거 정말 구미가 당기는 일이군요. 저 같이 성적이 나빠도 고용해준다니 말입니다.”

적당한 대화가 오고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구르는 자신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다. 아직 문수르에 대해서 완벽하게 신뢰를 하지 않은 탓이다. 때문에 그저 가벼운 이야기, 겉만 핥는 식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러나 문수르는 거기에 충분히 만족했다.

‘그래, 이런 식으로 조금씩 해내가면 되는 거야.’

상황은 문수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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