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7.
“또 다시 그놈이군.”
1만의 오크들을 이끌고,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격했던 오크들의 왕 또투.
그런 또투를 마치 자기 수족처럼 부렸던 흑마법사.
그의 앞에는 다크 엘프 한 명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다크 엘프를 바라보던 흑마법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놈이…… 그놈이 모히를 죽이다니.”
모히.
그는 테블스 산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흑마법사의 이름이었다.
테블스 산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흑마법사들이 모습을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 제국조차 손을 대기 꺼려하는 혹독한 땅, 테블스 산은 반대로 모든 이들에게 쫓기는 흑마법사에게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낙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더불어 테블스 산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흑마법사들은 대부분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어설픈 실력으로는 테블스 산이라는 혹독하고, 잔혹한 땅에서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재미있군, 재미있어.”
단 한 명!
오직 단 한 명만이 테블스 산에서 왕처럼, 신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갑자기 흑마법사를 무리해서 사냥할 이유가 없을 텐데……, 오호라. 그렇다면 흑마법사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겠군. 왜 흑마법사를 잡으려고 할까…… 딱히 잡으면 뭘 주는 것도 아닌데…… 아, 그렇지. 악마의 계약서를 주지. 흑마법사를 잡았다는 흔적. 전공(戰功)의 흔적…… 오호 전공이 필요하다는 거군. 왜 필요할까? 그렇지, 그래, 드디어 콩탄 왕국의 정세에 변화가 생긴 거군.”
중얼중얼.
혼잣말을 지껄이는 이 흑마법사의 정체.
카라카크!
세상에서 악마 제조사라 불리며, 수십 년 동안 무수히 많은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엄청난 능력과 섬뜩한 악명(惡名)을 가진 존재!
그만이 테블스 산의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야심은……, 카르카크의 목표는 고작 테블스 산의 멍청한 몬스터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 무엇보다 안정되있던 콩탄 왕국의 정세가 변한다는 건, 콩탄 왕국이 흔들리단 이유겠지. 흐흐흐, 콩탄 왕국이 흔들리면 제국도 움직이겠지.”
제국!
“흐흐, 드디어 내 숙원이 달성될 때가 온 것인가?”
그것이 바로 카라카크, 그 무시무시한 흑마법사가 노리는 상대였다.
8.
“이러니 발견을 못했지.”
문수르는 거대한 나무 아래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수르의 앞에는 토굴 하나가 있었다. 큼지막한 나무뿌리 아래로 난 토굴은 대충 보면 그냥 작은 구덩이다. 아마 그 누구도 이 구멍이 수백 명이 한 데 모여 사는 드워프 부족의 거주지로 가는 입구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엘프는 나무 안에 살고, 드워프는 땅 속에 살고.”
GPS시스템이란 희대의 도우미를 두고도 엘프나 드워프를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GPS시스템에 투시능력이 달리지 않는 이상,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드워프나 엘프를 찾는 건 결코 불가능할 테니까.
“그래도 다행이군.”
이제라도 이렇게 찾게 되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흔적조차 없었다면, 문수르가 제 아무리 노력해도 테블스 산에서 드워프 족을 자력으로 찾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럼 이제 남은 건…….”
그러나 문수르는 곧장 토굴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이 토굴 안에 들어가서 드워프들과 담판을 짓고 싶지만…… 그건 좀 그렇지.’
그건 그다지 좋지 못한 선택일 테니까. 인간에게 적대적인 드워프 족의 마을에 대뜸 인간인 문수르가 쳐들어가면, 그런 인간을 반길 드워프는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죽기 살기로 덤빌 것이다. 드워프의 괄괄한 성정을 생각하면, 대화는 결코 없을 것이다.
‘나오길 기다린다.’
때문에 문수르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들어가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다. 언제 나올 지, 그건 누구도 모르는 거지만 그래도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 후에는?
드워프를 만난 후에는? 그때는 과연 뭐를 해야 할까? 배타적으로 나오는 드워프 족을 설득할 무언가가 문수르에게는 있는가?
‘거래를 해야겠지.’
드워프와 정서적 교류가 당장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그리 쉬웠으면 이런 고생도 안 했을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
문수르가 지금 드워프를 상대로 할 수 있는 협상은 무조건 거래 밖에 없다. 그리고 확실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드워프의 거주 지역 확보 및 안전 보장.’
사실 그래서 이렇게 최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무식하게 나섰다가는 별로 없는 호감은 아예 사라지고 비호감만 남을 테니까.
“그럼 기다려 볼까?”
문수르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드워프 부족의 구조는 엘프 부족과 비슷하다. 특히 족장을 우두머리로 섬긴다는 점이 가장 유사하다. 하지만 족장의 권한에 대해서는 엘프와 드워프 사이에 차이가 많다.
엘프는 족장의 권력이 절대적이다. 족장이 하라면 해야 한다. 싫으면 부족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드워프는 족장의 권력이 그렇게까지 절대적이지 못하다. 족장은 어디가지나 주변의 의견을 조합해 결과를 만드는 자리지, 자기 혼자 의견을 내고, 결론을 내는 자리가 아니었다.
언뜻 보면 드워프들의 시스템이 훨씬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꼭 그런 건 아니다.
“아니, 당장 거주지를 옮기자는 게 말이 되는가?”
“말론이 위험하다 했으니, 옮기는 게 낫지.”
“그게 말처럼 쉬우면 이렇게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럼 다른 대안은? 대안도 없으면서 그리 말하는 건가?”
“흥! 그까지 오크 좀비 따위는 내 도끼로 박살을 내면…….”
“개인의 호승심과 용기에 부족의 미래를 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여러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에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드워프들은 장인이라 불린다.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이러니, 긴급한 상황에서도 쉽게 결론이 나질 않는다.
말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게 문제지.’
드워프 족의 문제점이다. 나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건 좋지만, 이런 중요한 순간에는 오히려 그게 발목을 잡는 거다.
‘어찌 해야 하나…….’
부족이 위험하다.
지금 머무는 곳에 계속 머물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흑마법사와 충돌하게 될 것이다.
답은 두 가지다.
흑마법사를 무찌르거나 혹은 드워프들이 떠나거나.
그러나 흑마법사하고 드워프는 너무 궁합이 좋지 못하다. 아니, 애초에 마법사하고 드워프는 궁합이 최악이다. 드워프들 특유의 느린 기동력 때문에 마법사들 앞에서는 쥐약일 수밖에.
“끄응!”
위기는 코앞까지 왔는데, 결국 논쟁이다.
‘차라리 엘프가 낫지!’
이럴 때면 엘프 부족이 부럽다. 족장이 결론을 내리면, 모두들 군말 없이 따르니까.
‘이러니 인간들에게 쫓겨 다닐 수밖에.’
그리고 이런 드워프 족의 문제점 때문에 인간들에게 사냥이나 당하고, 노예 취급을 받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언제부터인가 말론은 이러한 드워프들의 사회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 이 꼴로 남게 된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기동력, 그것 하나 때문에 드워프가 그 넘쳐나는 광산들을, 광물들을 버린 채 인간들에 쫓기고, 몬스터에 쫓기며 살아야 하는 건가?
그래, 과거에는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드워프가 가진 장인기술이 그 어느 때보다 꽃피울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드워프를 위한 기가스를 만들어야 한다.’
기가스!
인간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골렘!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를, 기준을, 잣대를 뒤바꾼 절대병기!
드워프도 오러를 사용할 줄 안다. 그렇다면 기가스만 있다면, 드워프에 맞는 기가스만 만들 수 있다면 과연 그때 가서도 드워프에게 기동력 따위를 운운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드워프는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가스의 본체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마법!
그리고 이제까지 인간들이 축적한 기술력이다.
사실 기술력은 어디서 훔치기만 해도 금방 익힐 수 있다. 인간들에게는 어렵다고 해도 드워프들에게는 애들 장난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마법이다.
‘엘프 족의 도움을 어떻게든 받으려 했었지만…….’
드워프는 마법에 대한 공부는 할 수 있어도, 막상 마법을 쓰지는 못한다. 본질이 그러하다.
기가스는 마법에 대한 이해는 물론 마법사의 작업이 꼭 필요하다. 마법사가 없이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과거 몇몇 드워프들은 마법을 쓸 줄 아는 엘프 족과의 합의를 통해 기가스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 성공 역시 세상천지에서 단 한 곳, 드워프와 엘프를 자국민으로 인정한 칼란 왕국의 경우다. 그 중간에는 인간이란 교두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왜 그럴까?
사물을 보는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들 수야 있겠지. 수백, 수천 년 간 천천히 합의를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드워프에게도, 엘프에게도 짧은 시간은 아니다.
“끄응.”
머리가 아파진다. 이런 고민을 할 때면 언제나 그렇다. 사실 말론은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놀라운 일이다.
인간이라면 이를 가는 족속들, 그 어떤 인간과도 타협하지 않는 드워프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이 드워프들 사이에서 주류를 이루는 경우는 없다. 대다수의 이들이 합의를 해주지 않으니까…… 다수결의 합의의 이면에는 소수의 의견을 무시된다는 사실이 있다. 소수는 절대 주류가 될 수 없다.
‘쯧, 나도 많이 미쳤군.’
더군다나 이런 생각을 하는 말론조차,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중에 인간에게 배신 당하고, 결국 노예가 될 게 뻔하다. 이제까지 쌓여온 역사가 증명한다. 인간과는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그건 곧 부족의 파멸이나 마찬가지니까.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다들 좀 쉬고 오시오.”
“그래, 목이나 축이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말론이 딴 생각을 하는 사이, 회의는 흐지부지 정리됐다. 말론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 이렇게 의견이 지지부진한 건, 호우투 부족이 확실한 위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드워프들은 그런 면이 있다. 자기가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면 쉽게 믿지 않는다. 사물의 본질을 중시하는 성정 때문일 것이다.
“후우!”
한숨을 내쉰 말론은 동굴을 거닐기 시작했다.
테블스 산에서 살기 위해 드워프들이 내놓은 방법은 개미처럼 땅굴을 파고 사는 것이었다. 물론 개미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땅속에 인간들의 성조차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번듯한 거주 지역을 만들긴 했지만.
말론은 그런 땅굴 밖으로 나오고자 했다.
‘증거를 가져와야 한다.’
보다 확실한 증거, 흑마법사의 위협이 코앞까지 왔다는 증거를 가져오기 전까지 호우투 부족은 계속해서 논쟁을 할 것이다.
위험하지만 말론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말론이 동굴 밖으로 나갔을 때…….
“응?”
“어?”
말론은 땅굴 입구 바로 앞에서 인간을 보았다. 말론은 처음 인간의 존재를 눈치 채자마자 기겁했다.
“너는!”
그러나 그 인간의 얼굴이, 구면이란 사실에 말론이 살짝 긴장을 풀었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그때 그 드워프가 맞으십니까?”
상대는 바로 문수르, 말론을 도와준 인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