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3.
왕립 아카데미로 떠나는 불스 백작의 무리는 2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왕립 아카데미에서 먹고 자고 지내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짐이 필요했고, 그 짐을 옮길 일꾼들은 물론 왕립 아카데미에서 프리실라의 수발을 들어줄 하인과 하녀도 같이 떠나야 했다. 여기에 그들을 지킬 호위 병력까지 계산하면 사실 24명이란 숫자도 꽤나 줄인 숫자였다.
사실 그 숫자가 팍 줄어든 가장 큰 이유는 문수르의 존재 때문이었다.
문수르가 호위 기사로 참가하게 된 이상, 굳이 더 많은 전력을 투입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문수르는 오러 마스터니까.
그런 문수르를 어찌 하기 위해서는 1개 기사단이나, 기가스 정도가 출동해야 하는데 고작 프리실라를 잡기 위해 그 정도 전력을 보낼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쨌거나 문수르가 불스 백작가에 도착했을 때, 문수르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들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느낌이 묘하네.’
그들의 눈길이 부드러운 이유야 뻔하다. 일단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란 사실이 가장 클 것이다.
기사들은 보다 강한 자를 질투하거나 혹은 존경한다. 불스 백작가의 기사들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그들은 강자을 존경하고, 조금이라도 배우려는 자들이었다.
물론 적이었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지금 문수르가 불스 백작가에 온 이유는 불스 백작가를 도와주기 위함이다. 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 이쯤 되니 오히려 불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문수르에게 먼저 접근했다.
“문수르 경, 불스 백작가에 온 걸 환영하오.”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으셨소?”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소. 하지만 주군의 명을 따르는 게 기사의 의무 아니겠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구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문수르를 죽이기 위해 엄청난 적의와 살의를 보내던 이들이 이렇게 나오니 문수르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문수르는 오히려 이런 불스 백작가의 기사들을 보며 감탄했다.
‘불스 백작가의 저력을 알겠군.’
불스 백작가는 모든 것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었다. 기사만 봐도 그렇다.
세상 모든 기사가 기사도를 품고, 인격자인 건 아니다. 그리고 인격과 실력이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실력만 좋고, 성품은 쓰레기인 기사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경우가 아닌 경우보다 더 많다.
하지만 불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인품과 실력, 그 외의 모든 것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당장 겉보기에는 의미 없어 보일 균형이겠지만, 정말 긴급한 상황, 시급한 상황에서 이 균형은 절대적인 위력을 보일 것이다.
‘불스 백작, 많이 준비했구나.’
이 모든 걸 이룩한 건 불스 백작의 업적이다. 그는 당장 급하다고 실력뿐인 기사만을 영입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어렵게 영입한 기사들이 나태해지는 것도 막았다.
매우 힘든 일이다.
‘이런 점은 배워야겠지.’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령에 꼭 필요한 능력이기도 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힘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가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성장이 미숙하면 키워진 힘은 그저 무식한 폭력으로 남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기사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두던 문수르. 그런 그의 눈가에 소녀 한 명이 어슬렁거렸다.
‘아마도 프리실라 불스, 불스 백작가의 영애겠지.’
기사들 사이에서도 서스럼 없이 다닐 수 있는 소녀는 많지 않을 터. 아니, 불스 백작가에 단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이리아 아가씨와 비슷한 또래로군.’
그녀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리아 이제르트였다. 몸이 나약한 탓에 세상을 보지 못했던 그녀.
‘만약 이리아 아가씨가 좀 더 어렸으면 내가 왕립 아카데미로 아가씨를 모셔다드렸겠지.’
이제는 이리아도 충분히 건강해졌지만, 아무래도 왕립 아카데미에 지금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조금 많았다. 물론 평균에 비해 높다 뿐이지 충분히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해도 문제될 게 없는 나이이긴 하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이나 이리아 본인은 아카데미 입학을 원치 않았다. 몸이 아픈 이리아가 이제까지 제대로 공부를 했을 리 만무하다. 아무리 배우기 위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거라고 기초적인 지식은 필요한데, 이리아는 그런 게 부족했다.
때문에 현재 이리아는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
곁에서 본 적 있다. 이리아는 이제르트 자작을 닮아서, 머리가 굉장히 영특했다.
‘제대로 공부했다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보셨을 텐데.’
만약 몸만 아프지 않았다면, 이렇게 외롭게 영지에서 홀로 공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후.’
그 순간 문수르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못 생각했군. 오히려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면, 더 외로워질 뻔했겠어.’
문수르가 잠시 망각했던 것, 그건 바로 콩탄 왕국 내에서 이제르트 자작가의 위치였다.
콩탄 왕국 귀족사회에서 왕따나 다름없는 이제르트 자작의 딸이 그런 귀족들의 자식들이 입학하는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어쩌면 이게 나은 결과일 수도 있다.
‘흥.’
물론 나은 결과라는 거지, 옳은 결과란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이제르트 자작가가 핍박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핍박 받아야 하는 건 제멋대로 섬기던 주인을 바꾸는 개만도 못한 현재의 귀족들 아닌가?
‘심판해야지.’
하늘은 그들을 보고 넘어갔지만, 문수르는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
“당신이 문수르 경?”
그때 프리실라가 각오를 다지는 문수르에게 말을 걸어왔다.
“생각했던 것만큼 평범하네요.”
그런 그녀의 말에 문수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
문수르가 겉으로 보기에는 체격도 좋고, 키도 크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생긴 외모를 가지거나 반대로 아주 인상적인 외모인 건 아니다. 덩치 좋은 기사들 사이에 서면 창을 주무기로 쓴다는 걸 제외하면 이러다할 특이점을 찾기 힘들다.
평범하다는 표현이 이상한 건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까지 문수르를 평범한 인간으로 대접한 자들은 별로 없었다.
문수르가 가진 능력은 결코 평범함이란 단어로 수식이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 문수르의 능력은 비범함, 그 이상이다.
당장 오러 마스터 아닌가?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다. 그런 문수르를 과연 누가 평범하다고 폄하할 수 있을까?
물론 콩탄 왕국은 문수르의 존재를 모른다. 문수르의 존재를 아는 건 이제르트 자작가와 불스 백작가 정도뿐이다.
하지만 여기가 어디인가? 다름 아니라 그 불스 백작가다. 불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프리실라가 모르는 걸까?
‘설마…….’
보통 경우라면 모를 수가 없다. 그녀는 엄연히 불스 백작가의 일원이다. 불스 백작령의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게 그녀의 의무다.
그런데 만약 정말 모르는 거라면…….
‘불스 백작이 일부러 숨겼군.’
문수르가 기사들의 표정을 봤다. 기사들의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러운 표정이 아니라 억지로 지은 표정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거기서 문수르는 확신했다.
‘무언가 있구나.’
역시나 이번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불스 백작이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좋아.’
문수르는 그런 불스 백작의 의도에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문수르라 합니다.”
“성은 없나요?”
“아직 정식 기사 작위를 받은 게 아니라, 성을 하사 받진 못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프리실라가 기겁했다. 그러니까 정식 기사 작위도 받지 못한 이가 자신의 호위 기사로 왕립 아카데미까지 동행한다고?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프리실라는 불스 백작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자신을 망신주려고 일부러 이렇게 하는 걸까?
“예, 아직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군요!”
프리실라는 거기서 문수르에 대한 관심을 껐다. 기사 작위도 없는 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그녀는 탐탁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노골적으로 문수르에게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지은 후에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은 그 광경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백작님 명이지만…….’
‘우리들 숨이 막히는군.’
이 모든 건 불스 백작이 의도한 것이다. 프리실라가 문수르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기사들 입장에서는 속이 탔다.
이 세상에 오러 마스터를 저렇게 대우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기사 작위? 지금 당장 문수르가 원하기만 한다면, 제국에 가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면 곧장 기사 작위가 아닌 진짜 작위를 받을 수도 있다. 왕국이 아닌 제국에서 말이다.
만약 이번 일로 문수르의 심기가 뒤틀렸다면, 적어도 불스 백작가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다.
“문수르 경 다름이 아니라…….”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아, 괜찮습니다.”
그러나 문수르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무덤덤했다. 솔직히 말해서 애나 다름없는 소녀가 뭐라 했건,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정도 문수르가 옹졸한 것도 아닐 뿐더러, 딱 봐도 이 모든 게 불스 백작의 의도라는 게 느껴지는데 판을 망칠 이유는 없다.
“대충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그보다 불스 백작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백작님께 말씀 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백작님께서는 이미 문수르 경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내 딸아이가 자네를 아주 무시했겠군.”
처음 문수르를 보자마자 불스 백작이 꺼낸 말이었다. 그 말을 뱉는 불스 백작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예. 프리실라 아가씨께서 저를 참 제대로 무시하시더군요. 그런 면박을 받아본 건 처음입니다.”
“이해하도록. 내가 워낙 오냐오냐 키운 탓에 딸아이의 성격이 모난 곳이 좀 많으니.”
자신의 딸을 폄하하는 불스 백작.
“아직 어리시잖습니까?”
“그 나이면 어린 건 아니지. 조만간 몇 년 더 지나면 성혼을 치러도 될 나이이거늘.”
“그렇긴 하군요. 혼처는 정해두셨습니까?”
귀족들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식 간의 결혼을 약속하는 경우가 많다. 사돈관계 만큼 가문 사이의 관계를 견고하게 다질 만한 방법도 많지 않으니까.
가뜩이나 권력욕이 넘치는 불스 백작이 자신의 딸아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아직 마땅히 정해진 혼처는 없다.”
“조금만 크면 대단한 미인이 되실 듯한데, 많이 골치 아프시겠습니다.”
“그런 고민이야 고민도 아니지.”
참으로 화기애애한 대화다. 불스 백작과 문수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화기애애한 대화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이후에도 그들은 서로의 주변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더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프리실라, 그 아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왕립 아카데미에서 분명 사고를 저지를 것이다.”
“프리실라 아가씨를 너무 믿지 못하시는 거 아닙니까?”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확실하게 보는 거지. 그 아이는 허영심이 제법이야. 무엇보다 변방의 귀족인 탓에 이러다할 화려함을 누리지 못한 것에 한이 맺힌 아이지. 분명히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존재를 뽐내기 위해 어떤 짓이든 할 것이다.”
들어 보면 그냥 딸아이에 대한 이야기 같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곳은 왕도 위에 세워진 건물.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피바람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다반사인 장소다. 하물며 자존심만으로 똘똘 뭉친 귀족가의 자제들이 모인 곳. 프리실라의 허영심 앞에서 기죽고, 고개 숙일 녀석은 많지 않을 거야. 그럼 어찌 될 것 같나?”
“대판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잘 아는군.”
그제야 문수르는 불스 백작의 의중을,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가 원하는 건 다름 아니라…….
“그때 자네가 등장하는 거지.”
“저보다 정체를 드러내라, 이 말씀이십니까?”
문수르가 보다 일찍 오러 마스터란 사실을 콩탄 왕국에 알리는 것! 그게 바로 불스 백작이 원하는 것이었다.
“빅토리안 공작가의 파티가 시작되면 자네의 실력을 알릴만한 타이밍은 없다. 그런 만큼 미리미리 자네의 실력을, 자네의 존재감을 알릴 필요가 있지.”
사실 불스 백작은 문수르란 카드를 써먹기로 계획을 세운 이후 문수르란 카드를 언제 선보일지, 때를 가늠하고 있었다.
최소한 빅토리안 공작가의 파티가 주최되는 여름 이전에 문수르란 카드를 선보여야 했다.
그리고 좋은 기회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프리실라의 왕립 아카데미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다.
모든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왕립 아카데미라면, 문수르란 카드를 선보이기에 가장 좋은 무대가 될 터.
“알겠습니다.”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할 말이 있다.”
“무엇입니까?”
“만약 자네가 그곳에서 후토 백작가와 싸움이 붙게 되면…… 상대를 결코 봐주지 말도록.”
후토 백작가?
문수르는 처음 들어보는 백작가였다. 아직 문수르도 콩탄 왕국의 정세를 백퍼센트 파악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름 명성 있는 귀족이었다면 문수르가 모를 리 없었을 터.
“후토 백작가는 처음 듣습니다만?”
“그러니까 미리 말하는 거다.”
불스 백작의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정확하면 상황이 닥치면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을 터.”
어쨌거나 그 대화를 끝으로 문수르는 불스 백작가를 떠날 준비를 했다.
드디어 왕도로 떠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