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22화. 입학식.>
1.
왕도로 향하는 길은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몬스터들의 습격이 있긴 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문수르는 전투에 나서지 조차 않았다. 문수르의 동행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줄인 전력으로도 충분히 막을만한 습격이었다. 물론 왕도로 떠나기 전에 갑작스레 추가된 전력이 있긴 했다.
‘실비아라고 했었나?’
여기사라고 했다.
‘그때 전투에는 없었는데…….’
불스 백작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고, 그걸 막기 위해 문수르가 불스 백작령을 습격했을 때, 문수르의 앞을 가로막던 기사들 중에 여기사는 없었다.
‘아마도 목적이 다른 거겠지.’
여기사들의 목적은 대부분 요인 호위다. 여기서 말하는 요인이란 보통의 기사들이 항시 호위하기 힘든 여성들을 의미한다. 영주의 아내 혹은 딸…… 왕비나 공주가 머무는 왕도의 경우에는 아예 여기사들로만 구성된 기사단도 존재한다.
본래는 불스 백작 부인의 호위를 맡았을 그녀는 프리실라의 간곡한 부탁에 불스 백작이 어쩔 수 없이 이번 일행에 합류시켰다고 한다.
‘불스 백작의 사전에 어쩔 수 없다라는 표현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불스 백작이 보통 인물인가?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모두 그의 의도 하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이번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즉, 실비아 경의 합류는 단순히 프리실라가 원해서가 아니라 불스 백작이 노리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문수르는 별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일의 핵심은 문수르다. 문수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번 판을 흔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불스 백작도 그걸 모르진 않을 터.
열쇠는 문수르의 손에 쥐여있다. 적어도 이번 일에서 불스 백작이 제 마음대로 수작을 부리기는 힘들다.
‘너무 긴장하는 것도 안 좋지.’
긴장감이 나쁘단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는 법.
‘릴렉스.’
문수르는 스스로를 좀 더 느슨하게 풀어놓고자 했다. 자연스럽게 문수르의 태도는 부드러워졌다. 유유자적, 마치 문수르는 이번 일에 호위가 아닌 유람을 온 듯했다.
프리실라는 그런 문수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저 인간은 뭐야?’
이름도 명성도 없는 기사면 열심히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는 게 정상인데, 문수르는 오히려 느슨한 모습만 보여준다. 심지어 프리실라는 문수르가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물론 문수르의 주무기가 검이 아닌 창이긴 하지만, 적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서기라도 해야 하지 않은가?
‘아버님은 대체 왜 저런 인간을 내 기사로 붙여준 거야?’
프리실라는 마차 안에 같이 탑승한 실비아를 보았다. 짧은 검은빛 단발머리의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기사답게 열심히 훈련을 해서 그런지, 얼굴빛만 보더라도 잘 벼려진 검 같은 느낌이 났다. 보통 여자들과 다르게 얼굴살조차 없는 탓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 먹어서 피골이 상접한,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실비아 경이라도 데려와서 천만다행이야.’
그런 실비아를 보며 프리실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실비아마저 없었다면 왕립 아카데미의 생활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마차는 계속해서 이동했고, 며칠 후 일행은 왕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2.
처음으로 왕도를 보게 된 문수르는 짧게 감탄했다.
‘돈을 처발랐군.’
예전이라면 성벽부터 느껴지는 그 화려함에 감탄사부터 나왔겠지만, 이제르트 자작령의 성벽 보수 과정에서 성벽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중요한 성벽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돈이 드는지 알게 된 이후부터는 성벽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건 돈밖에 없었다.
콩탄 왕국의 왕도는 정말 화려함의 극치였다. 성벽 위로는 온갖 조각상들이 가득했고, 성벽의 배치 역시 실용성보다는 심미안을 중시한 듯했다. 억지로 땅을 메우고 그 위에 억지로 돌을 쌓은 느낌이다.
이런 점을 문수르가 곧바로 파악할 수 있는 건, 정면이 아니라 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GPS시스템을 통해 이미 하루 전 날 왕도의 대략적인 지형을 파악한 상황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성벽은 제 역할을 못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억지로 만든 성벽은 충격에 약하다. 성벽이 무너지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단순히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없게 되는 것,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니까.
성벽이 무너지면서 입는 병력 피해는 둘째 치고, 공성전에서 성벽이 무너진다는 건 사기가 무너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병사들의 사기, 전쟁에선 식량만큼이나 중요하다.
‘대체 무엇을 위한 성벽인가?’
왕성에 무조건 실용성을 강요하자는 건 아니다. 왕국을 대표하는 성인만큼, 왕국의 문화를 표현해줄 수 있다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결국 왕성은 왕국의 최후의 보루 아닌가? 문화적 가치와 전술적 가치, 만약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전술적 가치가 우선되어야 한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야 한다. 전자를 택한다는 건…… 나라를 지킨다기보다는 자신을 뽐내고 싶다는 거겠지.
허세다.
‘콩탄 왕국의 현주소로군.’
제국에 모든 걸 위임한 채, 제국의 품속에서 칭얼거리는 것. 그게 지금 콩탄 왕국의 모습이었다.
제국 덕분에 콩탄 왕국은 그 어떤 전쟁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제국이 있는데, 그 막강한 제국이 뒤를 봐주는데 감히 누가 콩탄 왕국에 전쟁을 건단 말인가? 심지어 가장 위험한 적인 제국이 아군이 되었거늘!
그러나 정말 우스운 소리다.
‘인간들의 세상에 전쟁이 없다는 것만큼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없지. 조만간 폭발할 것이다.’
문수르가 태어난 어스 월드, 정치적으로나 문명적으로나 케르빈 월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그곳에서도 시시각각 전쟁이 진행 중인데, 거기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훨씬 불안정한 케르빈 월드에서 전쟁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역사가 증명해준다.
때문에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콩탄 왕국의 근간이라는 왕성의 꼴이 이런 걸 보면 경각심 따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야 고맙지.’
문수르에게는 홍복이다. 콩탄 왕국의 혼란은 이제르트 자작령이 반석에 오를 기회가 될 테니까.
프리실라와 그 일행들은 몇 가지 절차를 거친 후에 왕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조사는 없었다. 불스 백작가가 변방에 위치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백작가다. 백작이란 남작이나 자작과 같은 하위 귀족이 아니다. 충분히 대접 받을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덕분에 문수르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신분을 위조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군.’
당연한 말이지만 문수르는 애초에 케르빈 월드에서 태어나질 않았다. 그런 만큼 그의 신분 대부분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 위조를 했지만, 거짓은 결국 거짓. 어느 순간 거짓인 게 들통 나도 이상할 건 없다.
하물며 왕성이라면 출입하는 이들에 대한 신분검사가 철저할 터. 문수르는 최악의 경우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스 백작가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들어가는 문부터 평민과 귀족은 차이가 나는군.’
평민들은 길게 줄을 늘어선 채 아주 깐깐한 조사를 받았지만, 귀족들은 그런 게 없었다. 확실하게 신분만 증명되면 거의 다이렉트로 왕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게 이 세계의 기본이지.’
신분제도.
이 틀에 막혀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유능한 인재들은 어디에서나 넘쳐날 것이다.
그들을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어느 분야든 좋다. 행정, 사무, 외교…… 아무래도 좋다. 농사를 잘 지어도 좋다. 전략의 귀재? 너무나도 환영한다.
단지 문제가 되는 건 가치관과 이념이다.
‘능력이 부족한 건 용서가 되지만, 앞으로 내가 만들 세상을 부정하는 건 용납이 안 되지.’
문수르가 만들 이제르트 자작령은 이제까지의 세상과 전혀 다르다. 보통의 이념과 가치관을 가진 자라면 결코 용납하지 못할 세상일 것이다.
잘 골라야 한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문수르에게 필요한 건 자신이 원하는 걸 도와줄 인재지, 자신의 옆에서 사사건건 트집 잡고, 자신과 반목하는 인재가 아니다. 물론 진심 어린 충고라면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
그때였다.
‘응?’
이리저리 사람을 살피던 문수르. 그런 그의 감각이 마치 맹수의 존재를 느낀 다른 맹수의 그것처럼, 바짝 곤두섰다.
‘오러 마스터다.’
이 느낌, 엘프 부족인 탈라트 부족의 오러 마스터 가누스와 비슷하다. 문수르는 곧바로 이 느낌의 상대가 오러 마스터임을 파악했다.
‘왕국에 오러 마스터는 둘뿐인데?’
콩탄 왕국 소속의 오러 마스터는 왕의 사위라 불리는 루이 노믹스와 제이머스 후작, 둘이다.
‘둘 중 한 명이겠지.’
문수르는 자신의 감각을 곤두서게 만든 존재가 그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상대는 힘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노골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오러 나이트 정도 되는 기사라면 그 존재를 쉽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다.
반면 문수르는 힘을 감추고 있다. 상대가 오러 마스터라도 쉽게 문수르의 경지를 파악할 순 없을 터.
보통 때라면 문수르는 당연히 계속 힘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스 백작이 문수르를 이곳 왕도로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문수르의 데뷔를 위해서다.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란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오러 마스터란 걸 증명하는 게 말처럼 간단한 건 아니다. 당장 오러 마스터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오러 소드 또는 오러 웨폰을 보여주면 되겠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오러 웨폰을 보여주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하물며 여긴 왕성이다. 다짜고짜 오러 마스터가 등장해서 오러 웨폰을 선보이면 박수소리 대신에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오러 마스터의 등장이라면 일단 경계부터 하는 게 보통이니까.
그게 아니면 결국 누군가 싸움을 걸어주거나 싸움을 걸어야 한다는 건데,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오러 마스터가 문수르를 보고 오러 마스터인 걸 파악하고, 말을 걸어준다면?
의외로 쉽게 일이 풀릴 수도 있다.
문수르가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그 부분 때문이었다.
‘아니야.’
그러나 이내 문수르는 고민을 접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기 기세를 뽐내는 걸 보면, 진중함과는 거리가 먼 부류인 게 분명해.’
그냥 감추려고 하면 감출 수도 있는 걸 굳이 드러낸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괜히 다른 오러 마스터가 등장한다면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갈 수도 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더군다나 인재도 영입해야 하는 문수르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목적이 완수되기 전까지 귀찮은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자.’
문수르가 관심을 끈 그 순간.
카앙!
거친 쇳소리가 문수르의 고막을 강타했다. 문수르는 저도 모르게 창에 손을 가져갔다.
‘뭐지?’
갑자기 터져나온 이 쇳소리, 분명하다. 누군가가 무기를 들고, 충돌을 했다.
거기까지라면 아무래도 좋다.
살의가 피어오르고, 강력한 오러의 파장이 느껴졌다.
‘오러 마스터…….’
문수르가 느꼈던 그 오러 마스터, 그로부터 시작된 소리였고, 충돌이었으며, 파장이었다.
오러 마스터가 싸우고 있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몰려가는데?”
그 변화를 감지한 건 문수르 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왕성 초입이다. 막 왕성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갑작스런 상황은 그런 그들의 입을 통해서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졌다.
“노믹스 경이다!”
가장 먼저 들리는 건 기사의 이름이었다.
루이 노믹스, 콩탄 왕국의 오러 마스터이며 왕의 사위라 불리는 남자.
“노믹스 경이 검을 들었어!”
그런 그가 검을 들었다. 오러 마스터가 검을 든 것이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누군가를 상대하기 위해서!
그럼 이쯤에서 모든 이들의 관심은 하나로 향했다.
“누가 노믹스 경과 대결을 벌이는 거지?”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간이 부었군.”
“간이 부은 정도가 아니라, 간이 없을 게 분명해.”
“간이 있더라도 이제 쓸모가 없겠지. 시체가 될 테니까.”
이윽고 노믹스와 검을 맞댄 이의 이름이 알려졌다.
“쿠들러 백작가의 기사 쥴리언 경이다.”
“맙소사, 강철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잖아?”
노믹스와 검을 나눈 자, 유명한 강철 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 오러 마스터에 가장 가까운 오러 나이트로 알려진 사이저 쥴리언이었다.
사람들이 들끓었다.
갑작스레 엄청난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한 쪽은 콩탄 왕국의 둘 밖에 없는 오러 마스터이며, 다른 한쪽은 그에 근접한 오러 나이트! 이런 대결은 어디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다.
사람들의 관심이 한 곳으로 집중됐다.
“당장, 당장 이동해요!”
그리고 프리실라 역시 그런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책으로만 보던 엄청난 기사들의 결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더군다나 오러 마스터인 루이 노믹스와 젊은 나이에 강철 기사단이란 막강한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된 사이저 쥴리언, 둘 다 콩탄 왕국 귀족가의 영애들이라면 한 번쯤 꿈에서 봤을 법한 유명한 기사들 아니었던가?
프리실라 일행이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