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74화 (74/293)

74화

<18화. 담판.>

1.

불스 백작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답장을 손에 쥔 건 이제르트 자작이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답장을 집으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조차 본 적 없는 불스 백작과 이렇게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이야.’

불스 백작과의 모든 일은 문수르가 혼자서 진행시켰다. 이제르트 자작은 불스 백작의 이야기만 들었지,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 것이다. 귀족에게 얼굴을 본다는 건 중요하다.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만남을 가져야만 하니까. 그래서 이제르트 자작은 이런 개념이 조금은 신기했다.

동시에 신기함만큼이나 놀랍기도 했다.

‘무언가가 변하고 있다.’

문수르가 오기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 누군가는 사소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제까지 그 누구도 그 사소한 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때문에 고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것을 변화시켰다.

“나는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

더 이상 잃을 게 없던 이제르트 자작에게는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하던 때였다. 이런 변화는 얼마든지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불스 백작도 이 변화를 좋게 받아들일지, 그건 나도 모르겠군.”

하지만 불스 백작은 어떨까? 그는 이 변화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세상 모든 이들이 변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특히 귀족들, 이미 좋은 자리에 앉은 그들은 결코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이들을 너무나도 많이 봤다. 변화를 원치 못하다 못해, 변화를 막는 자들.

불스 백작이라고 해서 과연 그들과 다를까?

모르겠다.

이제르트 자작은 불스 백작을 본 적도 없다. 때문에 그가 어떤 인간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이런 서면을 통한 대화조차도 이번이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그뿐일 테니까.

때문에 이제르트 자작은 손에 쥔 답장을 개봉하지 않았다. 불스 백작의 인장이 찍힌 그 답장을 그저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문수르 경은 내가 결정을 요구할 터.’

상황을 보고 판단을 내리는 건 문수르다.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문수르는 결국에는 이제르트 자작에게 결정권을 넘길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문수르가 고맙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르트 자작은 확실하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싶은 일에 있어서는 문수르과 대립각을 세우더라도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문수르가 내리는 결정이 언제나 옳다고 해도, 가끔은 옳은 것을 떠나 다른 선택을 내려야 할 필요도 있다. 손해를 보더라도 그런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은 자신만의 생각에, 감정에 취해 그런 선택을 내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불스 백작의 답장 서신을 읽지 않았다.

2.

문수르는 불스 백작의 답장을 읽자마자 안색을 굳혔다. 사실 답장의 내용은 좋았다. 기대했던 내용이었다.

“불스 백작이 지원 병력을 보내준다고 합니다.”

답장을 뜯지 않은 탓에 내용을 모르는 이제르트 자작을 위해, 문수르는 답장의 내용을 말해줬다. 이제르트 자작은 살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귀족들 간에 지원병을 보내주는 경우는 국운(國運)이 걸린 전쟁 혹은 피를 맹세한 동맹 관계가 아닌 이상 거의 없다.

귀족들에게는 보유할 수 있는 병력에 한계가 있다. 지원병을 보내준다는 건 그 병력 중 일부를 떼준다는 것! 그렇다면 그만큼의 병력 공백이 생기는 셈이다.

차라리 돈을 주면 돈을 줬지, 병력을 주는 경우는 없다. 그 때문에 용병들이 크고,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것이고.

물론 불스 백작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좋게 보는 만큼, 어느 정도의 지원은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병사 오백 명과 기가스 두 대. 불스 백작가에서 보내는 지원 병력의 숫자입니다.”

“음!”

병력의 숫자다. 이제르트 자작 역시 지원 병력의 수를 듣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너무 많군.”

“현재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력을 가뿐히 상회하는 수준이지요.”

너무 많다. 많이 도와주면 좋다고? 아니다. 불스 백작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병력 지원은 호감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호감이 있다고 돈을 좀 쥐어주는 것과 병력을 지원해주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물며 병력을 지원해줄 때, 보통은 그 영지의 병력 이상의 병력을 지원해주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이유?

간단하다. 영지의 병력 이상의 병력을 지원할 경우, 자치 잘못하다가는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생기니까. 아주 긴급한 경우에 지원해준다면 모르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긴급하다기보다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병력 요청이었다.

더군다나 불스 백작은 가진 병력을 허투루 쓸 만한 성정의 사내가 결코 아니다.

‘불스 백작은 힘을 몰래 키운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이렇게 크게 병력을 움직인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

하물며 불스 백작은 이제까지 웅크린 채 힘을 키워왔고, 그 사실을 숨겨오기도 했다.

만약 이번 지원 병력 사건이 알려지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불스 백작의 병력이 세간에 알려질 것이다.

그뿐인가?

‘불스 백작이 이제르트 자작을 도울 이유가 있나?’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도와주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불스 백작은 자신의 호감과 정치적 이익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정도의 분별력을 가진 이다.

그런 그가 이제르트 자작을 도울 시에 생기게 될 정치적 손해를 무시할 리가 만무하다.

이 순간 문수르는 직감했다.

‘돕는 병력이 아니다.’

빠득!

이가 절로 갈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문수르가 꿰뚫어 본 불스 백작의 의도는.

“불스 백작이 우리 영지를 칠 모양입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몰락. 그것도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불스 백작의 손에 의한 몰락이다.

이제르트 자작 역시 두 눈을 감았다. 사실 그는 문수르보다 훨씬 먼저 직감했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원래 그랬다. 그는 콩탄 왕국의 귀족이지만, 콩탄 왕국이란 땅에서 버림받은 귀족이다. 더불어 필로스 왕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필로스 왕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귀족들은 이제르트 자작을 어찌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냥 나둘 뿐이었다.

호의보단 적의가 더 많은 세상 속에서, 불스 백작은 그저 또 다른 적의를 가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문수르 경 어찌하겠는가? 내가 보기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 같네.”

문수르를 부르는 이제르트 자작. 그는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황하진 않았다. 그의 눈빛은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했다.

“싸우거나 혹은 항복하거나.”

냉철한 답.

그러나 문수르는 고개를 저었다.

“협상을 하겠습니다.”

“협상?”

모호한 말이다. 말이 협상이지, 이미 칼을 빼든 불스 백작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낼 방법이 있을까?

불스 백작은 경거망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그가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그만한 이유와 심사숙고를 했다는 의미일 터. 과연 그런 그를 설득한다는 게 가능할까?

그러나 문수르의 생각은 달랐다.

‘전쟁도, 항복도 무의미하다.’

할 수 있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문수르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이 시간, 불스 백작가의 병력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하고 있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과연 불스 백작가의 병력을 막을 수 있을까?

시간벌이조차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문수르는 전속력으로 불스 백작가에 가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빠른 시일 내에, 그렇지 않으면 불스 백작을 설득했음에도 정작 이제르트 자작가는 무너져 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원 병력이 도달하기 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있다.’

문수르가 움직였다.

3.

“로이드. 현재 불스 백작의 병력의 상황은?”

- 이제르트 자작령에 도달하기까지 앞으로 5일 남았습니다.

“좋아.”

문수르가 고개를 들어 드높은 성벽을 보았다. 한 번 본 적이 있는 성벽이었다.

불스 백작령의 성!

이제르트 자작령의 그것과는 다르게 실효성은 물론, 예술적인 위용마저 넘치는 멋진 성이었다. 영화 속에서도 보지 못할 정도로 훌륭한 성, 하지만 문수르는 그 성에서 그 어떤 감상도 느끼지 못했다. 문수르가 느끼는 감정은 단 하나.

‘넘는다.’

성의 아주 단순한 가치, 바로 성이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해물이란 사실뿐이었다.

문수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이곳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오면서 로이드를 통해 무수히 많은 시뮬레이션을 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건 무의미했다.

문수르는 달렸다.

파밧!

보법을 밟으며, 오러를 끌어올렸고 전신의 근육에 오러를 주입했다. 오러를 머금은 근육이 초월적인 힘을 내뿜기 시작했고, 문수르의 속도는 더욱 가속되었다.

때문에 금방이었다.

“어? 어?”

“뭐지?”

성벽 위의 병사들, 그들이 문수르를 보지 못할 리 없었다. 문수르는 자신을 숨기지도 않은 채, 직선적으로, 가장 동선이 짧은 길을 뛰었으니까. 그러나 병사들이 문수르를 눈치 챘을 때.

파밧!

문수르는 어느새 성벽 근처로 도달했고.

“응?”

병사들이 그 광경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을 때.

쾅쾅!

문수르는 해자를 뛰어넘음과 동시에 성벽에 발을 박아 넣은 후, 동시에 성벽 위를 달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침입자다!”

병사들이 기겁하며, 등을 돌리며 침입자의 등장을 방방곡곡에 알리기 위해 소리를 내질렀을 때, 어느새 문수르의 모습은 등을 돌린 병사들의 등 뒤에서 솟아올랐다.

병사들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기겁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을 때.

“어?”

문수르는 없었다.

문수르는 어느새 병사들과 성벽을 뛰어넘은 후에 그 다음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병사들은 순간 당황했다. 자신들이 헛것을, 귀신 따위를 본 게 아닐까, 하는 착각!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문수르는 그 사이에도 엄청난 속도로, 최단거리를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이미 로이드를 통해 이동 루트를 확보한 문수르에게 거침은 없었다. 외성을 뛰어넘은 문수르는 엄청난 속도로 내성을 향해 이동했다.

그러나 불스 백작가 역시 허술한 곳이 아니었다. 외성에서의 외침은 곧바로 내성에 도달했다. 때문에 내성에 있는 병사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문수르를 노려봤다. 자신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문수르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막아!”

“기사님들을 불러!”

병사들이 분주하게 하지만 매뉴얼대로 착실하게 대응을 하는 사이, 어느새 문수르는 내성까지 도달해 있었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러나 불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어느새 내성 위에서 대기했다. 그들은 문수르가 성벽을 올라오는 순간, 단칼에 문수르를 반으로 갈라버릴 작정을 한 상황이었다.

이윽고 문수르가 성벽 위까지 도달했을 때.

쉬익!

기사 한 명이 검을 휘둘렀다. 섬뜩하리만큼 완벽한 일격이었다. 이 세상 무엇이라도 벨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한 궤적!

그러나 문수르는 그 공격마저 예측했다는 듯 가볍게 피했다.

- 다음 공격이 날아옵니다.

솔직히 확실하게 준비된 공격 따위는 문수르에게 그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한다.

로이드, 이 말도 안 되는 도우미가 문수르의 곁에 있으니까.

반면 기사는 놀랐다.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문수르의 모습에, 그리고 공격을 한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곧바로 내성의 성벽을 넘어가는 문수르의 모습에.

그 순간 문수르를 향해 쏟아지는, 마치 폭우처럼 날아오는 무수히 많은 공격들.

쉬익, 쉬익!

바람을 가르는 그 소리가 섬뜩해서 듣는 모든 이들의 피부 위로 소름을 돋게 만들 무렵.

후욱, 후욱!

문수르는 그 모든 공격을 마치 마법처럼 피하며, 순식간에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막아!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진로를 막으라고!”

그 순간 어느 기사가 소리쳤을 때.

누군가 반문했다.

“저 놈을 어떻게 쫓아가?”

그 반문에 대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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