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21화. 페르코 아카데미.>
1.
봄이 왔다.
새싹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계절,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피는 계절.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령은 달랐다. 이제르트 자작령은 기지개를 펴지 않았다. 애초에 몸을 웅크리지 않은 채 겨울 동안 달려왔던 이제르트 자작령은 오히려 봄이 되자 숨을 돌렸다.
“후우, 이번 겨울은 겨울이 아니었어.”
“정말 힘든 겨울이었지.”
보통 겨울이 되면 생존에만 집중하게 된다. 제한된 식량, 제한된 자원 그러나 가늠할 수 없는 추위 속에서는 생존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령의 겨울은 매우 힘들었다. 모든 영지민들이 일에 동원됐고, 겨울 동안에도 고구마 농사 등을 했다. 이런저런 일에 동원된 것이다.
“그래도 겨울 동안 배부르게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정말 힘들지만 따듯했지.”
그러나 그것은 혹사와는 달랐다. 이제르트 자작령은 일한 만큼의 보답을 확실하게 해줬다. 먹을 것을 주었고, 잠잘 곳을 줬다. 그뿐인가? 오히려 그 이상의 보상도 주어졌다.
때문에 그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한 마음을 모았다.
덕분이 겨울 동안 이제르트 자작령은 크게 변화했다. 성벽은 다시 굳건해졌으며, 해자는 깊어졌다. 그동안 방치되었던 땅에는 새싹이 돋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병사들이 추가됐다.
문수르는 그 광경을 웃으면서 지켜봤다.
‘변화했다.’
밑도 끝도 없을 것 같았던 이제르트 자작령이 눈에 보일만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없진 않았다.
‘이번 기회에 의사 육성을 위한 커리큘럼을 개발했지만, 아무도 참가율이 저조한 게 아쉽군.’
문수르가 가장 신경 써서 준비했던 것이 바로 의사 양성이었다. 물론 어스 월드의 그것처럼 모든 수술을 척척 해내는 의사를 양성하려는 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그런 의사들도 다수 육성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적어도 간단한 진료와 간단한 처방 정도가 가능한 의사들의 양성은 충분했다. 교육만 제대로 받는다면, 매뉴얼만 확실하다면 말이다. 케르빈 월드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열의를 가지고 의사 양성을 위한 지원자 모집에 들어갔을 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워낙 지원자가 없는 탓에 이제르트 자작이 강제로라도 사람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문수르가 막았다.
“굳이 억지로 사람을 모으고 싶진 않습니다.”
사실 영지의 미래를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사람을 데려와 의사로 양성하는 게 낫긴 하지만, 문수르는 달리 봤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문제점을 찾아야 한다. 그의 상식으로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익이 되는 일인데 이게 이리도 호응이 없다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어느 부분이 있다는 의미니까.
그걸 고쳐야 한다.
근본을 고쳐야 전체가 치료되지, 상처만 살짝 치료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이제부터 무수히 많은 변화를 겪게 될 이제르트 자작령에는 임시방편보다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했다. 어설프게 탑을 쌓았다간 결국 무너질 테니까.
생각에 빠져 있던 문수르.
“문수르 경.”
“예, 무슨 일입니까?”
“자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이제르트 자작의 부름에 문수르는 별 다른 의구심 없이 이제르트 자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2.
불스 백작가에서 편지가 왔다.
‘이르군.’
빅토리안 공작의 파티는 여름이라고 했다. 여름이라고는 해도, 여름이 살짝 꺾이는 8월 무렵이라고 했다. 지금이 3월이 되었으니, 이런저런 시간을 따져도 서너 달 정도 남았다.
그런데 벌써 편지가 온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나름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불스 백작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의 행동에 어떠한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의미 없이 이러지는 않았을 터.
“문수르 경에게 직접 온 편지라네.”
“저한테 말입니까?”
그리고 이상하게도 편지의 수신인은 문수르다.
문수르는 어디까지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다. 물론 그에게 편지를 보낼 수도 있지만, 영지와 영지 간의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이제르트 자작이 수신이 되는 게 보통이다.
달리 말하면 개인적인 행사라는 소리다.
‘뭐지?’
문수르가 편지를 개봉해 내용을 읽었다. 내용을 읽는 문수르의 표정은 오묘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확신할 수가 없는 표정……. 이윽고 편지 내용 전부를 읽었을 때 문수르는 답을 내렸다.
“자작님, 아무래도 조만간 왕도로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왕도로? 무슨 일인가?”
문수르는 대답 대신 편지를 건네줬다. 이제르트 자작이 잽싸게 편지를 읽었다.
“그렇군.”
이제르트 자작 역시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편지의 내용은 다름 아니라 문수르에게 개인적은 호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호위의 대상은 바로 불스 백작가의 영애인 프리실라 불스였다.
프리실라 불스, 그녀가 왕도에 위치한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할 예정이니, 그 길까지 호위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내용을 보면 이상했다. 불스 백작가에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불스 백작이 정치적 위협을 받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외부인인 문수르의 도움을 요청하는 건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보통 경우라면 거절을 하려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문수르 역시 공사가 다망해 바쁜 몸 아니었던가?
하지만 문수르는 오히려 이번 부탁을 수락하고자 했다.
문수르를 움직인 건 다름 아니라 왕립 아카데미란 단어였다.
‘왕도에 위치한 왕립 페르코 아카데미에 대해서는 이미 정보를 모은 상황이다.’
왕립 페르코 아카데미. 말 그대로 콩탄 왕국이 돈을 들여 만든 교육기구다. 주요 목적은 귀족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을 펼치는 거지만, 평민들 역시 입학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리고 왕립이고 콩탄 왕국이 돈이 없는 나라인 것도 아니기에 적지 않은 평민들이 차별을 받지만, 나름 고품질의 교육을 받는 장소였다.
콩탄 왕국 내 영지 곳곳에서 관리 혹은 직급은 낮지만 실력 있는 기사로 활동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페르코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한 번쯤 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인재를 구하고 싶어 했던 문수르에게는 언젠가는 기필코 가봐야 할 장소였다.
그러나 왕립 아카데미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구경 가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이 중요한 상황에서 영지를 떠나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반은 충분히 다진 상황이다.
오히려 영지를 위해서 한 번 다녀올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 역시 그런 문수르의 의중을 금방 파악했고 또한 이해했다. 이제까지 인재가 필요하다고,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추천해달라고 문수르가 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잘 됐군. 페르코 아카데미에는 내 아들 녀석도 있으니…… 아들 녀석이 자네를 참 보고 싶어 하네.”
“그렇습니까?”
“잘 다녀오게. 영지 일은 걱정 말고. 내가 무능하나, 자네가 이룩한 걸 망칠 정도는 아니니 말일세.”
“이제르트 자작님이 무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이제르트 자작령 내에는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여러 말은 필요 없었다.
문수르는 필요했고, 이제르트 자작은 이해했다. 이 둘의 합의가 끝났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문수르가 짐을 싼 채 곧바로 불스 백작가로 향했다.
‘이번 일, 내가 필요한 게 있어서 가는 거지만 불스 백작의 의중은 아직 모르겠군.’
왕립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건 예전부터 준비했던 일들 중 하나이기에 기회가 왔을 때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스 백작이 대체 왜 굳이 문수르에게 자신의 딸이 왕립 아카데미까지 가는 길의 호위를 맡겼는지, 그건 이해할 수 없었다.
문수르를 너무나도 신뢰해서? 그런 이유는 결코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역시 합리적인 이유가, 어떠한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일 텐데…….
‘날 데려가서 얻는 이익이 뭐지?’
솔직히 문수르는 불스 백작이 이번 일을 통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단순히 빅토리안 공작가의 파티를 앞두고 관계 개선을 하고 싶은 건가?’
물론 몇 가지 추측되는 건 있다.
사실 불스 백작가와 이제르트 자작가가 그다지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힘들다. 불스 백작가가 이제르트 자작가에 적지 않은 금전적 지원을 해준 건 분명하지만 전부 이유가 있는 지원이었다. 호의라기보다는 계산에 의한 지원이었다.
여기에 불스 백작가는 이제르트 자작가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던 경력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르트 자작가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불스 백작 입장에서는 이런 이제르트 자작가와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탐탁지는 않을 터. 앞으로 한 배를 탄 입장인데 이런 탐탁지 않은 사실을 안고 품은 채 계속 항해를 하기란 솔직히 좀 그렇다. 더군다나 만약 배가 좌초되면, 이제르트 자작가보다는 불스 백작이 잃는 게 더 많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전략적, 정치적 핵심이 될 문수르와의 관계 개선이 불스 백작에겐 가장 시급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 양반이 나한테 아부할 것 같은 타입은 절대 아닌데 말이야. 뭐 나야 나쁠 건 없지만.’
사실 정말 불스 백작의 의중이 이제르트 자작가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거라면 이제르트 자작가나, 문수르에게는 나쁠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절이라도 해주고 싶다. 어쨌거나 앞으로 얼마 동안은 이제르트 자작가가 불스 백작가로부터 받을 것이 더 많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나쁠 건 없군.’
문수르가 불스 백작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건, 달리 보면 이번 일을 통해 불스 백작이 얻을 이익의 종류가 그다지 많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다는 의미다. 혹여 있다고 해도, 그 이익이 이제르트 자작가에 피해를 주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훗.”
순간 문수르는 웃음이 나왔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기면 걱정부터 하게 되고, 의심부터 하게 되는군.”
좀 더 부드럽게,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을 일이다. 그러나 문수르는 결국 자기 혼자 고민하고, 걱정했으며 결과적으로는 불스 백작을 의심했다.
참으로 피곤한 생각이다.
‘나도 회장님이 원하신 대로 변해가는군.’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한석균, 그가 문수르에게 원했던 모습이기도 했다. 한석균은 원했다. 문수르가 모든 일을 의심하기를, 그럼으로써 이제르트 자작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없기를 말이다.
“뭐, 그럼 이제 내가 걱정해야 하는 건 과연 불스 백작가의 영애의 성격이겠군.”
“아버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야?”
적당히 볼륨을 살린 긴 머리칼. 활기가 샘솟는 듯한 하얀 피부.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눈에 띌 정도로 미색. 단지 살짝 치켜 오른 눈 끝이 성깔이 보통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한 소녀의 이름은 프리실라 불스.
바로 불스 백작가의 영애였다.
그녀는 일찌감치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날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멋진 입학식을 꿈꾸었다.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식은 귀족들이 서로의 힘을 뽐내는 자리였다. 대놓고 뽐내는 건 아니지만, 명성 높은 기사들을 호위로 대동해 가문의 저력을 보여주고는 했다.
그렇기에 프리실라는 아버지인 불스 백작에게 부탁했다.
브라스 경, 콩탄 왕국 최고의 자유기사로 불리는 그를 호위기사로 서게 해달라고.
브라스 경 정도면 어디 가서 꿇릴 이름값은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행적이 불분명했던 자유기사 브라스 경이 불스 백작 휘하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불스 백작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브라스 경은 네 치장을 위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기사가 아니다!”
불스 백작이 브라스 경을 영입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 그 노력을 고작 딸아이의 허세를 위해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건 불스 백작의 성정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불스 백작의 성정을 모를 딸이 아니었기에, 프리실라는 입만 삐죽 내밀뿐 뭐라고 항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거 웬걸?
처음 들어보는 기사가 호위기사로 붙는다고 했다.
“문수르? 대체 이 사람이 누구야?”
문수르란 이름. 들어본 적도 없다. 이제르트 자작가란 조금만 영지의 기사라고 하는데…… 이제르트 자작가는 들어본 적이 있다. 모를 리가 없다. 불스 백작령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영지니까.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에도 나름 유명한 기사가 있었다.
엘렉 포비어.
젊은 나이에 이제르트 자작가를 이끄는 기가스 파일럿! 그의 명성은 콩탄 왕국 전체를 울릴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기사들 명성에 관심이 깊은 이라면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엘렉 포비어도 아닌 문수르란 인물이 온다고 한다.
솔직히 기사인지도 모르겠다. 성과 이름, 그러니까 풀네임을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아버지는 날 망신주려고 이러는 걸까?”
프리실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딸아이의 입학식에서 딸아이의 체면을 살려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망신을 주려고 하다니!
“안 되겠어. 어떻게든 실비아는 데려가야 했어.”
결국 그녀는 아버지와 담판을 짓기로 했다.
조인 실비아, 불스 백작 휘하의 유일한 여기사로 호위를 담당하는 기사였다. 한 명뿐인 여기사라 그녀의 임무는 불스 백작이 아닌 불스 백작가의 여성들…… 가장 최우선적으로는 불스 백작의 아내를 밀착 호위한다. 프리실라는 그런 그녀를 대동하고 싶었지만 앞서 말한 이유, 불스 백작은 아내의 신병을 위해서 거절했다.
그러나 프리실라는 이대로 가다가는 쪽팔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심중을 알았는지, 불스 백작은 프리실라의 왕도행에 실비아 경을 포함시켰다.
그로부터 얼마 후…….
문수르가 불스 백작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