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77화 (292/293)

77화

6.

이제르트 자작가로 돌아가는 길, 그 길 위에서 문수르는 어느 순간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로이드.”

- 예, 주인님.

“지금 GPS시스템에서 여유가 얼마나 되지?”

- 여유는 없습니다. 추가적인 GPS파일럿이 필요합니다.

문수르가 사용하는 GPS시스템 보통의 GPS시스템과는 다르다. 애초에 GPS라는 것 자체가 위성을 이용한 위치추적 시스템이지만, 문수르는 위성을 이용하지 않는다. GPS시스템의 기반이 되는 건 GPS파일럿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소형 비행로봇이다. 비행로봇이 없으면 당연히 상황 파악은 불가능하다. 엄밀히 말하면 GPS라고는 할 수 없다.

문수르는 어스 월드와 케르빈 월드를 오고가며, GPS파일럿을 수시로 추가했지만, 여전히 한계는 확실했다.

“젠장…… 영지에 돌아가자마자 어스 월드에 다녀와야겠어.”

문수르는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이 놓친 것.

‘난 왕국 정세에 대해서 너무 눈이 멀었다. 관심이 없었어.’

불스 백작의 모습…… 솔직히 예상외다.

‘내가 오러 마스터인 걸 알려주면…… 메리트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열렬한 반응을 보이고, 심지어 다음 공작가의 파티에 동행시킨다는 선택지를 제시할 줄은 몰랐다.’

문수르가 가장 놀란 부분. 그건 바로 공작가의 파티, 그 부분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다. 왜? 몰랐으니까.

‘모를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문수르의 목적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반석에 올려놓는 일이다. 그렇다면 알았어야 했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못했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아냈어야 했다. 콩탄 왕국의 정세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문수르는 까막눈, 그 이하 아닌가?

“사람이 필요해.”

결국 여기서 느끼는 가장 큰 공백은 사람이다. 문수르에게는 전 방위에서 활약할 인재가 필요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고…….”

한숨만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영지로 돌아온 문수르.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완전 무장과 전투태세에 돌입한 이제르트 자작령의 병력들이었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

이제까지 몬스터와의 전쟁과는 다른…… 강력한 그리고 훈련된 군대와의 싸움.

군대와의 전쟁은 몬스터와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말이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령은 몬스터와의 전쟁경험만 많을 뿐, 보통 군대와의 전쟁경험은 거의 없다.

어느 때보다 살 떨리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문수르가 온 것이다.

“문수르 경, 어떻게 됐나?”

이제르트 자작의 물음에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제야 이제르트 자작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전쟁은 없으니까. 이제르트 자작이 기사들을 불러 이야기를 전달했다. 상황을 파악한 기사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은 그렇게 마치 소나기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소나기였다.

‘흑마법사를 찾아야 한다.’

문수르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불스 백작이 이제르트 자작을 치는 건 정쟁에 끼어들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멀쩡하려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다른 방법으로 그 자격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그걸 알기에 문수르도 흑마법사란 카드를 꺼낸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흑마법사에 대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투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어.’

성과가 없다.

문수르의 감은 말해준다. 테블스 산에 흑마법사가 있다. 확실하다. 너무 확실한데…….

‘GPS시스템을 너무 맹신한 건가?’

흔적이 발견되질 않는다.

솔직히 문수르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GPS시스템이다. 이 GPS시스템을 이용하면 제 아무리 흑마법사라고 해도 흔적조차 찾지 못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또투부터 역추적을 하다 보면 충분히 흑마법사의 흔적을 찾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이드가 아무리 GPS파일럿들을 움직이면서 테블스 산을 샅샅이 훑어도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투 놈의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또투, 그 엄청난 전쟁을 일으켰던 놈의 흔적마저 지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많다면, 천천히 일을 진행했을 것이다. 다시금 크게 테블스 산을 탐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직접 발로 뛰어야지.’

테블스 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보통 때라면 꿈도 못 꾸는 일이지만, 오러 마스터가 된 지금이라면 모른다.

‘좋아.’

오크들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했고, 조만간 불스 백작이 다시 지원금을 보내줄 것이다. 그 정도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충분히 문수르 없이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7.

문수는 온천 안에 몸을 담갔다.

“아 좋다…….”

온몸 곳곳에 스며들었던 피로가 전부 풀리는 느낌이었다. 머릿속도 새하얗게 변했다. 이제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이 한 순간에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그 어떤 근심걱정도 생기지 않았다.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정말 너무나도 황홀했다. 하지만 그 황홀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 호사도 얼마 안 가겠군.”

조만간 다시 근심과 걱정만 가득한 세계로 떠나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놀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문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획을 짜야 한다.

“아휴.”

절로 나오는 한숨. 문수는 어떻게든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머리끝까지 온천 안에 담갔다.

- 주인님.

그러나 온천물 속에서도 문수는 자유가 아니었다.

‘왜?’

- 곧바로 다음 일정을 소화하셔야 합니다. 오랜 시간 케르빈 월드에서 머무신 탓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로이드는 문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사실 문수는 지금 온천에 몸을 담그고, 할 팔자가 아니었다. 케르빈 월드에서도 문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어스 월드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수는 지금 세계적인 기업의 후계자다.

푸후!

온천에서 나온 문수는 이죽거렸다.

“그래, 당장 해야 할 일은 뭐야?”

-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회장님?”

문수는 곧바로 온천에서 나왔다. 케르빈 월드로 돌아온 직후 한석균은 해외에 출장 중이었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 출장 기간이 꽤 될 거란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직접 얼굴을 마주보는 게 불가능하리라 생각됐었는데, 지금 문수를 기다린다니?

“회장님이 한국에 오신 건가?”

- 아닙니다. 영상 통화로 대기 중입니다.

“그렇군.”

순간 문수는 어스 월드의 과학력을 떠올렸다. 가만 생각하면 굳이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다.

‘케르빈 월드에서 지내다 보니, 이런 감이 사라지는군.’

케르빈 월드에서는 서면을 통한 대화 또는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눠야만 한다. 통화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물론 마법을 이용하면 비슷하게 원거리 대화가 가능하긴 하지만, 그 역시 마법사가 상주해야 가능하다. 마법 아티팩트는 너무 비싸다. 굳이 사려면 살 수는 있겠지만, 그걸 살 돈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나은 상황이다.

“어스 월드에도 오래 머물면 안 되겠네.”

이런 감에 익숙해지면 좋을 게 없다. 문수의 모든 감은 케르빈 월드에 맞춰 살아야 한다.

‘결국 갈 이유밖에 없는 거군.’

아무리 싫어도 문수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케르빈 월드에 가야 한다. 그게 운명인 것이다.

“좋아.”

준비를 마친 문수가 로이드를 불렀다.

“회장님하고 통화 시작하지.”

- 오랜만이군.

“예. 오랜만입니다.”

몇 달만의 만남. 한석균은 그게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비슷하게 그리고 똑같은 휠체어 위에 앉아 있었다.

반대로 한석균이 보는 문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 로이드의 보고는 받았다.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갔더군.

“엘프 족의 도움을 받은 덕분입니다. 그 도움이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겠죠.”

- 그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그러니까 넘어가도록 하지.

넘어가는 의미. 문수는 그 의미에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사실 엘프와의 접촉은 사전에 계획된 게 아니다. 한석균은 분명히 말했다. 엘프는 도움이 안 된다고. 그런데 문수는 그런 한석균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만으로 엘프와 접촉한 것이다.

보통 경우라면 문제될 건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이 문제다. 문수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것도 그냥 위험이 아니라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엘프와 접촉을 시도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과정은 충분히 지적 받아 마땅하다. 벌을 줘도 이상할 게 없다.

한석균은 그걸 그냥 넘어간다는 의미였다.

-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하게.

그러나 경고는 잊지 않는 한석균.

- 그보다 테블스 산에 들어간다고?

“아무래도 이런저런 일의 처리를 보면, 직접 들어가는 게 최선으로 보입니다.”

- 흑마법사라…… 생각보다 골치 아픈 일이 되겠군. 갈 때 서바이벌 키트를 가지고 가게.

“서바이벌 키트? 그런 게 있었습니까?”

문수는 케르빈 월드에 가져갈 것들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다. 그래야 케르빈 월드에서 써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문수가 아는 것들 중에서 서바이벌 키트란 건 없었다.

- 혹시 몰라서 개발 중이던 것이네.

“개발이 끝났습니까?”

- 거의 끝나지. 한 가지 실험만 남았네.

순간 문수는 살짝 불길함을 느꼈다.

“그 실험이 뭡니까?”

- 실전 테스트지.

“제가 모르모트가 되는 셈이군요.”

- 걱정은 말게. 적어도 오러 마스터의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로 위험한 건 아니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안심이 되는 말이다.

“예예, 알겠습니다.”

- 그보다 흑마법사를 잡는 거라면…… 로이드에게 이번 일정은 전부 취소시키겠네.

“예?”

갑작스런 일이다. 문수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그 모든 일정을 취소시키겠다니?

- 이제부터 흑마법사에 대한 진짜 공부를 시작하겠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마법도 공부하도록 하지.

“마법 말입니까? 저 마법 못 쓰지 않습니까?”

- 못 쓴다고 해도, 이해는 해야지. 그래야 흑마법사랑 싸울 때 도움이 될 것 아닌가?

“그, 그렇습니까?”

순간 문수의 눈앞에 기괴한 수식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 한 번, 한석균이 마법의 기본 지식을 문수에게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때 문수는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마법은 단순히 어려운 학문이 아니다. 어스 월드의 인간들은 결코 이해 못하는, 다른 차원의 학문이었다.

그때 문수는 정말 학을 땠다. 다른 건 모르겠어도, 이건 안 되겠다고.

한석균 역시 굳이 마법도 쓰지 못하는 문수가 마법을 배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로이드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로이드에게 지식만 넣으면…….”

- 그래서, 이번 일에 로이드가 절대적인 도움이 됐나?

순간 문수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로이드는 훌륭한 그리고 엄청난 파트너다. 그러나 로이드는 모든 걸 해주는 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도우미에 불과하다.

결국 직접 무언가를 하는 건 문수, 그 자신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부족할 경우, 미숙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역시 문수, 그 자신이다.

목숨이 걸렸다.

오히려 절박해야 하는 건 문수인 것이다.

“지금 당장 배우는 겁니까?”

- 노크 센터로 오게. 그곳에서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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