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91화 (90/293)

91화

3.

문수르를 깨운 건 살기였다.

‘뭐야?’

그건 아주 미약한 살기였다. 평소였다면 오러 마스터인 문수르조차 결코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작고, 미약한 살기였다. 아니, 만약 지금이 낮이었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정말 있으나 마나한 수준의 살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늦은 밤이었다. 인기척조차 확실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살기가 피어올랐으니 문수르의 감이 바짝 설 수밖에.

더군다나 이곳이 어디인가?

‘어떤 미친놈이 왕성에서 살기를 피워대는 거지?’

왕성 내에 위치한 왕립 페르코 아카데미다. 귀족가의 자제들, 귀족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에 왕가 역시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땅이다. 그런 곳에서 살기를 피워댄다는 건, 그 즉시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다는 의미다.

밤중이라면 더더욱!

문수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살이라…….’

한 달 동안 페르코 아카데미에 머물면서 지켜본 건, 겉으로야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곳도 속으로는 많이 곪아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평민 출신의 학생들을 향한 귀족 출신 학생들의 핍박은 보는 문수르의 눈이 절로 찡그러질 정도였다.

묵인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아카데미가 허락한 듯 곳곳에서 폭행이 일어났다. 왕따 같은 건 문제도 아니었다. 노골적인 비난, 일방적인 욕설이 넘쳐났다.

이 와중에 죽는 사람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말이다.

그런데 오늘 기어코 시체가 나올 모양이다.

‘일단 움직여볼까?’

느낌이 좋지 못하다. 문수르는 슬그머니 살기의 흔적을 뒤쫓았다.

아마도 살기의 흔적을 느낀 건 문수르 뿐이었나 보다. 문수르가 머무르는 층에서 같이 머무는 다른 기사들 중 반응을 보인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이후 문수르는 그 살기를 추적하면서 느꼈다.

‘보통이 아니다.’

처음에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붙었는데 상대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다. 문수르가 감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제대로 뒤를 쫓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실력자.

‘상대가 작심하고 도망치는 거였으면, 절대 잡지 못할 정도로군.’

오러 마스터인 문수르가 놓칠 정도라면, 그 능력이 보통 수준은 아닐터.

‘제대로 훈련 받은 암살자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상대가 암행(暗行)에 특화된 오러 마스터가 아니라면, 매우 뛰어난 은신 능력을 가진 암살자일 것이다.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 암행에 특화된 오러 마스터 따위는 없으니까.

‘사건이 커질 지도 모른다.’

이 정도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건, 고용한 자가 제대로 피를 볼 작심을 했다는 의미다. 어쩌면 암살 표적이 매우 영향력이 큰 귀족가의 자제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사안의 중대함은 더 심각해진다.

‘최근 제르둔 후작이 반역죄로 처형당했지.’

콩탄 왕국의 정세는 이미 크게 요동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지금 그런 왕국의 정세를 더 크게 흔들려도 어느 누군가 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문수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주제다.

‘밤중에는 로이드의 능력이 떨어지는데…….’

문수르는 살짝 긴장했다.

상대는 엄청난 실력의 암살자. 단순히 실력으로 붙는다면 문수르가 압승을 거두겠지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다면 결과는 모른다.

물론 문수르에게는 로이드가 있다. 하지만 밤에는 GPS시스템의 효용성이 떨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왕성을 감시하는 GPS파일럿이 몇 대 없다. GPS파일럿이 없으면 GPS시스템의 효용성은 무의해진다. 결국 지금 당장 문수르가 기대야 하는 건 본인의 능력뿐이다.

‘해보자.’

문수르가 감각을 다시금 곤두세웠다.

귀족가 출신의 학생들은 혼자서 방 하나를 쓰지만 평민 출신의 학생들이 그런 호사를 누리는 경우는 돈 많은 상인 자식이 아닌 이상 없다. 평민 학생들 대부분인 4인 혹은 6인이 한 방에서 같이 합숙을 한다. 합숙한다고 해서 방이 훨씬 크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몸을 누울 수 있을 정도, 정말로 좁은 공간이다.

때문에 해톤은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순식간이었다.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무언가가 해톤을 덮쳤다. 이 좁은 공간에서 그림자는 그 어떤 소음도, 잡음도 내지 않은 채 순식간에 해톤을 방 밖으로 끄집어냈다.

‘마법인가?’

그 놀라운 광경은 해톤 입장에서는 마법, 그 단어 외의 다른 무언가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어느새 해톤의 머리 위에는 낮은 천장이 아닌 드높은 밤하늘이 떠있었다.

달빛은 없었다. 빛 한 점 없는 사이로 흘러나오는 적막감이 해톤의 온몸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아, 아!’

그제야 해톤은 깨달았다.

‘말이 나오지 않아.’

온몸이 마비가 됐다. 말이 나오지 않았고, 손가락 끝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스멀스멀 공포라는 놈이 해톤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꿀꺽!’

머릿속으로는 침 삼키는 소리만 중얼거렸다.

죽음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번쩍였다.

그때였다.

쿵!

해톤을 짐짝마냥 짊어지고 있던 자가 해톤을 바닥에 내던졌다.

“헉!”

그 갑작스런 충격에 마비되었던 해톤의 몸에 활력이 깃들었고, 막혀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해톤이 기겁했고.

카앙!

그 사이로 거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화는 없었다.

카앙, 카앙!

연신 날카로운 쇳조각들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 사이로 불똥이 튀어 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살짝살짝 터져 나오는 불똥만이 유일한 전장의 빛이 되었다.

그 불똥이 토해내는 미세한 불빛 사이로 무기를 든 두 존재가 해톤의 눈에 들어왔다.

‘저 자는?’

일단 복면을 쓴 자의 정체는 모르겠다. 복면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붉은 눈동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다.

반면 그 복면을 쓴 자와 대립하고 자는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몇 번 스쳐지나갔다. 창을 들고 다녀서 더 기억이 남았다. 기사들 중에 창을 쓸 줄 아는 자는 있어도 창을 주무기로 쓰는 자는 매우 드물었으니까.

‘이름이…….’

이름은 문수르라고 했다. 대단한 이름은 아니지만, 해톤은 한 번 들은 이름이나 얼굴 정도는 기억할 정도의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하지만 그뿐이다. 문수르와는 그저 얼굴만 몇 번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게 전부였다. 서로 대화를 나눈 적조차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해톤을 구해준 것이다.

한편 문수르는 살짝 당황했다.

‘표적이 해톤?’

문수르가 해톤을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의 영입 리스트의 가장 상단에 위치한 학생 아닌가?

그런데 그런 해톤이 암살자의 공격을 받았다.

‘이 암살자, 실력이 보통은 아니야. 최소한 오러 나이트 정도는 순식간에 해치울 정도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

그런 해톤을 노린 암살자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기척을 감추는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서 긴장했지만, 은신 능력 외에도 무력(武力) 역시 결코 얕잡아 볼 수준이 아니었다.

문수르가 암살자의 세계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눈앞의 암살자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왜?’

그래서 이해가 안 갔다.

‘왜 이런 대단한 암살자를 고용하면서까지 해톤을 처치하려고 한 거지? 해톤이 그 정도 가치가 있었나?’

암살자에게 비싼 몸값을 지불하는 건, 그 암살자로 하여금 해치울 대상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콩탄 왕국 내에서 해탄의 가치를 가장 높게 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문수르일 것이다. 그런 문수르는 확신한다. 만약 해톤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한다면, 적어도 눈앞의 인물 정도 되는 암살자를 고용하지는 않을 거라고.

물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왕 고용할 거 돈 좀 더 써서 좋은 실력자를 고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건 역시 이상하지.’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문수르.

팟!

그 순간 암살자가 움직였다. 마치 문수르의 생각을, 그 생각 사이의 틈을 읽은 듯 문수르가 작은 틈을 보이자마자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문수르가 기겁하며 반응했지만 늦었다. 상대는 문수르 역시 놀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암살자였다. 암살자에게서 시선을 잠깐 떼는 순간 끝이다. 암살자는 곧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둘 중 하나.’

여기서 암살자가 택할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도망치는 것.

‘그 정도 되는 실력의 암살자라면 방금 전 몇 번의 공방으로 최소한 내 기량이 어느 수준인지는 파악했을 터.’

정면승부로 문수르를 이길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걸 파악했으니, 도망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의뢰가 매우 중요하다면, 여기서 한 번 더……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해톤을 공격할 터.’

반대로 이번 의뢰가 정말 중요하다면, 암살자가 목숨을 버릴 각오로 해톤에 대한 암살을 재차 시도할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거나 둘 중 하나다.

가느냐, 오느냐.

스윽!

문수르는 해톤을 호위하듯,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감각을 좁혔다.

‘멀리 있는 놈을 쫓진 않는다.’

괜히 감각을 넓혀서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창이 닿는 확실한 범위, 그 정도까지만 감각을 확대했다. 감각의 범위는 줄어들었지만, 줄어든 만큼 민감해졌다. 이 감각 안에 들어오는 순간 문수르의 창이 단숨에 상대를 꼬치로 만들 것이다.

보통 상대라면 문수르가 먼저 파악하고 쫓아서, 공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대는 제대로 모습을 감추고자 하면 문수르도 잡을 수 없는 상황.

어설프게 기척을 쫓았다가는 역으로 해톤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때문에 문수르는 승부를 건 것이다. 공세 대신 수세를 취하기로 말이다.

‘올 테면 와라.’

그렇게 시작된 보이지 않는 싸움.

해톤 역시 충분히 눈치가 있는지라 이 상황에서 어설픈 행동은 하지 않았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해톤이 상황 파악을 못한 채 움직였다면 그건 문수르에게 독이 됐을 테니까.

그런 대치 상황은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문수르는 쉽사리 긴장의 끈을 풀지 못했다. 충분히 각오했다. 이 상황으로 해가 뜰 때까지 버틸 생각도 하고 있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다. 하루 정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그때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한 시간 동안이나 분위기를 살피던 해톤이 조심스럽게 문수르에게 말을 걸었다.

문수르는 살짝 혀를 찼다.

‘위험한데…….’

아직 암살자가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어설프게 해톤을 상대하다가 틈을 내보이면, 암살자는 그 틈을 확실하게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아직 암살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암살자? 암살자가 저를 노립니까?”

“그런 것 같군요.”

“그럴 리가…… 대체 저를 노릴 사람이 누가……?”

사실 문수르도 궁금하다. 해톤을 노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물론 해톤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다.

“평소에 귀족가 출신의 학생들의 분노를 샀으니, 그들 중 한 명일 수도 있지요.”

문수르는 그저 툭 던졌다. 적당히 대화를 끝내려고.

그러나 해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이번 월간 시험에서 내가 1등을 해서? 그래서 나를 노리는 건가?”

해톤의 혼잣말에 문수르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해톤의 말대로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해톤에게 시험에서 밀린 어느 귀족가 출신의 학생이 해톤을 노렸을 가능성.

‘하지만 제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다른 곳도 아닌 왕성 내에서 암살자를 고용해 평민을 살해한다는 건…… 아, 그렇군.’

그 순간 답이 나왔다.

‘그래서 그 정도 실력이 있는 암살자를 고용한 거로군.’

어째서 뛰어난 실력의 암살자가 해톤을 노렸는지.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뛰어난 실력의 암살자를 고용한 건 말 그대로 살인, 그 자체의 난이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다.

‘암살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해톤의 암살이 아니라,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암살자가 재차 해톤을 노릴 경우, 다시 나와 교전을 치를 테고 그러다간 결정적인 증거를 남길 지도 모르지.’

암살자를 물러났을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문수르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문수르가 살짝 긴장을 풀었다.

“일단 서로 소개부터 합시다. 불스 백작가의 프리실라 아가씨를 모시는 호위기사 문수르라고 합니다. 이제르트 자작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저는…… 해톤이라고 합니다. 그보다 제게 그렇게 말을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기사님. 저는 평민 출신인데…….”

“아, 이건 그냥 제 말투가 그런 거니 개의치 마십시오.”

문수르는 대화를 하면서도 낌새를 엿봤다. 암살자의 움직임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일단 사람들이 많은 기숙자로 돌아가는 게 더 좋겠군.’

물론 아직 위기가 전부 사라진 건 아닌 만큼 계속해서 신경 써야할 것이다. 더불어 사람이 많은 기숙사로 간다면 암살자 역시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을 터.

“그보다 일단 밤도 늦었으니, 기숙사로 돌아가지요.”

문수르가 당황한 해톤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암살자가 그 자리에 등장한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문수르와 해톤이 있던 자리에 등장한 암살자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불스 백작가에 오러 마스터가 있다니…… 아무래도 의뢰인이 날 속인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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