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4.
문수르가 성으로 돌아왔을 때 환대는 없었다. 문수르는 곧바로 이제르트 자작을 찾아갔다.
이제르트 자작 역시 문수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수르를 보자마자 짤막한 인사만을 건넸다. 전후 사정 따위는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던, 그러려니 여겼다.
때문에 그 둘은 이런저런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곧바로 지도를 펼치고,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시작했다.
문수르가 지도 이곳저곳을 짚으며, 오크들의 이동경로와 오크들이 현재 머무는 장소를 알려줬다. 너무나도 귀중한 정보였다.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정보!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의심하지도 않았다. 문수르를 믿고 따르기로 맹세한 이상,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가 알려준 정보를 사실로 여기고, 작전을 세웠다.
세워진 작전은 곧바로 기사들에게 전달됐다. 기사들 역시 전쟁에만 집중할 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썼다.
이제르트 자작령이니까 가능한 일들이었다. 전쟁이 생활처럼 변해버린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적을 앞두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뭔지 말이다.
그건 기사들뿐만이 아니라, 병사들, 용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승을 거뒀지만, 다음번에는 대승을 거두리란 보장이 없다. 아니, 대승을 거두고 또 거두고, 계속 거둔다고 해도, 이제르트 자작령 앞에 있는 땅은 오랜 세월 인간들을 거부한 땅, 테블스 산이다. 언제 어느 순간 더 많은 몬스터들이 나올지 모르는 땅이다. 기뻐하기보다는 오늘의 승리를 뒤로하고, 내일의 전투를 기약해야 하는 땅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겨울임에도 식량이 나름 풍족한 탓에 사기가 떨어질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배가 부를 때만큼은 그 어떤 군대도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법이니까.
이제르트 자작령은 빠르게 내일의 전쟁에 대한 준비를 끝냈다. 그 후에도 문수르와 이제르트 자작은 따로 이런저런 논의를 나누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문수르는 침대 위에 누웠다. 당장이라도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잔 게 몇 시간 전이지?’
탈라트 부족의 마을로부터 이제르트 자작령의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전력을 다해 뛰어왔다.
그뿐인가?
다짜고짜 또투와 한 판 벌였다. 전투 시간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또투는 오러 마스터의 오크였다. 그런 놈을 상대로는 짧은 전투도 마냥 짧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탈라트 부족에서 전장으로 달려올 때보다 더 힘들었다.
그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됐다. 오크들 사이에서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다. 학살도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처참하게 바르는 건 언뜻 쉬어보이겠지만, 나름 중노동이다.
그 짓을 하고 이후에 휴식 없이 회의의 연속. 지금 시간도 말이 밤이지, 조만간 새벽으로 접어들 것이다. 전쟁에는 밤낮이 없다. 새벽에 오크들이 다시 몰려올지 누가 아는가?
피곤, 피로…… 온갖 종류의 것들이 온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특히 이 사실을 자각했을 때, 쌓였던 피로감이 한 번에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당장 잠에 빠져들고 싶다.
빠득!
그 순간 문수르는 이를 갈았다.
‘개소리.’
당장 자고 싶다. 만약 어스 월드였다면, 그냥 잤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케르빈 월드다.
작은 실수가 큰 불행으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할 지도 모르는 땅.
‘어차피 잠은 죽으면 평생 잔다.’
명언 아닌 명언을 지껄인 문수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히 침대 위에 누워있다가는 저도 모르게 잠에 빠질 것 같았다. 문수르는 저택을 돌아다니며, 다시금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 이번 전쟁이 끝나면 불스 백작은 한 번 만나봐야겠어.”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계획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사이.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왔다.
오크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오크들의 공격은 다시금 자이언트 트롤로부터 시작됐다. 자이언트 트롤들이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고, 놈들은 성벽에 큰 균열과 함께 해자 위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목숨을 다했다.
오크들은 다시 몰려왔다. 오크의 숫자는 또 다시 늘어난 듯, 어제 후퇴한 숫자보다 많았다.
하지만 전투는 어제보다 훨씬 수월했다. 문수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막으면 이긴다. 놈들은 삼일을 버티지 못한다.”
GPS시스템을 통해서 가장 눈여겨 본 건 보급로였다. 오크들이 얼마나 보급을 준비했는지, 보급 수준에 따라 전쟁의 기간이 달라질 게 분명했으니까. 다행히도 오크들에게는 이러다할 보급로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식량은 확보한 듯 보이지만, 그래봐야 오크들 수준이다.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닌 놈들이 보유한 식량은 육류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겨울이다. 겨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다름 아니라 식수다. 테블스 산의 겨울은 몹시 춥다. 왠만한 물은 죄다 얼어버린다.
결국 많이 버텨야 삼일이다. 그렇다면 삼일만 버티면 무조건 이기는 전쟁인 것이다.
굳이 나서서, 오크의 머릿수를 줄이려고 목숨을 걸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확실하게 기간을 명시해주자, 병사들과 용병들의 사기도 하늘을 찔렀다. 전쟁에서 가장 병사들을 힘들 게 하는 건 뚜렷하지 못한 목표다. 마냥 싸워라, 이겨라, 좀만 더 하면 된다…… 하는 사람은 그냥 내뱉으면 되겠지만, 그걸 직접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지옥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투는 병사를 금방 지키게 한다.
하지만 아예 확실하게 기간을 알고, 그 기간만큼만 버티고자 각오를 다졌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여기에 여하튼 문수르의 합류는 어떤 식으로든 이제르트 자작령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오크들의 경우에는 이미 한 차례의 패전으로 인해 사기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놈들이 전술, 전략을 다시 이루며 전장에 나서는 건, 또투의 카리스마가 그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리스마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하루 동안의 전투는 또 다시 이제르트 자작령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두 번째 승리.
하지만 문수르는 기뻐할 수 없었다. 문수르는 처참하게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보수한 성벽인데!’
이번 전투로 간신히 보수했던 성벽이 예전보다 더 처참한 꼴로 망가져버렸다.
그뿐인가? 해자도 망가졌다. 봄이 되면 물을 가득 채워 성을 전투에 제대로 써먹을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는데, 이제 봄이 오면 다시금 해자를 파내는 것부터 해야 할 처지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일에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
‘돈, 돈!’
불스 백작으로부터 받았던 돈을 대부분은 썼다. 더군다나 그 돈은 갚아야 하는 돈이다.
‘봄이 되자마자 어떻게든 수익을 만들어야 해.’
고구마를 팔든, 다른 작물을 재배해서 팔든, 일단 정말 제대로 돈을 벌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음 해는 돈을 버는 데에만 모든 힘을 쓸지도 모르겠다.
한편 문수르는 또투의 흔적이 사라진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두 번째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어렴풋하게 파악됐던 또투의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크들이 물러난다.’
문수르는 세 번째 전투까지도 각오했지만, 오크들은 세 번째 전투를 포기한 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솔직히 이건 의외였다. 지금까지 또투 부족이 해온 준비는 보통 수준의 준비가 아니었다. 아주 작정을 했다. 사생결단, 어느 한 쪽이 확실하게 전멸해야 결판이 날 정도의 작정을 하고 왔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결판이 난다? 오크들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또투, 그 녀석이 머리가 좋건, 능력이 뛰어나건 간에 일단은 오크 아닌가? 흉악한 성정을 가진 놈이다. 그런 놈이 이렇게 제대로 작정을 하고 왔는데, 도중에 모든 걸 무르고 물러난다?
‘그리고 또투 놈의 배후. 이게 중요해.’
어쩌면 이 과정에서 또투가 아닌 또투의 배후에 위치한 흑마법사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문수르를 가장 걱정시키는 게 바로 그 흑마법사의 존재였다. 흑마법사가 또투 외의 다른 무언가를 데리고 다시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격한다면, 과연 이제르트 자작가는 막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제 아무리 문수르가 있다고 해도, 지금 현재 문수르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불스 백작이 도와줘야 한다는 건데…….’
지금 당장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자는 불스 백작.
그러나 막상 불스 백작을 움직이게 만들 만한 소재가 없다. 테블스 산의 일은 어디까지나 이제르트 자작가의 일이다. 불스 백작이 개입할 만한 일도 아닐 뿐더러, 개입할 이유도 없다.
“또 다시 단판을 지어야 하는 건가?”
이번에는 무엇을 이용해야 불스 백작을 움직일 수 있을까?
문수르는 그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크와의 짧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문수르는 간이라도 볼 심정으로 불스 백작에게 서찰 한 통을 보냈다.
5.
불스 백작의 손에는 편지 한 장이 잡혀 있었다. 불스 백작은 조용히 서찰을 노려봤다. 그런 그의 주변에는 기사들이 대기 중이었다. 기사들은 단순히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자들이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조언과 의견을 주는 참모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스 백작은 기사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 편지를 받는 순간부터 이미 결단을 내린 상황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본래 병사 오백 명과 기가스 두 대를 준비하도록.”
갑작스런 불스 백작의 말.
그러나 기사들은 일말의 반문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불스 백작은 이제까지 자신의 병력을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중립을 고수한 것도 그런 불스 백작의 성정 때문이다. 힘을 뽐내기보다는 자중하는 것,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을 키우는 것, 그게 바로 불스 백작의 모토였다.
때문에 불스 백작은 병력을 움직이기 전에는 꼭 기사들의 의견을 구하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실 보통 경우라면 기사들이 반문을 했을 것이다. 불스 백작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중요한 때에 직언을, 충언을 할 수 있는 게 진정한 기사의 도리였고, 불스 백작의 곁에는 그런 기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째서일까?
전후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때라면 불스 백작의 말에 반문을 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야 드디어 지지부진했던 콩탄 왕국의 정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군. 생각보다 훨씬 일찍 흔들렸군. 제르둔 후작이 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이리 쉽게 끝나다니…… 5년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달라진 상황.
다름 아니라 필로스 왕의 최측근이었던 친왕파의 핵심 귀족 중 한 명인 제르둔 후작이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그리고 불스 백작은 이런 날에 대비해 이제까지 힘을 키워왔다. 불스 백작의 기사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불스 백작의 선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제르둔 후작이 반역죄로 몰린 건 친왕파 내의 파벌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의미겠지. 후후후, 조만간 친왕파가 전면전을 시작할 터.”
친왕파의 분열.
그렇다면 조만간 새로운 세력 개편을 위해 귀족들 간의 치열한 자리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그 자리싸움에서 가장 확실한 무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가진 힘, 그 자체다.
또 다른 하나는, 명분이란 놈이다.
“미안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는 내 야망을 위해 몰락해줘야겠어.”
필로스 왕의 눈엣가시, 이제르트 자작가. 그런 이제르트 자작가를 몰락시킨다면 친왕파 내에서 단숨에 핵심 귀족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럼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친왕파에 좋은 대우, 좋은 대접을 받으며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말이다.
결국 불스 백작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