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4.
불스 백작은 자신의 서재에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서재에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서재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다. 그 어떤 적이 오더라도, 서재에서는 막을 수 있다. 이미 기사들이 대기를 하고 있고, 기가스가 움직였다.
엄청난 대군! 그 정도의 군세가 오지 않는 이상, 불스 백작을 어찌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불스 백작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암살자마냥 달려오는 기사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고려했다.
‘반발은 예상했다.’
이야기는 들었다.
문수르.
지금 이곳을 향해, 자신을 향해 오는 자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이미 파악이 끝났다. 그 정도도 못하면서 대의를 논하고, 명분을 논할 정도로 불스 백작은 추레하고, 허접한 자가 아니다.
‘그래도 제법 빠르군.’
대응은 당연히 예상했다. 자신의 속마음도 모르는 놈이었다면, 애초에 손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걸 막기 위해 움직이리라 예상했다.
‘극단적으로는 내 목숨을 노릴 수도 있지.’
더불어 만약 정말 극단적인 수법을 쓴다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경우도 있으리라 예상했다. 어차피 영지전으로 들어가면, 이것저것 잴 필요가 없으니까. 잃을 게 없는 이제르트 자작가 입장에서 불스 백작의 암살은 충분히 시도할만한 사항이다.
그래서 준비는 해뒀다.
아니, 오히려 보통의 귀족이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무조건 방어만을 고려했을 터. 그 외의 선택지는 준비해두지도,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스 백작은 달랐다.
안전을 택함과 동시에 그는 여전히 선택지를 남겨두었다. 물론 이미 마음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몰락시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친왕파 세력에 균열이 생겼다. 여기에 제국의 정세도 그다지 좋지 못하지. 필로스 전하의 저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필로스 전하 밑에서 귀족들은 이미 힘을 키운 상황이고. 필로스 전하의 힘만으로 국정을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친왕파 귀족이 아닌 불스 백작이 흔들리는 콩탄 왕국의 정세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하며, 이제르트 자작가를 처단했다는 타이틀은 충분히 그 자격이 될 수 있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처치하는 건 일종의 자격증 시험 같은 셈이다.
이 자격증이 없으면 애초에 정쟁 속에 뛰어들 수조차 없다. 그래서 빠르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 어떤 귀족도 불스 백작의 상황이라면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야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야망을 품은 채 이제까지 이렇게 많은 준비를 했는데 기회 앞에서 넋 놓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오히려 누군가는 의구심을 던질 것이다.
이 외의 선택지라도 남긴 불스 백작의 의중을 모르겠다고.
‘고구마라고 했었나?’
우습게도 불스 백작에게 다른 선택지, 혹시 모르는 합의점을 남긴 이유는 고구마였다.
문수르는 고구마를 수확한 이후 상단을 시켜 그 고구마를 불스 백작가에 보냈다. 먹는 방법도 같이 동봉해서 말이다. 처음에 그 고구마를 받았을 때 불스 백작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문수르의 전력도 있으니, 무슨 기대를 할까?
거기에 처음 보는 작물이다. 보기에 맛이라도 좋아 보이면 모르겠는데, 투박하고, 흙이 덕지덕지 묻어있으며, 딱딱하기까지 하다.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두다가, 그래도 선물인데 한 번 먹어보자 해서 먹어봤다.
‘맛있었지.’
처음이었다. 그렇게 깊은 풍미를 가진 단맛을 맛 본 건 말이다.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였다. 문수르가 보내줬던 고구마가 불스 백작의 뱃속으로 들어가기까지는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더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어서 그냥 참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고구마 맛 때문에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스 백작이 고구마에 의미를 둔 건, 그것이 처음 보는 맛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새로운 작물 재배에 성공했고, 더불어 굉장히 상품 가치가 높은 작물이다.’
영주라면, 많은 부분에 대한 지식과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장사 수완도 당연히 필요하다. 돈을 버는 것도 영주의 능력 중 하나이니까.
불스 백작의 눈에 비친 고구마는 엄청난 가치가 높은 작물이었다. 대량 재배가 가능하다면, 시장의 판도를 충분히 흔들 수 있다.
물론 불스 백작에게 당장 필요한 건, 언젠가 이익이 될 작물이 아니라 당장 정쟁에 뛰어들 수 있는 자격증이다. 하지만 적어도 고구마가 불스 백작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고구마를 보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제르트 자작이 정쟁에 뛰어들기 위해 필요한 자격증, 그 이상의 것을 제시한다면?
솔직히 자격증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몰락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좀 더 비싸고, 좀 더 대가가 필요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 단지 시간과 대가를 고려했을 때, 이제르트 자작가를 치는 게 가장 낫다고 생각했을 뿐.
‘혹시 모르지.’
그래도 선택지를 남겨두는 건 나쁘지 않을 터.
물론 불스 백작은 확실한 선을 그었다. 문수르가 어떤 능력을 가졌건 간에, 불스 백작가에 적의를, 큰 피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합의 따위는 없다. 처절한 응징만 있을 뿐!
“지금까지 피해는?”
그래서 불스 백작은 다른 그 무엇보다 현재의 피해 상황에 가장 큰 초점을 맞췄다.
“성벽 등 재산 피해는 있습니다만…… 사망자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렇군.”
그런 불스 백작의 의중을 아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이제까지 사망자는 없었다.
적의는 없다는 의미일까?
‘단순히 나와 협상을 하려는 건가?’
짧은 고민.
그 속에서 기사 한 명이 물었다.
“백작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사의 물음은 간단하다. 당장 기사들이 움직이면 그리고 기가스가 움직이면 문수르를 처치하는 건 일도 아니다.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가 아닌 이상…… 혹여 오러 마스터라고 해도 도망쳐서 목숨을 구하는 게 전부일 터.
불스 백작이 명령만 내리면 된다. 그럼 이런 피해를 감수할 필요도 없이, 처치할 수 있다.
“다른 병력은 보이지 않나?”
“예.”
“혼자 왔다는 거로군.”
“혹시 모르니, 좀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아니, 됐네.”
불스 백작은 상황을 정리했다.
‘문수르는 혼자 왔고, 나랑 합의를 보러 왔다. 예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납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문수르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불스 백작의 선택이다. 이젠 골라야 한다.
이제르트 자작가와 합의를 볼 것인가 아니면 이제르트 자작가를 확실하게 칠 것인가.
“문을 열어라.”
불스 백작의 결단을 빨랐다.
“예?”
기사들은 당황했다. 불스 백작이 문을 열라는 건 침입자를 맞이하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물론 기사들은 자신한다. 침입자가 제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자신들의 가드를 뚫고 불스 백작을 어찌하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또한 수작이 가능할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 서재는 그럴 만한 장치들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언제부터 문수르를 쫓는 자들이 사라졌다. 이윽고 문수르 앞에 활짝 열린 서재의 문이 들어왔을 때 문수르는 처음으로 숨을 돌렸다.
“후우!”
힘들다.
숨을 돌리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너무 힘이 들었다.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문수르는 이 상황에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쓰러지기에는 이제까지 해온 게 너무 아깝지.’
쓰러지려면 진즉에 쓰러졌어야 했다. 이제는 이제까지 해온 모든 게 아까워서라도 쓰러지지 못한다.
문수르는 걸음을 내딛었다. 천천히, 활짝 열린 문을 향해 뚜벅뚜벅 발을 내딛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섬뜩한 살기가 문수르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불스 백작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였다.
‘좋아.’
이제부터 진짜 승부다. 이제까지는 전초전…… 아니, 프롤로그조차 되지 못한다.
문수르는 살기를 느끼는 순간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바닥에 던졌다.
카앙!
창이 너부러지며 묘한 소리를 냈다.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였지만 문수르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문수르가 창을 버리자 살기가 묘하게 흔들렸다. 무기를 버린 적을 공격하는 건 기사도가 아닐 터. 기사들은 짧게 흔들렸으나, 이내 다시금 살기를 바로 잡았다.
‘역시 훌륭하군.’
불스 백작의 기사들은 정말 뛰어나다. 그래서 문수르는 안심했다. 적어도 그들은 불스 백작이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으며, 문수르를 어찌하지도 못한다.
‘잊자.’
문수르는 거기서 기사들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보다 확실한, 보다 냉철한, 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위해서, 그 생각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걸 잊어버리기리고 했다.
그러자 곧바로 문수르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불스 백작님, 테블스 산에 묘한 오크가 있습니다. 그 오크에 대해서 짤막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문수르의 말.
불스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불스 백작의 눈과 문수르의 눈이 마주쳤다. 불스 백작은 눈빛으로 말했다.
나를 설득해라.
문수르는 눈빛 대신 말로 대답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문수르는 또투라는 오크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오크들의 존재 그리고 놈이 오러 마스터라는 사실까지.
그건 솔직히 현실성이 결여된…… 다른 누가 들어도 거짓부렁에 날조 혹은 소설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불스 백작은 반문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윽고 문수르는 또투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사실이 아닌 의견을 내놓았다.
“저는 테블스 산에 흑마법사가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그 흑마법사가 또투란 오크를 만들었으리라 추측합니다.”
결국 문수르가 내놓은 답, 문수르가 불스 백작을 움직이기 위해 고른 카드. 그건 바로 흑마법사였다.
왜 문수르는 흑마법사란 소재를 꺼냈을까?
‘재미있군.’
불스 백작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흑마법사.
굉장히 매력적인 카드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흑마법사를 환영하는 곳은 없다. 흑마법사를 처치하는 건 영광이다. 그 흑마법사의 악명이 높을수록 영광은 높아진다.
더불어 흑마법사를 처치하기 위해 대부분의 나라는 흑마법사를 처치하는 자들에 대한 대우를 해준다. 당연하다. 흑마법사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데, 만약 그 어떤 대우도 해주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희생을 하지 않을 터.
영광과 대우.
‘지금 이 혼란 속에서 흑마법사를 처치한다면, 나름 괜찮은 카드가 될 수 있지.’
그게 있다면 정쟁에 뛰어드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할 터.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를 치는 것만큼은 아닐텐데?’
그러나 단순히 흑마법사를 처치하는 것과 이제르트 자작가를 어찌하는 것. 현재의 정쟁 속에 뛰어들기에는 후자의 타이틀이 훨씬 좋다. 흑마법사는 흑마법사지만, 이제르트 자작은 필로스 왕의 눈엣가시, 친왕파의 걸림돌이다. 그걸 치워주는 게 더 속이 편할 터.
그러니까 문수르는 여기서 제시해야 한다.
흑마법사 플러스알파.
더불어 플러스알파의 크기는 흑마법사, 그 이상의 것이어야만 한다.
문수르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문수르는 자신이 그 무언가를 제시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문수르는 여기서 뭘 제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은 많지만, 적어도 지금 보여줄 만한 것은 아니니까
‘좋아.’
때문에 문수르는 여기서 역으로 물었다.
“불스 백작님, 혹여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불스 백작이 원하는 걸 듣겠다. 그리고 그걸 들어주겠다. 적어도 문수르가 주는 선물보다는 불스 백작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게 훨씬 나을 터.
불스 백작은 거기서 다시 웃었다.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줄 수 있는가? 네가?”
“듣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불스 백작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기사들이 문수르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스윽.
동시에 기사들이 드는 검에 정제된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위협을 위한 살기가 아니었다. 적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베기 위해 깃든 살기였다.
확실하다.
여차하면, 불스 백작이 어떠한 제스처를 취하는 순간 기사들이 문수르를 공격할 것이다
“이제부터 말하지. 내가 원하는 걸 네가 듣는 건 네 자유다. 하지만 내 말을 듣고, 노(NO) 라는 대답을 한다면, 네 목숨은 없다.”
협박 아닌 협박.
하지만 문수르는 웃었다.
“말씀하시지요.”
“내 목표는 후작이란 작위다. 내 대에서, 불스 백작가는 불스 후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불스 백작의 목표.
그것은 바로 후작으로의 상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