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90화 (89/293)

90화

<23화. 해톤과 마구르.>

1.

페르코 아카데미의 입학식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귀족들의 자제들이 다수 입학하는 만큼 왕국에서도 확실히 신경을 쓴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문수르는 그 화려함 속에 존재하는 어두움을 볼 수 있었다.

‘차별이 심하군.’

입학식 과정에서 귀족과 평민 출신의 학생에 대한 차별에 눈에 띌 정도로 심했다. 입장 순서도 그랬고, 앉은 자리도 그랬다. 단순히 귀족들을 위한 배려가 넘친다, 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평민들을 들러리로 이용해 귀족 출신 학생들을 포장하는 모양새였다. 쉽게 말해서 귀족 자제들의 허영심을 위해 평민 학생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니면 콩탄 왕국 전역에 이런 풍조가 만연한 것인가?’

사실 문수르는 운이 좋았다. 이제르트 자작만 하더라도 귀족의 의무, 임무에 충실한 자였으며 평민이라고 하여서 하찮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굽어 살피기 위해 노력하는 자였다.

불스 백작은 어떠한가? 그 역시 훌륭한 귀족이다. 물론 평민들을 살갑게 대하는 건 아니지만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했으며, 귀족의 역할에 너무나도 충실한 자였다.

두 귀족은 충분히 귀족이란 타이틀이 어울리는 자였다. 그들은 귀족이 누리는 권리에 걸맞은 의무를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콩탄 왕국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둘과 같은 귀족들은 매우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니, 콩탄 왕국뿐만이 아니라 케르빈 월드 전체를 뒤져도 불스 백작이나 이제르트 자작과 같은 귀족들은 많지 못하다.

콩탄 왕국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필로스 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로 가장 위험하던 적인 제국과의 너무나도 우호적인 관계 탓에 콩탄 왕국 내에 위기의식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평민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쌓이고, 반복되기를 연속하다 보니 이제 귀족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평민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수준까지 온 것이다.

‘망조로군.’

나라가 망할 기운이 물씬 풍긴다.

결국 나라를 유지하는 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이 나면, 싸우는 건 사람이다. 전쟁에서 결국 순수한 무력은 귀족이나, 평민이나 다를 게 없다. 단지 지위의 차이만 있을 뿐.

‘고맙게 여기겠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대해 평민 출신의 학생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귀족들에게 들킬까봐 겉으로 내색만 하지 않을 뿐, 문수르의 눈에는 보였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어린 학생들의 분노가, 응어리가 말이다그걸 건드리면, 그들을 포용하기란 어렵지 않을 터.

‘그 외의 특이점은 없나?’

입학식의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딱히 누군가 대단한 인물이 새로이 입학한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페르코 아카데미 내에는 현재 콩탄 왕국의 왕자와 왕녀가 다니고 있긴 하지만,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화려한 입학식은 화려하게 끝났다.

2.

페르코 아카데미에서의 나날들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바쁜 학생들은 이런저런 수업을 받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프리실라는 그렇지 않았다. 페르코 아카데미의 수업은 아주 소수의 필수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들은 학생이 임의로 수학을 결정할 수 있었는데 프리실라는 필수과목 외에 두 가지 과목만을 더 추가한 상황이었다.

하루에 네 시간, 길어봐야 여섯 시간. 문수르는 그 시간 동안 프리실라를 경호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 시간이었다. 페르코 아카데미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그마저도 없었다. 프리실라는 문수르에게 대놓고 말했다.

“더 이상 제 호위를 하실 필요가 없어요. 필요할 때가 되면 그때 부르겠어요.”

문수르를 무시하는 행동이었지만, 문수르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때부터 문수르는 작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행정학을 배우는 녀석들을 눈 여겨 보는 게 좋겠군.”

당장 이제르트 자작령에 급한 건 관리들이다. 조만간 이제르트 자작령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면, 많은 수의 관리가 필요할 것이다.

“회계 쪽에도 재능이 있는 녀석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러나 이미 이제르트 자작가는 관리를 잘못 두었다가 크게 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능력보단 인성이지.”

그런 만큼 인성 역시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실 문수르가 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능력이란 건 검증하는 게 어렵지 않다. 이런저런 테스트만 간단히 해도 이 녀석이 쓸만한 놈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인성이란 그런 게 아니다. 오래 두고 지켜봐야지 알 수 있는 게 바로 인성이란 놈이다. 그래서 문수르는 리스트를 만들고, 그들을 관찰하기로 한 것이다.

몇 명 이미 점찍어둔 이는 있었다.

‘해톤 그리고 마구르.’

페르코 아카데미 6학년이 된 해톤, 졸업을 1년 남긴 그는 평민 출신이지만 천재로 자자한 인물이었다. 매월 진행되는 시험에서 언제나 10등 내의 성적을 유지했다.

마구르 역시 올해 6학년이 된 학생이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간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언제나 시험을 봤다 하면 하위권을 맴돌 뿐더러,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아 낙제점을 받은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런 이 둘의 공통점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구르야 성적이 워낙 개판이나 그렇다 쳐도, 누가 봐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해톤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 성적이 문제가 됐다. 그보다 시험 등수가 낮은 귀족가의 자제들이 해톤을 괴롭히는 것이다. 괴롭힌 다음 해톤의 성적이 내려갔다면 모르겠지만, 해톤은 그 이후에도 꿋꿋하게 고득점을 받았다. 당연히 귀족가의 자제들 입장에서는 그런 해톤의 모습이 반항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사실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평민 출신의 학생들의 목표는 귀족가에 고용되는 일이다. 그게 아니면 마땅히 그들이 배운 것을 써먹을 장소가 없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왕국은 자기 돈을 쓰면서까지 평민 학생을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것이다. 콩탄 왕국이 무슨 대단한 성인군자라서 평민들을 공짜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그들이 평민들을 데려다가 교육시키는 건 더 유용하게 이용해먹기 위해서다.

어쨌거나 문수르는 그 둘을 눈 여겨 봤다.

‘해톤의 능력이야 이루 말할 것도 없지.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

해톤의 경우에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그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귀족가의 핍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제 의지를 관철하는 힘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령 같이 급변한 땅의 중심에서 균형을 잡아주기에는 제격인 인재다.

‘해톤이 시대에 맞서 싸우는 천재라면, 마구르는 시대에 조소를 날리는 천재지.’

마구르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해톤을 조사하기 위해 그를 추적하던 중에 해톤과 마구르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었다.

“마구르, 그런 식으로 도망쳐봤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웃기시네, 너처럼 무식하게 싸우다 패배자가 될 바에는 차라리 싸우지 않는 게 낫지.”

“싸우지도 않는 순간부터 패배자가 되는 거야.”

“그래, 넌 매달 시험만 끝나면 귀족가 자제분들에게 얻어맞는 패배자고, 난 잘 먹고 잘 싸는 패배자지.”

그 대화를 들은 문수르는 곧바로 마구르에 대한 조사를 했다. 조사를 해보니, 3학년 때가지만 하더라도 마구르는 모든 시험에서 단 한 번도 1등을 내준 적이 없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해톤은 마구르의 이름에 가려져서 천재 소리는 듣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4학년 때부터 성적이 급락했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 바로 귀족가 자제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평민이 위에 서는 꼴을 그들이 두고 볼 리 만무하다. 평민이란 자신들이 이용해먹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였으니까.

여기서 해톤은 그들과 맞서 싸우기로 했고, 마구르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해톤의 굳은 심지도 나쁘진 않지만, 마구르와 같은 행동도 나쁜 건 아니지.’

누군가는 마구르를 해톤의 생각대로 패배자라 여기겠지만, 세상사라는 게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지 않은가?

타협이 필요하고, 절충도 필요하다. 마구르와 같은 사고방식도 나쁠 건 없다.

오히려 문수르는 이 다른 타입의 두 인재가 탐났다.

‘기회만 주면 둘 다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타입이다.’

결과적으로 그 둘의 이름은 문수르의 리스트의 가장 상단에 위치하게 되었다.

더불어 1년 후면 졸업 아닌가? 가뜩이나 귀족들에게 찍혀서 취업할 장소도 마땅히 않은 그 둘만큼 시기상으로도 고용하기 적절한 인재는 많이 않을 터.

‘하지만 둘만으로는 부족하지.’

인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어차피 문수르가 이곳에 머무는 기간은 빅토리안 공작의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다. 시간은 충분했다.

월간 시험이 끝났다.

모든 이들이 시험 순위에 민감했지만, 개중에서 아카데미 마지막 해를 보내는 6학년들의 경우는 시험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마지막 성적인 것이다. 여기서 뒤쳐지면, 그 사실이 평생 꼬리표마냥 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번 시험에서 해톤이 1등을 차지했다.

쾅!

라울 백작의 자제, 나르사빈은 그 사실을 도무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게 말이 돼? 내가 그런 평민 자식보다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이후 페르코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나름 콩탄 왕국 전역에서 머리 좀 좋다는 이들 사이에서 나르사빈은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평민만도 못한 등수를 받게 된 것이다.

나르사빈의 이번 월간 시험 성적은 2등이었다. 누가 봐도 충분히 좋은 성적이었지만, 그의 앞에 있는 한 명이 평민이란 게 문제였다. 다른 귀족가의 자제라면 납득하겠는데 평민이라니!

더군다나 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나 반복되는 일이다.

“대체 네놈들은 뭐를 한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르사빈은 자신의 호위 기사들을 시켜 해톤을 흠씬 패줬다.

경고였다.

평민주제에 귀족 앞에 서지 말라는 경고! 보통은 그런 경고를 받으면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마구르가 그랬다. 마구르는 단 한 번, 비오는 날 개 패듯 맞고 몸져누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귀족 앞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해톤은 아니었다.

놈은 아무리 곤죽이 되도, 기어코 다음 시험에서 성적을 냈고, 귀족들 앞에 섰다.

화가 났다. 나르사빈은 그런 평민 따위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 분노는 일처리를 제대로 못한 기사들을 향했다.

“내가 말했잖아! 다시는 펜을 쥐지 못할 정도로 손을 분지르라고!”

“하오나 도련님…… 이곳은 페르코 아카데미입니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면 라울 백작님의 명성에 흠이 생깁니다.”

“내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 따위 소리가 나와? 내 명예가 곧 라울 백작가의 명예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르사빈이 가장 우려하는 건 주변의 평가가 아닌, 아버지인 라울 백작의 평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분명 혼을 내실 것이다. 라울 백작가에서 평민 따위에게 지는 반푼이가 태어났다고.

‘젠장!’

벌써부터 칭찬 대신 혼이 날 상상을 하니, 속이 쓰려왔다.

더군다나 이제 6학년이다. 여기서 계속해서 해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나중에는 그걸 뒤집을 기회조차 없다. 졸업 후에는 더 이상 시험 따위는 없으니까.

‘작년까지는 아무래도 좋았어. 하지만 올해에 해톤 녀석에게 순위를 빼앗기면 내 미래가 망가지는 거야.’

빠득!

나르사빈이 이를 갈았다.

“지금 당장 해톤, 놈의 손목을 잘라.”

그 순간 나르사빈의 입에서 섬뜩한 말이 튀어나왔다.

“예?”

기사는 당황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왕립 아카데미 내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분명 조사가 진행될 겁니다.”

“누가 대놓고 하래? 몰래 하란 말이야! 그딴 평민 놈 손모가지 잘린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당장 잘라! 다시는 놈이 펜을 쥐는 꼴을 보게 하지 말라고!”

나르사빈의 신경질적인 외침에 그의 호위기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르사빈의 성정은 잔혹할 뿐더러 그는 고집도 셌다. 뒤틀린 심기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해톤의 잘린 손모가지를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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