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5.
계약서 작성이 미뤄졌다. 이유는 말론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계약서의 내용은 단순한 몇 개의 거래에 대한 게 전부였다. 말론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계약서.
하지만 동맹이란 단어가 말론의 마음을 바꾸었다.
‘동맹.’
단순히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같이 걸어가는 것. 말론은 그것이 동맹이라 생각했다.
‘과연 인간과 드워프가 동맹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인간과 드워프는 적이었다. 한 쪽은 한 쪽을 노예로 생각하고, 다른 한 쪽은 살기 위해, 착취당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도망친다.
물론 칼란 왕국이란 예외가 존재하긴 한다.
‘그래, 칼란 왕국이 있긴 하지. 하지만 칼란 왕국은 아주 독특한 경우일 뿐이지.’
하지만 칼란 왕국은 케르빈 월드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소수에 불과하다. 소수의 의견이고, 소수의 의미다. 결코 세상 전체를 대표하는 의견이 아니라는 거다.
결국 인간과 드워프는 궁극적으로 동맹을 맺을 수가 없을 지도 모른다.
단!
‘어차피 지금 나도 인간과 동맹을 맺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제르트 자작이란 자는 인간을 대표하는 자가 아니고 나 역시 드워프를 대표하는 자가 결코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가와 호우투 부족 사이의 관계는 세상의 모든 인간과 드워프의 관계가 아니다.
말 그대로 소수, 아주 예외의 경우라고 할 수 있을 터.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칼란 왕국의 경우처럼 동맹을 맺는 게 절대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말론은 각오했다.
‘호우투 부족을 설득해야 한다.’
이건 정말 좋은 기회다. 말론은 어디 한 번 문수르란 인간과 이제르트 자작이란 자에게 부족의 운명을 걸어보기로 했다.
물론 당장은 아니다.
‘일단 부족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좀 더 인간들을 알아야겠지.’
문수르나 이제르트 자작이나 보통 인간들과는 다르다. 나름 믿을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들의 사회는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그걸 말론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우려해도 나쁠 건 없다. 도박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으니까. 확실한 것에 배팅을 하는 게 좋으니까.
‘이곳에서 지내보다. 이들과 지내다 보면 그들의 속마음을 알게 되겠지.’
말론이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이제르트 자작가에 드워프 말론이 머물기 시작했다.
문수르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말론이 머물겠다고 확답을 내리는 순간 상황을 파악했다.
‘당장 부족 전체를 데려오진 않겠다, 이거군.’
눈치 백단의 문수르다. 그에 맞는 계획을 다시금 세우는 건 문수르에게 일도 아니었다.
“뭐, 좋아!”
계획도 다시 세운 문수르. 그런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말론에게 제작을 부탁하는 게 아니었다.
‘결국 호감을 사야 하는 거지.’
문수르는 작업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이런 날이 올 것에 대비해 꾸준히 작업실을 만들고 있었다. 물론 그 작업실이란 드워프를 위한 작업실이었다. 단순히 작업실 하나를 만들고 덩그러니 드워프에게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물품들 드워프의 신장에 맞추어 만들고, 배치하고, 설치한 작업실을 의미한다.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그 작업실을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드워프들이 싫어할 것 같진 않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문수르의 예상대로, 처음 말론에게 그 작업실을 소개했을 때 말론의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건…… 마치 우리 부족의 대장간하고 비슷하군.”
드워프들은 딱 보면 안다. 단순히 탁자 따위를 보더라도 인간들이 쓰는 것보다 그 높이가 낮다. 의자도 마찬가지! 애들 놀이를 위해 만든 게 아니라면 드워프를 위해 만든 것이다.
말론의 마음이 여기서 한 번 흔들렸다. 세상천지에 드워프를 위해 무언가를 맞춤 제작하는 건 드워프 밖에 없었거늘…… 인간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문수르가 처음부터 말론에게 제작을 의뢰한 건, 당장 영지에 필요한 물품이 아니었다.
“이 설계도 대로 작업이 가능하시겠습니까?”
“음? 이게 무언가?”
“말론 님이 앞으로 하실 일에 큰 도움이 될 도구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보다 효율적인 작업을 위한 밑준비! 공장으로 따지면 가장 중요한 기계설비를 만들고자 하는 게 문수르의 첫 번째 목표였다. 더불어 앞으로 말론이 사용하게 될 기계이기도 했다.
물론 어스 월드의 그것처럼 엄청 복잡한 기계는 아니다. 무슨 반도체를 만드는 것처럼 대단한 기계라기보다는, 중고등학생도 충분히 이해할 원리를 기반으로 만든 단순한 기계들…… 하지만 어스 월드의 문명 대부분이 그 단순한 기계들로부터 시작됐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단순하긴 한데…… 아무래도 힘이 좀 들겠군. 그리고 이런 식의 정밀한 부품을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걸세.”
“그렇습니까?”
“시간이 걸려도 괜찮겠나?”
그 물음에 문수르는 속으로 크게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이걸 만들 수만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아무래도 좋다.’
이제까지 가슴에 뭉쳐 있던 응어리가 단숨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말론은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은 순수하게 말론 혼자서 진행했다. 처음에 문수르는 사람들 몇 명, 특히 기가스의 유지 보수를 맡았던 정비공을 도우미로 붙이려고 했지만, 그만뒀다.
‘괜히 인간을 붙이면 기술을 빼앗으려하는 걸로 비춰질 수도 있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게 낫다.’
말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한편, 문수르는 말론의 영입을 기점으로 준비했던 모든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울이 끝나간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올 것이고, 그러면 이제르트 자작은 도약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농기구를 보급할 것이고, 새로운 작물을 재배할 것이며, 법도 새로 제정할 것이다. 그뿐인가? 많은 인재들을 육성해야 한다.
준비는 다 끝났다.
단지 딱 한 가지 문제는…….
‘사람이 없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
결국 사람이 없다. 영지민이 있어야 개중에서 병사를 차출할 수 있고, 나름 똘똘한 사람들이 있어야 그들을 가르쳐서라도 관리로 써먹을 수 있는데, 과연 누가 테블스 산에 온단 말인가?
‘결국 이 부분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된다.’
강제로 사람을 납치할 수 없는 이상, 정치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여차하면…… 다른 영지와 영지전을 벌여서라도 그 영지를 흡수 합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다각도로 이제르트 자작령의 부흥을 꾀하는 문수르. 그러나 그런 그는 조만간 다시 이제르트 자작령을 떠나야만 했다.
불스 백작, 그와 함께 빅토리안 공작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6.
불스 백작은 자신의 손에 잡힌 악마의 계약서를 보며 묘한 웃음을 입가에 짓고 있었다.
‘최소한의 여건은 마련된 거로군.’
대체 불스 백작은 악마의 계약서를 이용해서 어떤 방법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려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중앙정계의 구조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중앙정계라고 해서 특별히 무슨 기구가 있거나, 하는 건 아니다. 중앙정계는 말 그대로 정계의 주류를 의미한다.
이 주류는 막강한 힘을 가진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심은 막강한 귀족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파벌은 사교 파티 등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즉, 그 사교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게 되면, 그 과정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귀족이나 그 측근의 눈에 들게 되면 그게 바로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들이 아무 귀족이나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중앙정계라 불리는 친왕파 파벌들은 이미 과포화상태다. 보통 귀족들은 그들이 주최하는 사교 파티에 참석할 자격, 쉽게 말해서 초대장조차 받지 못하고는 한다.
만약 이제르트 자작을 무너뜨렸다면, 자연스럽게 친왕파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불스 백작이 원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의 계약서를 이용한다면? 일단 논공행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왕이 직접 상을 내릴 것이다. 그 상 자체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 핵심은 지금 중앙정계의 주류가 친왕파 귀족들이라는 것이다. 왕이 상을 줄 정도의 인물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좀 그렇다. 거기에 흑마법사를 잡았다고 하니, 무용담도 있을 테고,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생길 터. 몇 개의 사교 파티에서 초대장이 날아올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주류에 편입되기 위해서 불스 백작이 적당한 정치적 능력이 필요한 거지만, 불스 백작이 그 정도 준비도 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다.
‘오러 마스터는 좋은 가십거리가 되겠지.’
여기에 귀족들의 시선을 끌 만한 소재가 하나 더 생겼다.
오러 마스터!
현재 콩탄 왕국에는 단 두 명의 오러 마스터만이 존재한다.
그 중 한 명은 콩탄 왕국 출생의 제이머스 후작이다.
다른 한 명은 콩탄 왕국 출신이 아닌 제국 출신의 루이 노믹스란 자로, 현재 필로스 왕의 사위다.
제이머스 후작은 당연히 콩탄 왕국 출신으로 콩탄 왕국의 오러 마스터지만, 루이 노믹스는 말 그대로 제국이 콩탄 왕국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그리고 필로스 왕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파견된 오러 마스터에 가깝다.
때문에 지금 콩탄 왕국 내에서 두 오러 마스터는 보이지 않은 곳에서 경쟁구도를 형성 중이다.
여기에 오러 마스터 한 명이 더 추가된다면?
‘아무리 시대가 기가스의 시대라고 해도, 오러 마스터는 충분히 유효한 전력이지.’
불스 백작, 그가 현재 정쟁의 구도를 흔들 수 있는 힘을 쥐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문수르란 카드를 쥐는 게 훨씬 낫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불스 백작은 왜 문수르를 포섭하려 하지 않는 걸까? 이제르트 자작에게서 문수르를 빼앗는 게 최선일 텐데?
‘문수르, 그 녀석은 절대 내 기사가 되지 않아.’
그건 불스 백작이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불스 백작은 무능력한 자가 아니다. 또한 사람 보는 안목이 제법이다. 그런 불스 백작의 눈에 문수르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자였다.
‘그래서 매력적이지.’
문제는 다른 귀족들에게는 이런 안목이 있을 리 없다는 의미. 그들은 분명 나설 것이다. 문수르를 포섭하기 위해서, 그를 자신이 기사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겠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로비가 들어올 것이다.
문수르에게?
아니다.
‘후후후.’
불스 백작에게 오는 거다. 문수르를 데려온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불스 백작이니까.
그럼 이야기는 끝이다. 더군다나 조만간 폭풍이 불어 닥칠 콩탄 왕국의 정세에서 믿을 만한 건 절대적인 힘! 절대적인 폭력뿐이다. 지금의 불스 백작은 외딴 곳의 나름 이름 있는 귀족에 불과하지만, 훗날의 불스 백작은 정쟁에서 절대 뺄 수 없는 핵심 귀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른다면…….
‘공석이 된 후작의 자리 하나, 내가 차지하겠다.’
불스 백작가는 불스 후작가로 역사에 길이 남겠지.
7.
문수르가 만든 새로운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새로운 농법들도 보급됐다.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파격이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령의 영지민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이제르트 자작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다.
동시에 또 하나의 소득은 다름 아니라 용병들의 일부를 정규군으로 전향했다.
처음 그걸 요구한 건 용병들이었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변화를 그들이 눈치 챈 것이다.
문수르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병사 1명의 유지비보다 용병 1명의 유지비가 더 비싸다.’
용병이 영지의 정규군에 편성되면 당장 유지비가 덜 들 뿐더러, 영지의 인구도 늘어나는 효과가 생긴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용병들을 일반 사병들처럼 대우해주면 기존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생길 수 있었기에,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바쁘다, 바빠.”
모든 것이 파격적인 일들 뿐이었기에, 그 일을 주도하고 관리할 수 있는 건 문수르 밖에 없었다. 때문에 문수르는 몸이 서너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여기에 최근 들어 날이 좀 풀리자 몬스터들까지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후우!”
한숨부터 나온다. 하지만 문수르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조만간 빅토리안 공작의 파티에 간다.’
문수르,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불스 백작이 해준 그 말을 말이다.
그리고 문수르는 불스 백작의 의중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나를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겠지?’
불스 백작은 문수르를 이용해먹으려 할 것이다. 문수르는 씨익, 웃었다.
‘그럼 내쪽에서도 이용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