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5.
신분의 상승.
케르빈 월드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일이다. 노예들은 평민이 되기를, 평민들은 귀족이 되기를 소원한다. 기회가 있다면 신분상승을 거절할 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위가 오른다는 건 좀 민감한 이야기다. 특히 남작이 자작이 되는 것과 자작이 백작이 되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정도 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큰 공을, 많은 업적을 쌓았다면 남작이 백작이 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백작이 후작이 된다는 것.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공을 세운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백작 위 정도는 솔직히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도 된다. 그러나 후작 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왕국 자체의 크기가, 영토가, 입지가 커지지 않은 이상 새로운 후작이 탄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군다나 콩탄 왕국의 정세는 안정된 상황. 이런 콩탄 왕국에서 후작이 되고 싶다는 의미는…… 기존의 후작을 끌어내린 후에 그 자리에 앉겠다는 의미다.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발언이다. 하물며 문수르는 모르지만, 현재 콩탄 왕국의 제르둔 후작이 사망한 상황에서, 힘과 권력이 있음에도 그동안의 여러 이유로 후작 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후작의 자리를 꿈꾸는 백작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가진 힘은 커도 정치적 기반이 약한 불스 백작이 만약 그런 야심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를 견제하고 탄압하려는 힘들이 밀려올 것이다.
그만큼 비밀을 엄수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그런 사실을 문수르에게 말해준 것이다.
문수르는 불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을 보는 문수르의 눈빛에는 별 다른 기색이 없었다. 안색의 변화도 없었다.
‘오호.’
불스 백작이 그런 문수르의 표정 관리에 나름 감탄할 무렵, 반대로 문수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후작 위를 꿈꾼다고? 정치판에 뛰어들어서 깃발을 쟁취하고 싶다는 이야기로군.’
차라리 이게 낫다.
불스 백작이 정치적 성공을 위해 이제르트 자작가의 힘을 빌린다면, 정치적 성공 이후에는 그에 준하는 대가를, 봉사한 대가를 이제르트 자작가에 주어야 할 터.
불스 백작이 불스 후작이 된다면, 그런 불스 후작의 지원을 받는 이제르트 자작가는 나쁠 게 없다.
물론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문수르는 불스 백작을 후작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엘프 마을에서의 기연이 여기서 도움이 되는군.’
능력은 있다. 하지만 문수르가 가진 능력은 증명하기 힘들다. 대신에 다른 것으로 문수르는 자신이 가진 걸 증명할 수 있다.
“일단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라면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라면 불스 백작님께서 후작 위에 오르는 데에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말뿐인가?”
“불스 백작님께서는 그런 능력의 증명을 원하시겠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당장 그 모든 걸 증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후후후.”
묘하게 웃는 불스 백작. 문수르는 그 웃음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문수르가 걸음을 내딛었다.
철그렁!
그러자 문수르를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덩달아 움직였다. 여러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움직이자, 갑옷 쓸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몇몇 기사들의 검은 문수르를 지척에 놓았다.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문수르를 찌르고 벨 수 있는 거리다. 그리고 그런 검 끝에는 지독하리만큼 잘 절제된 살기가 맺혀 있었다.
서툰 수작 부리지 말라는 거다.
그 순간 문수르가 움직였다.
쉬익!
문수르의 움직임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기사들이었다.
이미 경고는 했다. 수차례나 해줬다. 그 정도면 지킬 기사도는, 예의는 다 한 셈이다.
그럼에도 문수르가 움직였다면,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다. 상대가 비무장 상태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기사도란 무자비한 검의 세계에 아주 약간의 예의를 둘 뿐이다.
검 그리고 검을 든 자는 무슨 미사여구를 붙여도 무자비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수르의 움직임은 더 무자비했다.
목덜미, 허리춤, 어깻죽지.
세 방향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세 자루의 칼날 속에서 문수르는 너무나도 여유롭게 걸었다.
휘익, 휘익, 쉬익!
동시에 날아온 모든 공격을 순식간에 피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보인 채로 말이다.
“포위해!”
기사 한 명이 소리쳤고, 동시에 기사 한 명이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린 기사는 팔을 벌렸다. 당장 문수르를 덮칠 생각이었다.
엄청난 각오였다. 칼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적을 몸으로 결박한다는 건, 자신 역시 난무하는 칼 속에서 희생했다는 의미니까. 즉, 몸을 날린 기사는 문수르와 같이 죽을 생각이었다.
소름마저 끼치는 각오다.
하지만 문수르는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린 기사를 가볍게 피한 후에, 기사의 발을 걸었다.
쿵!
기사가 자빠지자.
쉬익!
기사의 몸뚱이 위로 검들이 스쳐 지나갔다. 문수르가 발을 걸지 않았다면, 그 검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 기뻐할 자는 없었다. 더불어 문수르를 향한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남은 기사들이 문수르를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날아오는 검의 폭풍 속에서 문수르는 잠깐, 아주 잠시 동안 두 눈을 감았다.
이윽고 문수르가 눈을 떴을 때.
문수르는 낚아챘다.
파각!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의 칼날을, 허공에서 부러뜨림과 동시에 낚아챈 것이다.
그 상태로 문수르는 검을 들었다. 검 자루 대신, 칼날을 잡은 채로 검을 들었다.
우웅!
그러자 문수르의 검에서 푸른 오러가, 오러 소드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헙!”
이제까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덤벼들던 기사들의 입에서 처음으로 숨 넘어가는 소리가 나왔다.
그 정도로 문수르가 보여준 것, 오러 웨폰의 경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武)의 길을 걷는 자들은 누구나 꿈꾸는 경지, 오러 마스터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가 바로 오러 웨폰 아니었던가!
스윽!
그 와중에도 기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문수르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기사들의 눈빛은 여전히 섬뜩하고, 결의가 어려 있었다.
꿀꺽!
그러나 입에 가득 고이는 침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긴장감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라는 사실을 자각하자 그 긴장감은 압도적인 공포가 되어버렸다.
어깨가 무겁다.
‘검이 이렇게나 무거웠던가?’
평생 휘두르며, 이제는 깃털보다 가벼우리라 생각했던 검이 오늘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수천, 수만 번을 휘둘러도 거뜬했던 검이거늘, 이제는 한 번 휘두르는 것조차 힘들 것처럼 느껴졌다.
짝!
그 사이를 가로지는 경쾌한 박수소리.
“모두 물러나라.”
엄중한 목소리가 침묵 깔린 전장을 헤집었다. 기사들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섰다.
“오러 마스터라…… 이제르트 자작 밑에 대단한 인재가 있었군.”
“별 거 아닙니다.”
“아무리 기가스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오러 마스터가 가지는 가치는 의미가 다르지.”
말을 뱉는 불스 백작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문수르는 그 미소에서 불스 백작의 그릇을 볼 수 있었다.
‘이 인간…… 충분히 야망을, 야심을 품을 수 있을 정도의 그릇이구나.’
여차하면 오러 마스터란 강력한 검사가 자신의 목을 노릴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과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문수르는 안다. 불스 백작이 지은 미소의 이유를. 불스 백작은 거짓으로, 연기로, 미소를 지은 게 아니다. 그 미소는 충분한 만족 그리고 기쁨에서 나온 미소였다.
오러 마스터를 품은 이제르트 자작가가 자신을 도와줄 경우, 그 무엇보다 확실한 지원이 될 수 있으리란 사실에 대한 만족과 기쁨!
‘다행이군.’
이 정도 배포가 있기에 문수르의 의도도 먹혀들 수 있는 거겠지.
문수르는 칼날을 놓았다.
그러나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들은 곁눈질로 불스 백작을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흠.”
불스 백작은 그런 기사들을 보며 짧게 생각했다. 그게 전부였다.
“모두 나가보게.”
“배, 백작님!”
기사들이 기겁했다. 이 엄청난 실력자를 두고 모두들 나간다면 누가 백작을 지킨단 말인가?
“기가스를 이 서재 안으로 끌고 들어올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오러 마스터가 정말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내가 방심하는 틈을 절대 놓치지 않았겠지.”
기사들은 더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쓰러진 기사를 데리고, 천천히 서재 밖으로 나갔다. 당연히 문수르와 불스 백작, 둘만이 서재에 남게 됐다.
침묵이 깔리진 않았다.
“오크가 오러 마스터라…….”
불스 백작은 잊지 않았다. 문수르가 앞서 했던 말을, 또투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거짓말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눈앞에서 오러 마스터임을 증명하는 자가 그리 말했으니, 거짓말은 아닐 터. 즉, 정말 테블스 산에는 오러 마스터인 오크가 있는 셈이다. 문수르는 그 오크 뒤에 흑마법사가 있다고 했다.
“정말 흑마법사가 있는 건 맞나?”
흑마법사를 잡는 것. 그건 분명히 정쟁에 뛰어들 만한 자격이 된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정말 있을 확률은? 솔직히 그건 알 수 없지 않은가?
“예, 있습니다.”
문수르도 흑마법사를 본 적은 없으나, 문수르는 자신의 감을 믿고 확실하다 말했다.
“좋네. 그럼 이제르트 자작가를 치기보다는 흑마법사를 처치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겠군.”
“감사합니다.”
문수르가 가장 원했던 목적은 달성됐다.
“대신에 이제르트 자작가는 어떤 식으로 내게 지원을 해줄 생각인가?”
그러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 조건은 하나 더 있었다. 불스 백작이 후작 위에 오르는 걸 전폭적으로 돕는다는 조건!
누군가에게는 이게 더 까다로울 수도 있을 터. 그러나 문수르에게는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준비했던 게 도움이 되겠군.’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령의 운영 계획, 앞으로의 청사진을 정리해 종이에 써왔다. 이제르트 자작령이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썼던 내용이다. 지금 그걸 보여준다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저력을, 미래를 설명하기 더 쉬울 것이다.
문수르가 건네준 그것을 불스 백작은 천천히 읽었다.
“장밋빛 전망뿐이군.”
“어느 정도의 지원이 있다면 단순히 장밋빛 전망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좋네. 좀 더 지원해주도록 하지. 내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해준다면야, 금전적 지원 정도는 얼마든지 해주지.”
의외로 쉽게 넘어가는 불스 백작. 하지만 정말 이 정도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판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스 백작은 문수르를, 이제르트 자작가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년 여름에 빅토리안 공작 각하께서 파티를 주최하신다. 콩탄 왕국에서 날고 기는 귀족들은 전부 그곳에 모이겠지. 그곳에 내 호위기사로 동행하게.”
오러 마스터를 아군으로 둔다는 것, 휘하 전력으로 둔다는 것.
제 아무리 기가스가 판을 치는 시대라도 그 가치는 엄청나다. 그런 문수를 호위기사로 데려간다면, 어떤 귀족들 앞에서도 쉽게 꿇리지 않을 것이다. 오러 마스터의 존재는 그 정도로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란 사실을 아는 순간, 불스 백작은 결단을 확실하게 내렸다. 문수르를, 이제르트 자작가를 품고 가기로.
반대로 문수르 입장에서는 의외였다. 단순히 오러 마스터란 사실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불스 백작이 쉬이 결정을 내릴 줄은.
그러나 일단은 원하던 결과다. 대체 무슨 배경이 더 얽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던 결과가 나왔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알겠습니다.”
문수르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일단 합의는 끝이었다.
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