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83화 (82/293)

83화

<20화. 말론 호우투.>

1.

당장 도끼가 날아오진 않았다. 문수르는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쁘지 않군.’

이런저런 수작을 부린 게 제법 도움이 된 모양이다. 적어도 대화할 환경은 조성됐으니까.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상황이 묘하긴 하지만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문수르라고 합니다.”

문수르는 묘한 화술을 쓰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한 것이다. 말론은 그런 문수르의 손을 잠시동안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문수르의 손을 잡진 않았다.

‘인간이다.’

긴장의 끈을 살짝 풀었던 말론이 다시 그 끈을,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마을의 위치가 들켰다.’

더군다나 지금은 긴급 상황이었다. 문수르란 인간에게 부족의 마을로 들어가는 토굴 입구를 들킨 것이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다름 아니라 토굴 입구를 부수는 것이었다. 입구는 여기 하나가 아니다. 입구가 무너져도, 안에 있는 부족이 피해를 볼 일은 없다.

반대로 이대로 입구를 놔두었다가 문수르란 인간이 토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끔찍하다. 문수르는 강자다. 말론도 어찌하지 못했던 오크 좀비들을 장난처럼 다루던 강자! 호우투 부족도 약하진 않지만, 문수르와 싸우게 된다면 그 피해가 적지 않을 터.

스윽!

말론은 곧바로 토굴을 무너뜨릴 준비를…… 그리고 문수르를 살피며 틈을 노렸다.

그때였다.

“아, 그보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오크 좀비를 부리던 흑마법사는 처치했습니다.”

“음!”

그 말은 너무나 기습적이면서도 위력적인 것이었다. 토굴을 무너뜨리려던 말론이 살짝 움찔할 정도였다. 그런 말론의 움찔하는 반응을 놓칠 문수르가 아니다.

‘좋아.’

사실 이 말은 의도한 거였다. 만약 드워프가 토굴 밖으로 나왔을 때 그리고 문수르와 조우했을 때 가장 먼저 그 드워프가 취할 행동은 하나 밖에 없을 테니까.

‘이 드워프는 그나마 나랑 구면이라서 이렇게 대화부터 시작된 거지, 다른 드워프였다면 자기 목숨 걸고 토굴 입구부터 무너뜨렸겠지.’

나름 재수가 좋았다.

하지만 말론 역시 문수르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게 아닌 이상, 토굴 입구를 무너뜨릴 가능성은 높았다.

사실 그렇다고 해서 토굴 입구가 무너지는 게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드워프 정도라면 이미 여러 개의 입출구를 만들어 두었을 테니까. 문수르가 드워프 학살 혹은 모든 드워프를 포획해 노예로 부리는 게 목적이 아닌 이상 입구 하나가 무너지는 건 아무래도 좋다.

그래도 일단 험악한 분위기보다는 우호적으로,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토굴 입구가 멀쩡한 상황으로 대화가 끝나는 게 괜찮을 터.

그래서 흑마법사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적어도 말론이 자신을 괴롭히던 흑마법사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진 않을 터.

“흑마법사를 잡았다고?”

실제로 말론은 꽤나 큰 반응을 보였다.

‘오케이.’

문수르는 속마음을 감춘 채,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인가? 정말 자네가 오크 좀비를 부리는 흑마법사를 처치했단 말인가?”

“맞습니다.”

“무슨 이유로?”

“별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모시는 주군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처치할 의무가 있었을 뿐이지요.”

말론은 꽤나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흑마법사 때문에 지금 마을을 다시 옮기니, 마니 이야기가 오고 가고 그 때문에 골치를 썩히는 중 아니었던가?

그런데 흑마법사가 죽었다니? 그럼 이야기가 달라진다. 굳이 마을을 옮길 필요가 없어진다.

‘아, 아니지.’

그 순간 말론이 문수르를 다시 보며 침음을 흘렸다.

문수르가 마을의 위치를 알았으니, 어떻게든 마을을 옮기긴 해야할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 인간을 처치한다면 모를까.’

물론 문수를 죽이면 걱정은 깔끔하게 사라지겠지만, 말론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자신도 어찌하지 못할 흑마법사를 처치한 인간을 처치한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보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드디어 진짜 작업을 시작하는 문수르!

대화라는 말에 말론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말론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인간하고 대화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장 눈앞의 인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걸 고민해야 하는 판에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문수르도 안다. 그런 말론의 심중을. 이미 드워프에 대해서는 조사할 수 있을 만큼 조사했으니까.

그래서 꺼내든 카드.

“엘프 족과는 대화도 나누고, 한 달 동안 엘프 족의 마을에서 지냈지만, 이렇게 드워프 분들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참 신선한 경험입니다. 신께 감사라도 드리고 싶군요.”

해맑을 미소를 짓는 문수르의 말은 너무나도 순수하게 느껴졌다.

- 대단한 연기력이십니다.

그 꼴이 참 보기 가당찮았는지 로이드가 한 마디 톡 쏘았다. 문수르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좀 한 연기력하지.’

반면 말론의 표정이 다시 변화했다.

“엘프 족? 인간이 엘프 족과 같이 지냈단 말인가?”

엘프 족 역시 드워프 족 이상으로 인간을 배척한다. 아니, 드워프 족보다 심한 경우가 더 많다.

드워프 족이야 인간에게 노예로 끌려가면 노동력을 착취당하지만, 엘프들은 성을 착취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어느 것이 더 치욕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터.

그런데 엘프 족과 같이 지냈다고? 인간이?

“지금 나와 거짓말을 하고 싶다, 이건가?”

믿을 수 없다.

말론이 화를 냈다. 그런 말론의 모습에 문수르는 당황한 듯…… 아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연기했다.

“아, 아닙니다. 몇 달 전 탈라트 부족이 저를 필요로 했기에 일을 도와줬을 뿐입니다.”

“탈라트 부족? 폐욤 족장께서 계시는?”

“아, 폐욤 족장님을 아십니까? 좋으신 분이지요. 현명하시며,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하고.”

“네가 어찌 폐욤 족장님을 아시느냐!”

“그분께서 탈라트 부족의 신목을 치료할 방법을 제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방법을 알려드렸지요. 그게 인연의 전부입니다.”

문수르는 여기서 살짝 웃었다.

“별 거 아닌 인연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소중한 인연이지요.”

그 웃음이, 이 말이 포인트였다.

이 정도 화법, 화술이라면 말론은 적어도 문수르를 굉장히 좋은 인간이라 여길 것이다.

엘프가 인정했으니, 적어도 아주 사악한 인간, 엘프나 드워프를 잡아다가 노예로 쓰는 부류는 아니라고 여길 터.

물론 진위여부가 확인된 건 아니다. 그래서 문수르가 굳이 연기력을 선보이는 것이다. 말만 해서 통했으면, 굳이 이렇게 귀찮게 연기를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쉬운 놈이 알아서 해야지.’

어쨌거나 아쉬운 건 문수르인 만큼, 문수르가 수고하는 수밖에.

“음……!”

그런 문수르의 빛나는 노력 덕분인지 문수르를 바라보는 말론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말론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다.’

말론은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불신, 그것은 단순히 좋은 인간 한 명을 만난다고 해서 어떻게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자신의 실수로 자신만 피해를 입으면 모르겠지만, 지금 말론이 실수를 하게 되면 부족 전체에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말론이 해야 하는 일은?

꽈릉!

순식간이었다.

말론이 나무뿌리를 내리찍자, 나무뿌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쪼개졌고, 나무뿌리가 쪼개지자 토굴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일부러 이렇게 설계된 것이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입구가 무너지도록, 처음부터 그리 설계한 것이다.

문수르는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봤다.

‘좋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말론의 이런 반응…….

‘뭐, 나쁘진 않아.’

이미 예상한 바다. 때문에 문수르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던 상황이었기에,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아…… 일단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것을 보게 되서 애꿎은 입구를 부수게 되었군요.”

말과 함께 문수르의 고개가 내려갔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다짜고짜 말론에게 사과를 하는 문수르. 사과의 이유는 뻔했다. 자신이 지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보게 된 탓에 입구를 부쉈으니, 미안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사과가!

‘이…… 이 인간은…….’

확실한 비수가 되어 말론의 심장에 꽂혔다. 이제까지 쌓이고 쌓이던 문수르의 연기력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조금 다른 인간이군.’

이 순간 말론은 문수르에 대한 적의 대신 호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말론이 이제까지 품었던 생각들…… 호우투 부족의 미래에 대한 우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폭발했다.

‘당장 내 할 일은 한 셈인가?’

입구가 무너졌으니, 문수르란 인간이 지하 마을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무너진 입구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다시 팔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당장 호우투 부족은 안심이다. 더군다나 흑마법사도 죽었다고 하니……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흑마법사의 위협도 사라진 이상 더 이상 걱정할 게 있을까?

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말론은 호우투 부족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고민해야하는 건 자기 자신의 일뿐이다.

“일단 내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 한 행동이네. 자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네.”

처음으로 호의가 담긴 말을 내뱉는 말론의 모습에 문수르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이 해맑은 미소도 연기다.

“감사합니다.”

“흥. 인간치고 독특하군.”

“하하, 제가 그런 이야기는 자주 듣습니다. 탈라트 부족의 마을에서 지낼 때도 자주 들었지요. 보통 인간과는 다르다고 하시더군요.”

물론 탈라트 부족에서 그딴 말을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냥 이상한 인간 취급 받았고, 감시 받았지.

하지만 당장 탈라트 부족의 관계자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탈라트 부족과도 좋은 관계 아닌가?

“그보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자네가 흑마법사를 죽였다고 했는데…… 그 증거가 있나?”

“아, 이거 말입니까?”

문수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악마의 계약서를 넣은 통을 꺼냈다. 그 순간 그 통을 본 말론의 눈빛이 빛났다.

‘뭐지?’

묘한 통이다.

어떤 재질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무인가? 아니다. 나무보다 훨씬 표면이 깨끗하다. 그뿐인가? 형태가 자연스럽다. 마치 구운 그릇의 그것처럼, 이음새 부분 따위가 없다.

거기에 무척이나 가벼워 보인다.

이윽고 문수르가 통해서 악마의 계약서를 꺼냈다.

“이게 그 흑마법사를 잡고 얻은 악마의 계약서입니다.”

그러나 말론의 눈은 악마의 계약서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말론의 시선은 문수르의 통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문수르의 입가에 이내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플라스틱은 처음 보겠지.’

지금 문수르가 쓴 통의 재질은 다름 아니라 플라스틱이다. 케르빈 월드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소재다.

본래는 서바이벌 키트 관련 부품을 넣는 통이었다가, 이렇게 재활용을 하는 중이다.

‘이래서 드워프란 건가?’

그런 플라스틱이 말론의 관심을 제대로 끈 모양이다.

“자네 그 통…….”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던 말론이 결국 말을 꺼냈다.

“잠깐 내게도 보여줄 수 있는가?”

“아, 그건…….”

잠시 뜸을 들이는 문수르. 그는 뜸을 들이는 와중에 천천히 말론의 표정을 살폈다.

말론은 표정으로 말했다.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해 줘!

문수르는 그런 말론의 표정에 대답해줬다.

“물론이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