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3.
파밧!
왕성의 화려한 건물들 사이로 섬뜩한 기세를 뽐내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정없이 스쳐지나갔다.
콰광!
오러 블레이드에는 심미안 따위가 없었다. 그것들은 닿는 모든 것을 무참하게 잘라내고, 박살낼 뿐이었다. 지붕이 날아가고, 건물 외벽이 무너졌다. 그 후에 무게를 버티지 못한 건물은 폭삭 무너졌다.
쿠궁!
건물들이 연달아 무너지며 지진 비슷한 굉음을 냈다.
“으악!”
“피해, 피하라고!”
그 와중에 건물들의 잔해 혹은 눈 먼 오러 블레이드에 상처를 입은 자들이 속출했다.
무시무시한 전장이다. 그럼에도 구경꾼들의 숫자는 늘어날뿐,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누가 이기는 거야?”
“당연히 노믹스 경이겠지. 오러 마스터잖아?”
“강철 기사단의 기사단장은 아무나 오르는 줄 알아? 더군다나 방어하면 콩탄 왕국 제일이라 불리는 이가 쥴리언 경이라고. 오러 마스터라도 쥴리언 경의 가드를 쉽게 뚫을 수 없을 걸?”
목숨을 건 관람이다.
그 무리들 중에는 귀족들도 다수 있었다. 마차와 기사들을 방패삼은 그들은 최고의 장소에서 최고의 기사들이 벌이는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보는 시선은 평민들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기어코 일이 터졌군.”
“쯧쯧, 노믹스 경이 쿠틀러 백작 부인을 건드렸으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귀족들은 알고 있다. 쥴리언을 기사로 삼고 있는 쿠틀러 백작과 노믹스 사이의 일을 말이다.
왕의 사위로 알려진 노믹스, 그런 그의 방탕한 성생활은 이미 콩탄 왕국 사교계에서 너무 유명했다. 쿠틀러 백작 부인과 염문설이 났던 것이 두 달 전의 일. 애처가로 유명한 쿠틀러 백작은 그 일이 있은 후로 아주 사람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후 쥴리언을 통해 때를 가늠했다. 당장 시비를 걸 수 없으니, 노믹스가 시비를 걸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노믹스 역시 그 소식을 들었을 뿐더러, 오는 싸움 마다하다 못해 없는 싸움도 만드는 그가 쥴리언 경에게 먼저 시비를 건 것이다.
둘의 싸움은 서로의 색이 명확했다.
“하하하! 철벽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굼벵이 같군. 그래서 어디 승부나 보겠나? 응? 쥴리언 경?”
노믹스의 공격은 소나기 같았다. 단순히 공격이 빠르고, 횟수가 많은 게 아니었다. 노믹스의 공격은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그 어떤 개념도 품지 않은 채 무작정 날아가고 있었다.
혹자는 검법을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든 이가 검법을 모를 리 만무하다. 검법의 틀을 넘어선 경지, 그게 바로 노믹스의 경지였다.
“흥! 오러 마스터란 명성이 허명은 허명인가 보구려. 날 간질이지도 못하는 걸 보니.”
반면 쥴리언은 제대로 된 공격은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노믹스의 모든 공격을 튕겨냈다. 방패를 든 것도 아니었지만, 쥴리언의 방어는 철벽, 그 자체였다. 노믹스가 퍼붇는…… 심지어 궤적조차 정형화되지 않은 그 짐승 같은 모든 검을 막아냈으니까.
“대단하군.”
“노믹스 경의 실력이야 이미 평판이 자자하지만 쥴리언 경의 실력 역시 과연이란 소리가 나올 법하군.”
그 광경에 모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정말 눈썰미가 좋은, 실력 좋은 기사들은 감탄사를 내뱉기보다는 혀를 찼을 것이다.
문수르가 그랬다.
‘노믹스라고 했나?’
결투가 벌어지는 장소 주변으로 이미 인파가 가득 찼기에 프리실라 일행은 정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결투를 보는 게 전부였지만, 문수르는 가까이서 보는 것 이상으로 둘의 결투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적당히 가지고 노는군.’
언뜻 보면 박빙으로 보이지만, 문수르가 보기에 절대 박빙이 아니었다.
‘쥴리언이란 자는 이미 가진 기량의 전부를 끄집어냈지만, 노믹스란 자는 아직 절반 정도만 뽑아냈을 뿐이다.’
노믹스에게는 더 뽑아낼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힘을 뽑아내지 않았다.
‘악취미로군.’
뻔하다.
쥴리언을 가지고 놀기 위함이다. 쥴리언에게 보다 처절한 절망감을, 치욕을 주기 위해서다.
“아아, 이 멋진 결투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니.”
한편 프리실라는 제대로 눈에 비치지 조차 않는 결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 멋진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에 화가 왔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나운 모양이다.
‘이게 뭐야?’
들끓었던 마음이 식는 느낌이다.
그때였다.
“우아아아!”
“노믹스 경이 쥴리언 경의 가드를 뚫었다!”
거대한 함성이 왕성을 울리기 시작했다.
노믹스, 그의 검이 철벽같던 쥴리언의 가드를 뚫고 줄리언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이다.
콧잔등 위를 가볍게 스친 상처였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흉터는 길게 남을 듯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커튼마냥 쥴리언의 얼굴 절반을 뒤덮기 시작했다.
쥴리언의 표정이 굳었다.
‘날 가지고 놀았구나.’
상처는 별 거 아닌 듯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쥴리언이 느낀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쥴리언 정도의 기사라면 직감할 수 있다.
상대가 이제까지 자신을 진지하게 상대한 것인지 아니면 가지고 논 것인지!
빠득!
그 사실에 쥴리언은 분노했다. 이제까지 자신보다 강했던 기사는 몇 번 만나봤다. 그들과 싸워봤고, 패배의 쓴맛도 맛봤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굴욕을 당한 적은 없다.
‘오냐!’
이쯤 되면 단순히 기량을 겨뤄 승루를 내기 위한 결투가 아니다.
필살(必殺)이다.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결투. 기사의 자존심을 건드린 대가다.
“하하, 이거 철벽에 구멍이 났군.”
그런 쥴리언의 각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믹스는 그런 쥴리언을 약 올리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노믹스는 일부러 쥴리언을 약 올리는지도 몰랐다. 쥴리언이 사생결단의 자세로 나온다면, 먼저 살의가 제대로 담긴 공격을 한다면, 노믹스는 정당방위로 쥴리언을 해칠 기회를 얻게 되니까.
이윽고 그 둘이 서로를 죽일 기세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앙, 카앙!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어?”
“느낌이 다른데?”
그 둘이 품은 각오가 변했다는 건, 그들의 결투를 바라보는 이들조차 어렴풋이 느낄 정도였다.
하물며 눈썰미 좋은 실력자들이 진짜 살기가 담긴 검격(劍擊)을 눈치 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문수르는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노믹스의 페이스군. 쥴리언이 말려들었어.’
쥴리언은 죽을 것이다. 노믹스는 지금처럼 쥴리언이 덤벼들 때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노믹스가 그 틈을 놓칠 리가 없다.
그 순간 문수르는 짧게 고민했다.
짧은 고민이 끝나기 무섭게.
번쩍!
문수르의 눈빛에서 살벌한 기세가 폭발되듯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카앙!
쥴리언과 노믹스의 검이 부딪쳤다. 그 충돌은 서로가 예상치 못했던 충돌이었다.
더불어 그 둘은 서로가 아닌 똑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그들은 동시에 느꼈다. 자신 둘을 향하던 무지막지한 기운을 말이다. 그 갑작스런 살의에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눈앞의 적을 처치하기보다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공세를 멈추고 한 번 숨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향했던 서슬 퍼런 기세는 마치 신기루마냥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착각?
그건 아니다.
‘분명 누군가 있었다.’
쥴리언은 그것을 계기로 침착함을 되찾았고.
‘나말고 오러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자가 또 있었어? 그럴 리가 없는데? 제이머스 후작은 분명 자기 영지에 있을 텐데?’
반대로 이제까지 침착하고, 냉철했던 노믹스는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그 두 차이가 둘의 결투를 흐지부지 만들었다.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쥴리언, 냉철함을 되찾은 그가 상황을 빠르게 분석했고, 정리했다.
‘노믹스가 이걸 노렸구나.’
자신이 노믹스의 마수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잘못 했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대로 노믹스는 아차 싶었다.
‘쳇!’
침착함을 되찾은 쥴리언,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쉽군. 쿠틀러 백작을 나락에 빠뜨릴 좋은 기회였는데.’
노믹스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쉴 무렵.
“패배를 인정하겠소.”
쥴리언이 패배를 인정하며, 걸음을 뒤로 물렀다. 제 입으로 패배를 선언한 기사를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
“하하하, 결국 철벽의 기사란 것도 허명이었군.”
노믹스는 이죽거리듯 말했지만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속이 쓰린 건 노믹스였다. 반대로 구사일생, 운 좋게 목숨을 구한 쥴리언은 노믹스의 이죽거림에 미소로 답할 수 있었다.
결투가 끝났다.
“쥴리언 경이 패배했군.”
“어쩌겠는가? 아무리 쥴리언 경이 대단하다고 해도 상대는 오러 마스터인 노믹스 경인데.”
“쯧쯧, 결과는 뻔했던 거지.”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노믹스의 승리였다.
“그래도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군.”
“그래, 두 기사 모두 콩탄 왕국의 보물 아닌가?”
결투가 끝나자 빠르게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프리실라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아카데미로 가요.”
제대로 결투도 보지 못한 프리실라는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한편 마차 밖에 있던 문수르는 슬그머니 손바닥을 가득 적신 땀을 옷에 닦았다.
‘이것도 쉽진 않군.’
쥴리언과 노믹스의 싸움, 그 틈에 끼어든 건 다름 아니라 문수르였다. 문수르는 가진 모든 힘을 쥐어짜내 그 둘의 틈 사이로 살기를 흘려 보냈다.
목적은 하나, 둘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살기, 그 자체만으로 그들에게 타격을 주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이 뛰어난 기사인 이상 갑작스레 자신들을 향한 살기 앞에선 일단 방어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랬다.
대체 왜 그랬을까?
‘괜히 결투 도중에 피바람이 불면, 나중에 내가 움직이기 힘들어져.’
결투? 좋다.
하지만 이 결투에서 만약 어느 한쪽이…… 아마도 쥴리언이 되겠지. 그가 죽었다면 왕도의 분위기는 착잡하게 가라앉을 것이다. 왕 역시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떤 식으로든 대처를 할 터.
예를 들면 왕도 내에서 사사로운 결투를 잠시 동안 금지한다…… 이런 왕명이 떨어질 수도 있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갑지 못한 경우의 수다.
물론 그 외에도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제이머스 후작, 그가 어째서 노믹스를 견제하는지 알겠군. 노믹스, 그자는 분명 불순한 의도를 품었다. 적어도 콩탄 왕국에 충성을 바치는 타입은 절대 아니야.’
노믹스, 그에게서 불길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치 적국의 기사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그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꼴을 보는 게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약 그 상황에서 문수르의 정체가 들켰다면? 그래서 만약 문수르가 결투를 벌이게 됐다면?
사실 문수르 입장에서 나쁠 건 없다. 그 경우, 오러 마스터인 노믹스가 문수르의 정체를 밝혀줄 테니까.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란 사실을 증명해줄 테니까.
애초에 그걸 위해서 왕도에 올라오지 않았는가?
문수르 입장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나쁠 건 없었다.
‘그보다 첫날부터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군.’
문수르는 두 눈을 감았다. 왕도에 들어온 지 이제 막 한 시간도 채 안 됐는데 벌써 큰일을 겪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큰일이 있을지…….’
문수르가 살짝 한숨을 내쉴 무렵, 어느새 거대한 건물 하나가 문수르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왕립 페르코 아카데미에 도착한 것이다.
페르코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과정 역시 복잡하지 않았다. 불스 백작가란 사실이 증명되자마자 별다른 절차 없이 일행 모두가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페르코 아카데미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동쪽은 남자들이 머무는 기숙사가, 서쪽으로는 여자들이 머무는 기숙사가 위치해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수업이 진행되는 건물들이 가득했다.
여기서 프리실라 일행과 문수르가 떨어졌다.
“이제부터 시간표대로 움직이겠습니다. 문제가 있으시면 편지를 주십시오.”
여자 기숙사에는 귀족가의 영애들이 머무는 만큼 남자의 출입에 대해서 엄격했다.
때문에 문수르는 남자 기숙사 쪽에서 머물며, 프리실라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귀찮은 일이지만, 오히려 문수르 입장에서는 프리실라의 시간표 외에는 나머지는 전부 자유시간이나 다름없기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더군다나 실비아 경이 프리실라의 곁에 붙은 이상, 딱히 문수르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날 싫어하니까, 일부러 날 떨어뜨려 놓을 가능성도 있지.’
하물며 문수르를 탐탁지 않아하는 프리실라의 성정을 생각하면 일부러 문수르를 떨어뜨려놓고, 실비아와만 동행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나야 고맙지.’
문수르 입장에서는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문수르는 남자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이미 그의 방은 따로 배정된 상황이었다. 이미 기숙사 층 하나가 문수르와 비슷한 처지의 기사들을 위해 배정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문수르가 자신의 방으로 갔을 때, 그의 주변에는 단련된 기사들 다수가 보였다. 더군다나 기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경계했다. 같은 콩탄 왕국의 기사라고 해도, 모시는 주군 간에 싸움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그들 대신에 여기 있는 기사들이 싸우게 될 테니까. 지금 눈앞에, 방금 옆으로 지나갔던 기사와 내일 결투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그들에게 문수르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창을 쓰는 기사라?’
‘독특한 타입이군.’
‘기억해두는 게 좋겠어.’
대부분의 기사들이 결투에서는 검을 쓰는데 비해, 창을 쓰는 문수르는 눈에 확 뛸 수밖에 없었다.
문수르는 그런 시선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애초에 문수르들은 그런 주변의 시선에 관심이 없었다.
‘여기엔 과연 내가 원하는 인재들이 있을까?’
문수르의 시선은 바로 아래층, 평민 출신의 아카데미 학생들이 머무는 그곳을 향해 있었다.
그로부터 나흘 후 페르코 아카데미의 입학식이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